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당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프라이머(primer)는 DNA의 복제 과정에 도움을 주는 구조이다. DNA는 염기 서열 합성 방향과 합성이 되는 조건이 정해져 있기에, 신장을 위한 특수 구조를 마련하는 프라이머라는 짧은 RNA가닥이 필요하다. 복제 과정 중 프라이머는 복제 원점 근처에 위치하여 자기 자신의 자리를 제외한 다른 부분의 합성을 돕는다. 이후 프라이머는 제거되고, 그 자리는 DNA의 염기들로 채워진다.
원래 [프라이머] 시리즈를 계획할 때, 나를 거쳐 갔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 가득 채우기를 기대했다. 나의 계절을 함께해 줘서 고마웠다고,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를 담아 쓰려고 했다. 기쁜 것보다는 슬픈 것이 더 남는다는 말이 있듯이, 내 마음속에도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나 보다. 행복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 그만큼 현실도 차갑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내 잘못일까.
티셔츠에 후드집업이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던 봄의 중반, 학교 지구과학실에서 과학 체험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운석 충돌 방향제가 언제 잘 굳을 수 있는지 지지부진한 실험을 수십 번 반복하다 보니, 이젠 실험보다는 수다가 주목적이 되어 있었다.
코를 찌르는 자몽 향이 유난히 진했던 그날의 기억으로는 K 선배와 나, 그 사이의 간격이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 잼얘(재미있는 이야기)가 뭔지, 누구랑 누구랑 사귀더라, 학교 축제 때 누구랑 춤을 췄다더라…. 선배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겪은 올림피아드 선발 과정의 덕목, 친화성을 누구보다 잘 만족하던 사람이었다.
K 선배는 나보다 한 해 먼저 올림피아드에 응시했고, 그 시점에서는 우리 학교 최고 스펙을 가진 사람이었다. 선배를 우러러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선배가 있는 게 맞는지 매번 생각하곤 했다. 매번 같은 답이 나오기는 했다. '아마도?'
그날 내가 만들던 방향제는 타이밍을 놓치면 운석 충돌 실험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와 선배의 타이밍은 내가 선배의 커리어가 끝났던 국제 대회에서 선배보다 높은 상을 타며, 어긋났다. 굳은 채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석고 방향제처럼, 단단하게.
선배는 결국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다. 전람회라는, 과학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참가할 수 있는 다른 큰 대회에 투자한 것이다. 더위의 습한 냄새가 물씬 풍기던 저녁, 선배는 내게 이 이야기와 함께 응원을 건네주셨다. 그때 말해야 했을까. 선배, 선배 엄청 멋있는 거 알아요? 저 선배처럼 되려고 열심히 했어요.
K 선배와 나는 모든 방향에서 겹쳤다. 비 온 뒤 당연하다는 듯 찾아오는 칼바람처럼,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다. 선배는 결국 S 대학교를 포기했다. 거의 유일하게 지구과학 전공이 있는 곳이었다. 선배와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정쩡하게 지나가며,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꾹 눌러 담길 수십 번. 매번 속에서 메아리치는 비릿한 감정이 무엇인지, 끝내 분간할 수 없었다.
선배가 포기한 S대 자리를 전공이 맞지 않음에도 성적에 맞춰서 쓰려는 아이가 생겼을 때, 너무 불편했다. 아니, 어떤 표현으로도 내 마음을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지구과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배인데 왜 아무 관련도 없는 네가 그 자리에 들어오려고 하는지.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내가 K 선배를 제치고 이 모든 것을 차지할 가치가 있는지. 내가 이룬 모든 것이 선배를, 나를, 천천히 부서뜨리는 것만 같았다.
K 선배에게는 끝내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선배가 나를 이끈 자리에, 나만 남았기 때문에. 아무도 모를 법한 이곳에 글을 쓰는 이유도 같다. 차마 전할 수 없기에, 그럼에도 빈자리가 허전하기에. 시린 겨울이 온 지금, 굳어버린 석고 방향제를 보며 장난스럽게 탄식하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선배는 멋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뭐, 동의 안 하셔도 어쩔 수 없구. 선배가 안 도와주셨으면 저 돌멩이 보다가 때려쳤을거라니깐요? 진짠데. 다 선배 덕분이라니까요?"
그럼 당신은 이렇게 말했겠지. "에이. 얘가 뭐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