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의 우당탕탕 회식생활
술을 마시지 않는 내게 회사를 다니면서 일보다 더 어려웠던 건 회식이었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환영회식, 누군가 팀을 옮기거나 회사를 떠나면 환송회식, 승진을 하면 승진회식, 연말엔 송년회식, 연초엔 신년회식, 그냥 팀 단합을 위한 회식...공식적인 회식만 해도 규모를 달리하며 한 달에 두 어 번은 있었고,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회식까지 하면 회사생활이 아니라 회식생활이라 해도 과하지 않았다.
회식에서 술을 피할 수 있나? pixabay
식사를 하면서 반주 정도를 나누는 회식이라면 그렇게 힘들지 않게 참석했을텐데, 10여 년 전엔 회식이란 거의 100% 술을 거나하게 마시는 모임이었다. 그것도 2차, 3차, 차수를 늘려가며 늦게는 새벽까지도 이어지곤 하는 술자리. 신입사원 환영회식에서 팀장의 술잔을 거부하며 술을 마시지 않는다 선언했던 난 이후 공식적인 회식자리에서도 계속해서 술을 마시지 않고 버텼다.
술을 거부하니 소외되네
처음엔 모두들 황당해 했지만 회식에서 매번 똑같은 태도를 유지하자 선배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라며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었다. 그러나 함께 취하면서 오고가는 정까지 나눌 수는 없었다. 술자리에서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자리를 옮겨가며 자기 술잔을 들고 윗분들에게 가 술을 따르며 인사를 하거나 평소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데 난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입사 초반엔 술을 마시지 않고 말똥말똥한 상태로 술취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가능하면 1차만 마치고 회식자리에서 조용히 빠져나오곤 했다. 몇 번 이렇게 회식을 끝내고 돌아오자 뭔가 묘하게 소외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주고 받는 술잔을 거부하며 술자리에 있으면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소외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소외감이 회식 당일 술자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대체로 회식날은 과음을 하기 마련이라 회식 후 다음 날은 삼삼오오 모여 해장을 하며 회식 소감을 나눴다. 얼마나 술을 마셨으며,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으며, 2차때는 어땠고 3차 때는 어땠는지, 기억이 언제 끊겼는지 등등. 어찌보면 시덥잖은 이야기들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난 회식 후 이야기에서도 소외되는 느낌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음으로써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친밀한 혹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어찌보면 손쉬운 길 하나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회식자리가 아니어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지만 어짜피 참석해야 하는 자리인데 그냥 버리기는 아까웠다. 또 이대로 소외되는 느낌을 가지고 조직생활을 계속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회식에 참여하는 나 나름의 방법이 필요했다.
회식 참석 전략 쇼박스
끝까지 간다
어느 날 회식에서 내 상사였던 부장님이 “나는 니가 참 어렵다.”고 하셨다. 동료들에게, 심지어 상사에게조차 나는 대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장님은 술을 같이 먹지 않아도 함께 하는 느낌이 들면 좋겠다고도 하셨다. 술에 취해 하셨던 말이기는 했지만 동료들이 나를 보는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또 동료들이 원하는 것이 ‘함께 하는 느낌’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일단 몇 번의 회식에서 1차만 끝내고 빠져나오지 않고 끝까지 참석해보기로 했다.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고 있으면 시간이 참 느리게 흘렀다. 옆 동료들은 열심히 술잔을 기울이다 취기가 오르면 서로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언성이 높이기도 했고,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정신이 멀쩡한 내게도 와서 했던 이야기를 무한반복하기도 했다. 그래도 버티며 2차, 때로는 3차까지도 자리를 지켰다.
처음엔 불편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했다. 괜히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술자리에 계속 함께 있는 나를 보며 선배들은 신기해했다. 한 선배는 ‘쟤는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랑 함께 있네’라며 웃음을 보이기도 했고, 어떤 선배는 ‘너는 운전할 수 있겠다’라며 2차, 3차 회식 장소로 이동할 때 자동차 키를 맡기기도 했다.
이후엔 종종 회식 자리 이동을 위한 운전기사 노릇을 자청했다. 선배들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동료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며 때로는 술취한 자신들을 태우고 회식장소에 데려다주는 후배를 그리 꺼려하지 않았다. 회식 후 해장 모임에 함께 할 땐 블랙박스 역할도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어제 회식에서 자기가 무슨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필름이 끊긴 이후 상황은 어떠했는지 등을 선배들이 물으면 대답을 해주곤 했다.
때로는 술이 취해서 말실수를 하기도 하고 싸움을 벌이기도 했었는데 맨 정신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내 대답을 들으며 기억을 더듬는 선배들은 자기가 그랬냐며 놀라기도 하고 때론 부끄러워 하기도 했다. 이렇게 내 나름의 회식생활은 자리를 잡아갔다. 내가 입사한 후 3~4년 정도 지났을 땐 술을 마시지 않는 후배들도 하나 둘 늘어서 그 후로는 회식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모이는 테이블이 만들어지고 있다.
나를 받아준 동료들이 있었기에
첫 환영회식에서 팀장이 건네는 술잔을 거부하며 모두를 불편하게 했던 신입사원. 그 후 나름의 회식 자리 지키기를 통해 나를 대하는 동료들의 불편함은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았다. 역시 “나는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뛰어나군!”이라고 자평하며 회사 회식자리에서 억지로 술을 받아들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나처럼 해봐”라고 조언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나를 받아준 동료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pixabay
하지만 이런 생각은 대단한 착각이다. 싫지만 나처럼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다. 내가 그들에게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라고 말한다면 이 또한 술을 억지로 권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인 것 같다. 이 회식에 대한 이야기는 오로지 내가 할 수 있었던 특수한 경험이다. 그리고 이런 나를 인정하고 받아주었던 내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경험이라 생각한다.
특히 입사 후 5년차에 새롭게 만난 내 상사는 회식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내게 소주잔에 사이다를 따라주며 술자리에서의 형식만 맞춰줘도 된다고 했다. 술이든 사이다든 건배할 때 같이 건배하고 마실 때 함께 마셔주면 된다고. 내 동료들은 내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취한 그들과 내가 함께 어울리기를 바랬다. 그리고 나를 받아주었다.
자기색깔을 강하게 드러냈던 신입사원을 수용해줬던 동료들이 없었다면 나는 회사생활을 지금까지 이어갈 수도, 이런 이야기를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회식생활 이야기는 매우 개인적인, 그래서 보편화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것 같다. 다만, 이렇게 회사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봐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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