프라이머 [Primer] - Ⅰ

당신의 존재가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by 이공계 문과

프라이머(primer)는 DNA의 복제 과정에 도움을 주는 구조이다. DNA는 염기 서열 합성 방향과 합성이 되는 조건이 정해져 있기에, 신장을 위한 특수 구조를 마련하는 프라이머라는 짧은 RNA가닥이 필요하다. 복제 과정 중 프라이머는 복제 원점 근처에 위치하여 자기 자신의 자리를 제외한 다른 부분의 합성을 돕는다. 이후 프라이머는 제거되고, 그 자리는 DNA의 염기들로 채워진다.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했던 겨울의 야간 자습시간, 갓 태어난 것 마냥 어벙벙하게 서 있던 나에게 자신을 닮은 쪽지를 건넨 사람이 있었다. 바른 글씨체로 채워진 작은 종이에 그동안 모아 온 시험 기출이 담긴 USB가 달려 있었다. '안녕? 내가 네 직속이란다'. 그 말에 나는 즉시 언젠가 당신처럼 되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학교에는 직속 선배-직속 후배 제도가 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는 기숙사 학교의 특성상 학생들의 적응과 학습을 돕기 위한 제도였다. 멋도 모르고 진로 희망 분야를 정보과학으로 적어 냈던 나는, O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선배는 나보다 키가 한참 작았지만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선배와 나의 차이를 만들고 있었다. 선배는 내게 다양한 정보를 주셨다. 인간관계를 뒤로한 채 공부에만 몰두했던 1학년의 나에게 선배는 학교의 세계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내 주변 애들은 카페인을 얼마나 마시고, 아 맞다 매일 마시는 사람도 있어.... 그런데 난 이해가 잘 안 가더라?'

'난 평소에 모르는 게 있으면 선생님께 쉬는 시간마다 물어보러 갔어. 어? 그 선생님이 너네 학년 들어오신다고? 나 그 선생님 학습지 있는데, 받아 가.'


시험기간, 소소하게 내 주머니에 밀어 넣어 주셨던 비타민 음료부터 기출문제 시험지 맨 위에 적혀 있는 출제 범위와 담당 선생님까지. 내가 아무리 복잡한 고민을 들고 와도 부정적인 표현 없이 '아... 이건 사곤데..?'라고 말하는 세심함이 참 좋았다. 성적이 올랐다고 자랑하면, 나보다 더 기뻐해주며 칭찬을 쏟아내는 마음이 따뜻했다. 내 편 하나 없다고 생각했던 학교에서, 바라만 봐도 든든한 사람이 생겼다.


O 선배는 2학년을 마치고 졸업했다. 졸업을 위해서 살인적인 수행평가와 졸업평가 일정을 수행하면서도, 내가 보일 때마다 잘하고 있는지, 자신은 뭘 하고 있는지 알려주셨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었던 1학년 말, 선배는 알게 모르게 날 이끌어 주고 있었다. 선배가 학교에 나오는 마지막 날, 3학년 선배들이 후배들 가져가라고 내놓은 책들 사이에서 선배는 내게 항상 하던 말을 하셨다. '넌 잘할 거야'라고. 그 말이 이토록 야속하고 고마웠던 적은 없었다.


2학년 초, 이젠 익숙해진 풍경 앞에서, 내 직속 후배를 만났다. 내 이름이 워낙 흔해서 그런지 신입생 여학생 중에서도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두 명이 있었다. 직속 후배 지정을 담당하는 임원 친구들에게 '둘 중에 아무나 하나 골라달라'라고 말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S는 나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낮은 목소리, 평균보다 큰 키,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에 약간 긴장되어 보이는 표정. 순간 과거의 내가 겹쳐 보였다.

'안녕? 너 S 지? 내가 네 직속이란다'


좋은 선배가 됨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O선배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를 선명하게 기억할 뿐이었다. 나름대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1학년 때 모아 온 필기를 스캔해서 보내주기도 하고, 애를 잡고 30분 동안 1학년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쏟아내기도 했었다. 가끔 가다 '아차'싶은 순간도 있었고, 이렇게 해주면 더 좋았지 않을까라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O선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도와줬을지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S보다 어둡고 폐쇄적이었던 내 마음을 연 선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S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S가 마음을 열지 않더라도, 나는 내 위치에서, 널 응원하겠다고.


사실 S에게는 미안한 점이 많다. 올림피아드와 조기 졸업 이수를 위해 여름과 가을에는 거의 신경을 써 주지 못했고, 나와 겹치는 동아리나 영재 학급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해의 입시 성공을 기원하는 행사인 '대학 합격 기원제'가 한창이었던 9월의 어느 날, S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그동안 챙겨 줘서 감사했다고, 아침마다 자습을 하고 구보를 열심히 뛰시는 모습이 멋있다고. 우리 학년 친구도 잘 모르는 나를, 그토록 세심하게 본 S가 고마웠다. 내 마음을 고마워해준 S를 만난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지금, O선배와 S를 생각하고는 한다. 내가 O선배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S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것이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다. 내가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 준 두 사람에게 나의 온 마음을 담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