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득이하게 브런치를 쉬어야했던 지난 두달간의 이야기
살다보면 그런 날이 있다. 시작하기 전에 뭔가 찜찜하고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드는 날.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영국의 겨울이 원래 뼈가 시리는 추워라지만 그래도 그날은 정말 너무나도 추웠고, 축축한 하늘을 올려다보자니 그저 집에서 이불 쓰고 드러누워 영화나 보며 뒹굴거리면 딱 좋겠다 싶었던 그날.
11월 중반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영국 곳곳에 야외 스케이트장이 설치되는데 여기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예약해서 스케이팅을 즐긴다. 늘 그렇듯 가격이 싸지도 않고, 딱 한시간의 시간이 주어지는 제한적인 환경이지만 주위 배경이 이쁜 Royal Albert Hall 의 스케이트장 같은 경우는 경쟁이 치열해 일찌감치 예약이 마감된다. 작년엔 온지 얼마 안됬던 때였기에 그냥 별 감흥없이 지나갔는데, 영국 사람들이 겨울이면 스케이팅을 즐기니 올해는 꼭 아이를 한번 태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스케이트를 탈 수는 있지만, 뭔가 이 시즌에만 즐길 수 있는 영국감성(?)에 우리 가족도 동참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달까...ㅋㅋ
몇주 전부터 아이에게 스케이트 태워주겠노라고 했지만 그 사이 추운 날씨탓에 세식구가 돌아가며 감기기운이 있어서 계속 미루고 미룬것이 결국 12월이 되었다. 아이도 이젠 스케이트 타러 가자고 졸라댔고, 나 또한 12월 초인 지금도 이렇게 날씨가 추운데, 앞으로는 얼마나 더 추울까... 아마 오늘이 가장 따뜻한 날씨이겠거니 생각하니 조바심이 슬슬 나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던 뭔가 찜찜하고 개운하지 않은 기분을 느낀 건 사실 나 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에 남편도 똑같은 말을 했다. 어쩐지 너무 가기 싫었다고...교회를 다녀와 주일 오후까지 집에서 미적대다 결국 몸을 일으켜 스케이트장을 예약하고 출발했다.
막상 도착하니 생각보다 그리 춥지 않았다. 옷도 여려 겹 껴입었고, 역시 집에 있는 것 보단 밖의 바람을 쐬니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결정적으로 아이스링크장 한 가운데 있던 저 큰 트리를 보는 순간...아까 느꼈던 찜찜함은 온데 간데 없이 갑자기 즐거워졌다. 하얀 빙판 가운데 크고 반짝이던 저 트리는 정말 너무 예뻤다. 이제 정말 12월이구나...하는 설레임이 훅 들어왔다. 게다가 쇼핑몰 측에서 인공 눈까지 뿌려줘 겨울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ㅋㅋ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도 아닌데 왜 그렇게 트리와 눈에 흥분했던 걸까... 끝까지 스케이트를 타는 걸 찜찜해했던 남편은 밖에서 사진을 찍어주기로 하고 뭔가 홀린것처럼 텐션이 극도로 업된 상태의 내가 아이를 데리고 스케이트장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정비중인 링크장을 바라보며 아이도 모처럼 설레고 기분이 좋다고 했다. 한국과는 달리 스케이트를 잘 타지 못하는 아이들이 잡고 탈 수 있는 보조기구가 있어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 했다.
링크로 들어간 후 펭귄 모양의 보조기구를 잡고도 생각보다 아들은 앞으로 잘 나아가지 못했고 발을 좀 더 뻗어보라며 발 모양을 알려주면서 내가 먼저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는데 순간 예전에 한국에서 타는 것과 달리 얼음이 좀 더 미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빙판에 넘어지고 말았다.
12월 4일의 일이니, 거의 두달이 다 되어가는 일인데도 글을 쓰며 그날의 일을 생각하니 다시 몸서리가 쳐지고 식은땀이 난다. 이게 바로 PTSD인가 ㅠ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힘든 그날의 기억.. 넘어지면서 손을 먼저 얼음판에 대었는데, 체중이 실려서 넘어진 탓인지 손목이 댕강 부러졌고, 여러 과정을 거치고 시간이 지나 지금은 깁스를 풀고 손에 힘이 돌아와 자판을 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감행했던 그날의 외출은 내 삶과 우리 가족의 일상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ㅋㅋ 한국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타국에서 겪으면서 그 시간동안 때로는 마음이 낙심되었고, 고작 오른팔만 못 쓸 뿐이었는데도 몸이 고됬다. 별거 아닌 말들에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돌아보면 그 시간동안 분명 얻은 것들이 많다. 본의 아니게 그동안 말로만 듣던 영국 NHS 시스템을 깊이 경험하게 된 것, 우리 몸의 모든 부위가 사실은 정교하게 연합해 일해왔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에 감사하게 된 것, 어떤 상황이든지 늘 동일하게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또 한번 발견한 것 모두가 감사의 제목이다. (근데 다시 또 하라면 못할 것 같아...ㅋㅋㅋ)
올 겨울 내 부상때문에 주위에 스케이트를 타러 가려던 몇몇 지인들이 예약을 취소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한참을 웃다가 그래 이것도 나름 선한 영향력이라며 혼잣말로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남은 날들은 차분하게 침착하게... 조용하게 잘 지내다 돌아갈 수 있기를...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