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쓸고 갔어요. 비바람이 너무 세차서 걱정이더니 결국 지하수랑 연결된 모터 쪽에 문제가 있는 건지 물이 안 나오기 시작하지 뭐예요. 집안의 전기도 반이 나갔는데 이 반이라는 게 사실 애매한 게 집안의 반쪽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 방향으로 연결된 것들이 에어컨, TV, 냉장고, 정수기라서 사실 거의 생활이 마비되는 수준이에요. 그래도 냉장고는 살려야겠기에 반대편 벽에서 거실을 가로질러 전기코드를 연결했어요. 각 방의 불은 들어오니까 선풍기 한 대만 틀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살 수는 있겠다 싶더라고요.
가장 큰 문제는 식수였어요. 정수기는 안되고 지하수도 안 나오고. 냉장고를 뒤져보니 500ml 생수 몇 병. 원래 간식 챙겨 먹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음료수도 하나 없고 마실 수 있는 거라고는 술....... 이 전부. 씽크대에는 어젯밤에 게으름 피우고 미뤄둔 설거지거리들이 그냥 담겨있는 상태. 우선 비가 그쳐야 마당에 있는 모터를 볼 텐데 저걸 그대로 두자니 갑자기 찝찝해지고 등허리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그렇게 깔끔을 떨 거면 어제 설거지를 해뒀어야지)
우선은 뭐라도 먼저 먹기로 했어요. 이 생수 몇 병으로 최소 내일까지 버텨야 하는데 이걸로는 밥을 할 수도 없고 라면을 끓여도 한 병이 다 들어가는데다 짜니까 물도 더 많이 먹힐 거 같고. 고민을 거듭하다 냉동만두를 꺼내서 생수 반 병을 냄비 바닥에 붓고 찌기로 했죠. 나머지 반 병은 내가 먹기로.
그렇게 설거지 거리를 더 만들어내고 난 후 그래도 배가 부르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빗물을 먹을 수는 없어도 설거지는 할 수 있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잴 것 없이 설거지 거리를 들고 우비를 입고 마당으로 나가요.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워낙 굵어서 그 물줄기에 가지고 간 냄비와 밥그릇과 수저를 수세미로 대충 닦아내요. 여기서 퐁퐁을 쓰는 건 안될 거 같으니 그렇게 물로만 설거지를 하고 다라에 담은 후 마당 한 구석에 둡니다. 물 나오면 제대로 다시 해야겠지만 최소한 벌레는 안 꼬일 거라는 생각에 행복한 마음으로.
정신없이 오전을 보내고 나서 창가에서 계속 내리는 비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내일 날이 개면 브리타 정수기를 사둘까, 그럼 저 빗물을 먹을 수 있을 텐데. 우리 집이 산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이라서 딱히 오염될 게 없는데 집 앞의 저 개울물은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배탈 나려나. 툭하면 항공방제 하는데 괜찮을까? 어릴 때는 산에서 개울 만나면 손으로 떠먹기도 했는데 지금 내 위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나?' 별의별 생각과 별의별 걱정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녁이 되자 물도 전기도 갑자기 다 작동하기 시작해서 이 날의 고민은 이걸로 끝이 났어요. 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마당에서 빗물로 설거지 할 때 큰 다라에 물을 받아놓고 할 걸 그랬어요. 그럼 얼굴이랑 다리에 물 다 튀고 하는 그런 요란은 안 떨어도 됐을 텐데.
만약 지금 인간이 가진 기술들이 갑자기 없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요?
그스막골 집 처마에서 자라는 돈나물. 흙한줌이 바람에 날리다 지붕위에 차곡차곡 모여서 그 위에 떨어진 풀씨가 이렇게 자랐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