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킹'이 즐거운 추억이 된 건 다 스위스 덕분이다.
내 '여행' 취향에 대해 밝히자면, 난 사실 조용한 것 보단 북적북적한 도시의 활기참(혹은 정신없음...)을 훨씬 더 선호하는 사람이다. 예로 캠핑보단 호캉스가 더 좋고, 수목원 나들이보단 코엑스 별마당도서관 가는걸 훨씬 더 좋아하는... 오랜 시간 확고했던 나의 이런 취향도 영국에 와 변화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일단 한국에 비해 영국은 참 주변환경이 좋은 편이다. 동네 주변에 잔디로 이루어진 큰 공원 찾는것이 어렵지 않을 뿐더러 (센트럴 같은 시내에 나가면야 사정이 다르지만) 보통 거주지 근처엔 고층 건물이 거의 없고, 나무나 식물, 꽃들이 굉장히 많다. 아이 등하교를 포함해 웬만한 거리는 다 도보로 이동하는게 이제 일상이 되었는데, 이 나무들 사이로 걸으면서 아스팔트 길을 걸을땐 몰랐던, 걷기의 힘을 새삼 느끼며 살고 있다. 환경이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자연이 좋은 곳으로 나들이를 많이 갔는데 건물에 둘러싸인 실내에서는 분명 얻지 못할 에너지들이 자연에 많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며 살고 있다.
우리가 여름휴가를 스위스로 정한 이유는, (자연이 좋은) 영국에 사는 지인들조차도 입모아 칭찬하는 스위스의 "자연"은 도대체 어느정도인지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휴가'니 역사나 박물관 등의 곳들을 벗어나 정말 자연에서 에너지를 얻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거기에 영국이 자연이 좋긴 하지만 산을 보긴 어려워서 오랜만에 산을 좀 보고싶기도 했고....그래서 스위스에서도 로잔, 제네바 등의 도시는 다 빼버리고, 발코니에 앉아서 커피만 마셔도 좋다는 그린델발트와 마테호른이 유명한 체르마트 두 곳에서만 7박 8일의 여정을 보내기로 했다.
스위스 여행은 팔할이 하이킹이라고 한다. 걷는 걸 정말 싫어했던 예전의 나라면 전혀 흥미가 없었겠지만, 차가 사방으로 지나다니는 아스팔트길과 숲길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린 지금의 나에겐 충분히 매력적인 요소였다. 걷는 것 자체에는 부담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이가 초등 저학년인데다, 우리도 스위스에 처음 왔다는 것, 무엇보다 이번 여행만큼은 무리하지 않고 한군데를 보더라도 제대로 즐기며 보고싶다는 의견이 가족 모두 일치했기에 우리는 아주 널널하게 거의 1일 1산으로 계획을 짰다.
스위스 도착 셋째날, 우리는 기차를 타고 라우터브룬넨으로 가서 슈타우프바흐 폭포를 지나 트뤼멜바흐 폭포까지 가는 하이킹 여정을 시작했다. 편도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여정.
라우터브룬넨 하이킹 코스는 대부분 이 사진과 거의 같다. 오르막도 없고 내리막도 없는 완전한 평지. 푸르른 잔디를 곁에두고 걷는 기분은 생각보다도 더 좋았다.
가다보면 길 위에 한가롭게 노니는 동물들도 익숙하게 볼 수 있고, 여기서 패러글라이딩 하거나 낙하산 타는 사람들도 많아서 멈춰서서 패러글라이딩 하는 것도 지켜보며 슬슬 산책하듯 걸었다. 하이킹 코스로는 여기가 첫번째 코스였는데, 여행 끝나고 생각해보니 가장 하이킹 재미가 덜했던 코스였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길이라 처음엔 좋다고 생각했는데, 시골길 느낌의 평지가 한시간 넘게 지속되다보니 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좀 지친 상태에서 도착한 목적지였던 트리뭴바흐 폭포가 유료코스여서(ㅋㅋ) 돌아나오는 바람에 뭔가 하이킹의 정점을 찍었다는 느낌이 덜했다. 다시 걸어서 라우터브루넨으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같은 길이 반복된다 생각하니.... 돌아올땐 트리뭴바흐 폭포 앞의 버스를 이용했다.
그에 비해 피르스트산은 참 할 것도, 볼 것도 많은 산이었다. 일단 피르스트는 한국인에게 "엑티비티의 천국!" 으로 알려져 있다. 마운틴 카트, 마운틴 플라이어 등 사실 피르스트는 하이킹보다는 엑티비티를 많이 하러들 오시는 것 같다. 그러나 워낙 사고도 많다고 하고 안전제일주의자들인 우리 가족은 딱히 엑티비티에 관심이 많지 않아서 피르스트에서 가장 보편적인 하이킹 코스인 바흐알프제 호수 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절벽을 따라 만들어 둔 '클리프 워크' 를 나름 스릴있게 걷고, 끝에서 야무지게 사진도 찍은 우리 가족. 저 철길 밑으로 아래가 훤히 보이는데 이상하게 크게 무섭지가 않았다. 아마 스위스에서만 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바흐알프제 호수를 향해 걸어 가는 길. 어제 라우터브룬넨의 길과는 다르게 초반은 경사가 제법 있는 오르막이어서 조금 더 힘들긴 했으나 나름 하이킹을 하고 있다는 실감도 났고, 주변의 산들이 손에 닿을 것 처럼 가까이 느껴져서 풍경을 보며 걷는 재미도 쏠쏠했다. 공기도 맑았고...어쩜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산인데 여기서 보는 것과 저기서 보는 것이 다른지 산 밑의 경치들도 틈틈히 구경하며 걸었다.
첫날 갔던 브리엔츠 호수와는 다른 물 색깔이었지만, 한시간 열심히 걸은 보상으로 과분했던 바흐알프제 호수. 가까이 가보니 작은 물고기들도 헤엄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물도 맑고 호수 앞쪽으로는 그리 깊지 않아 아이들이 발 담그고 놀기 좋았던 곳이다. 앉아서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호수에 발을 담그고, 그냥 우두커니 서서 풍경을 즐기고 심지어 낚시를 하면서 사람들은 고요한 호수를 즐기고 있었다. 왕복 2시간 정도가 소요되고 피르스트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하이킹 코스로 유명하다.
마지막 하이킹은 "체르마트" 의 수네가. 체르마트에서 가장 유명한 '마테호른'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고르너그라트도 마테호른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우린 가격과 시간 등을 고려해 수네가를 가기로 했다.
수네가는 마음 먹으면 5개 호수를 따라 하이킹 할 수 있는 곳인데, 우린 그 중 수네가의 '라이호수' 와 '슈틸리제' 호수만 갔다. 사진에서도 얼핏 보여지듯 융프라우 지역의 산들은 한결같이 푸릇푸릇하거나 녹지않은 눈과 얼음으로 하얀 봉우리들을 많았는데, 수네가에 있는 산들은 뭔가 좀 더 개척적이고 광활한 느낌이었다. 돌산 같은 느낌이랄까...? 융프라우에서 5박을 하며 웬만한 산들은 다 봤고, 체르마트 산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융프라우와는 완전 다른 매력의 풍경들... 그래서 사람들이 체르마트를 많이 오는 건가..?
푸니쿨라를 타고 수네가에 내려, 케이블카를 한 번 더 타면 블라우헤르트로 갈 수 있다. 거기서부터 걷기 시작해 슈틸리제호수를 본 후 수네가로 와서 라이호수를 보는 코스로 하이킹을 했다. 스위스 초행자에게 많이 추천되는 일반적인 코스로 2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다. 다만 블라우헤르트에서 수네가로 걸어 내려오는 길이 계속 내리막이라 무릎이 좀 고생했다. 슈틸리제 호수보다 라이호수가 좀 더 아기자기하고, 저기 보이는 뗏목 포함 놀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있어서인지 아이들이 수영하러 많이들 오는 것 같다. 호수 자체는 사실 피르스트의 바흐알프제가 훨씬 더 예뻤지만, 하이킹 코스는 굉장히 광활한 대지를 걷는 느낌이었고, 사방에 남성적인 느낌의 크고 굵직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융프라우 산들과는 또 다른 재미를 느꼈던 곳이다.
스위스 여행 내내, 우리는 참 많이 걷고 걸었다. 물론 파리에서도 로마에서도 우리는 걷고 걸었지만, 스위스에서 '걷는다' 는 우리 가족에게 또 다른 정의를 갖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정말 이런 곳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으로 시작해 세식구 나란히 자연속을 걸으며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웃었다. 돌아보면 핸드폰을 내려놓고, 이렇게 서로의 얼굴을 보며 온전히 대화에 집중한 것이 얼마만이었는지....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기만 해도 합성한 것 같은 멋진 자연풍경이 찍혔던 스위스, 탁 트인 광활한 자연앞에 한없이 여유로워지던 마음, 걷고 또 걸었으나 함께 걷는 가족이 있어 행복했던... 이렇게 스위스에서 했던 하이킹은 우리 가족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 주었다.
가기전에 하이킹 코스를 열심히 조사하고 갔지만, 그런 조사가 무색할만큼 안내가 잘 되어있던 노란색 표지판과 걷기에 최적화되어있던 하이킹 길들.. 이번엔 좀 쉬운 코스로 하이킹을 했지만, 다음에 스위스에 갈 기회가 있다면 그땐 좀 더 난도를 올려 다시한번 하이킹을 해보고 싶다.
'하이킹' 을 떠올리면 '걷는 것' 보단 '즐거운 추억' 을 먼저 생각하게 된 건 다 스위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