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진지했던 융프라우 가기!
스위스 하면 누구나 '융프라우' 를 떠올린다. 예전만 해도 스위스에서 융프라우는 필수 코스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으나 요즘의 여행 분위기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스위스 경험자들 중에서도 융프라우는 막상 별 것 없으니 굳이 안가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과, 그래도 스위스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니 한번쯤은 가 보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로 의견이 나누어진다.
나는 사실 다른 의미에서 융프라우요흐를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계속해서 고민했는데 융프라우의 해발고도는 대략 3454m로, 보통 해발고도 검색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일반 '평지'에서만 늘 살아왔던 내겐 꽤 높이감이 느껴지는 숫자였다. 게다가 다녀온 사람들의 폭풍같은 후일담도 내 고민에 한 몫을 더했다. 융프라우요흐 도착 전 산악 열차를 타고 올라갈때부터 머리가 터질듯이 아팠다는 사람, 융프라우 내렸더니 어지러워서 바로 다시 산악열차를 탈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사람 등등....
5월 말에 시작된 메니에르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과연 저 높은 곳에서 내 귀와 에너지가 온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생각보다 심했다. 게다가 스위스 도착 첫날 높은 고도의 느낌은 어떨지 궁금해서 고속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갔던 '하더클룸' 에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일종의 고산병 증상을 경험하고 나니 걱정은 배가 되었다. 융프라우는 하더클룸보다 훨씬훨씬 더 높은 곳이니 말이다.
못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왠지 더 해보고 싶어 안달난 청개구리의 마음이 갑자기 내게 생겼달까.. 염려가 자라는 만큼 무조건 꼭 융프라우를 가봐야겠다는 소망도 함께 자라났다.관심이 없어서 자의적인 의지로 안가는 것도 아니고 불확실한 상황 때문에 어쩔수 없이 못가는 것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과 같기에 자존심도 상했다. 아이도 책에서 보았던 '융프라우 산악열차'를 꼭 한번 타보고 싶다고 했다. 고도는 높지만 산악인처럼 고산을 직접 등반해야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조금 불편할 순 있으나 대다수의 일반인들이라면 다들 큰 이벤트 없이 잘 다녀오는 융프라우를 못간다면, 왠지 앞으로도 나는 건강에 대한 염려때문에 아무것도 새롭게 경험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몸이 좋지 않았던 옛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번에 깨지 못한다면 그것들이 앞으로도 계속 보이지 않게 내 삶을 제한할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다.
바로 다시 내려오는 한이 있더라도, 계획대로 그린델발트 마지막날 융프라우요흐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상황이 상황인지라, 스위스에서 흔히 판다는 고산병 약은 하나 보험용으로(ㅋㅋ) 가지고 가고 싶었다. 그린델발트 coop 옆에 약국이 하나 있었는데 기대보다 훨씬 친절하게 잘 상담해주셨고, 메니에르 약을 먹고 있다고 하니 아이도 함께 먹을 수 있는 순한 약으로 추천해주셔서 약 11.4프랑정도에 구매했다.
예전엔 융프라우를 가려면 그린델발트 역에서 클라이네 샤이덱 기차를 타고 융프라우 산악열차 타는 곳까지 가야했는데 작년쯤인가 그린델발트 터미널에 아이거 글렛쳐라는 곤돌라 노선이 새로 생기면서 이전보다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됬다. 직접 타보니 역시 생긴 지 얼마 안된 곤돌라라 그런지 크기도 크고, 좀 더 견고한 느낌이다. 성수기엔 자리가 없을 수 있으니 아이거 글렛쳐 역에서 갈아탈 융프라우 산악열차를 미리 예약하는 방법들을 많이 추천하셔서 사실 고민되긴 했는데 우리가 일찍 움직여서인지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산악열차를 탈 수 있었고, 열차는 마침내 융프라우요흐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설산을 바라보며 가는 기차인줄 알았으나..터널같이 어두운 곳을 지나가는 코스..그래서 사실 산악열차를 탄건지 뭘 탄건지 크게 실감이 나진 않았다. 그저 속으로 오늘 무사히 융프라우를 즐기고 왔으면 하는 마음 뿐.
융프라우 전망대는 볼 것도 즐길 것들도 참 많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융프라우를 찾고 있고, 사실 스위스 그 어떤 산들보다 가격도 비싸니 그 가격만큼의 나름 특화된 관광지의 분위기가 입구부터 물씬 풍겼다. 융프라우 파노라마, 빙하를 뚫어서 만들었다는 얼음동굴, 초콜렛상점 등의 여러 코스를 지나 드디어 플라토 테라스에 왔다!
플라토 테라스로 나가니 한여름 8월에 사방이 눈이었다. 플라토 테라스 자체는 사진으로 보며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주 너른 곳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산악열차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더워서 반팔차림에 손 선풍기까지 배낭에 넣어다녔는데, 그런 계절에 눈이라니....융프라우를 덮고 있는 눈들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눈을 보며 한창 감탄하다 방문객 모두의 핫스팟인 국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찍고 나니 그제서야 융프라우요흐에 왔다는 것이 실감나면서 뭔가 뭉클한 것이 속에서 올라왔다.
나를 위해 구매해 간 고산병 약은 정작 우리 남편이 가장 먼저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다음은 초등학생인 아들이, 마지막으로는 아주 미세한 두통을 느꼈던 나까지 셋이 사이좋게 약사가 시킨대로 작은 환 형태의 약 세알을 털어놓고 우물우물 빨아먹었다. 처음 먹어본 고산병 약은 신기하게도 먹자마자 증상이 싹 사라지고 머리가 한결 가벼워 지는 느낌마저 주었다. 고산병 약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나 혼자만 증상이 심해 먹은 것도 아니었으며 올라가기 전에 상상했던 안좋은 상황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에 온 이후로 휴가기간인 7월이 되기까지 크고 작은 건강이슈들이 삶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하나가 괜찮아 진 것 같으면 또 다른 증상들이 길든 짧든 자꾸만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거나, 집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외출하는 일상적인 일들조차 큰 미션처럼 여겨졌다. 동선이 제한되니 마음도 그만큼 작아지고 약해졌다. 악순환의 반복이란 이런것일까.... 그러면서도 미리 정해둔 여행은 취소하지 않고 꼬박꼬박 갔다. 그마저도 취소한다면 더 깊은 우물속에 갇힐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별 생각없이 다 가는, 산악등반도 아닌 열차타고 올라가는 융프라우 방문에 왜 그렇게 감격하느냐고 묻는다면 길고 긴 고민을 끝내고 간 융프라우에서 더 이상 나는 '골골대거나 조심해야 되는' 사람이 아닌 '평범한 나' 로, 몸도 마음도 회복되었다고 진심으로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몸이 좋지않으면 지체없이 내려오자고 맘먹고 간 융프라우에서 우리 가족은 오후 내내 그곳을 즐겼다. 정말 오랜만에 눈썰매도 타고, 융프라우 여권에 도장도 찍고, 보기만해도 반가운 신라면도 먹었다. (융프라우에서 먹어서인지, 아님 5월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먹은 것이라서 그런지 마치 특식을 먹는 기분이었다.ㅋㅋ)
7박 8일의 시간동안 원없이 스위스의 산과 경치들을 후회없이 만끽했다. 우리의 휴가기간이 사실 전세계적으로 휴가기간인 성수기 시즌이라 사람이 너무 많지는 않을까 고민했지만 아직 코로나 여파가 남아있는 탓인지, 아님 성수기를 피해 사람들이 유동적으로 휴가를 썼는지 생각보다 성수기라는 느낌은 그리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여기가 한국인가 싶을 정도로 한국인 여행객들이 정말 많았다. 젊은 청년들이 유독 많아보였는데 혼자서도 용감하게 다니는 걸 먼발치에서 보며 나는 왜 저 나이때 여행다닐 생각을 하지 못했나 하는 이미 소용없는 후회를 잠시 해보기도 했다.
억소리 날 만큼 물가가 비싼것이 사실 큰 단점이긴 하지만, 스위스는 우물 안 개구리 같던 내게 많은 것들을 깨닫고, 보게 해 준 좋은 여행지였다.
다음에 또 갈 수 있을까....? 어쨌든 이번에 최선을 다해 보고 즐기고 느꼈으니, 못가더라도 아쉬움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