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의 "그 도시" 피렌체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탈리아의 '피렌체' 가 갖고 있는 인기지분의 팔할은 "냉정과 열정사이" 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여러 예술가를 후원했던 메디치 가의 흔적을 찾으려고 혹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예술 작품 - 이를테면 우피치 미술관이나 진품 다비드상이 있는 아카데미아 박물관 등 - 을 보기위해, 그 외 기타 등등의 이유로 피렌체에 오는 분들도 분명 계시겠지만 말이다. '피렌체' 의 핵심명소인 두오모 성당도 사실 이탈리아에서는 대성당 그 자체를 의미하지만, 피렌체 대성당만의 이름처럼 여겨지는 이유도 아오이와 준세이가 여길 올라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피렌체' 는 내게도 '냉정과 열정사이' 그 자체인 도시다. 고1때 냉정과 열정사이 소설을 읽은 후 줄곧 피렌체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이듬해 한국에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하며 '피렌체 타령'은 정점에 달했다. 영화 속 그곳은 책을 읽으며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 그 자체였다. 대학생이 되면...졸업하고 나면...취업하고 나면.. 가야지가야지만 되뇌이다 어느덧 세월은 20년이 지나버렸다.
작년 '로마'를 첫 시작으로 연휴때마다 틈틈히 주변 유럽국가들을 여행한 덕분에 올해는 여행지를 정하는 데 있어 전에 없던 여유가 생겼다. '유럽' 하면 누구나 다 가는 핵심적인 국가들을 돌았으니, 이젠 피렌체에 가도 될 것 같았달까...?(물론 피렌체도 남들이 많이 가는 도시이긴 함 ㅋㅋ) 설레이는 마음으로 몇달전에 피렌체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을때도, 드디어 4월이 되어 출발 전날 밤이 될때까지도 20년 전 가고 싶어했던 그 '피렌체' 에 진짜 간다는 것이 도통 실감나지 않았다.
피렌체로 가는 사람들은 다른 주요 수도로 가는 사람들보단 훨씬 적었고, 그래서 비행기도 여태까지 탔던 것 중 가장 작은 비행기를 탑승했다. 내려보니 피렌체 공항도 정말 작았다. 과장 좀 더 보태 한국의 고속버스 터미널 같은 느낌 ㅋㅋ 그러나 그마저도 내겐 감성충만! 드디어 피렌체에 온 것이다.
에펠탑에 올라가면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사진에 보이는 저 두오모 돔을 보려면 옆에 있는 '조토의 종탑' 에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만 영화 속 준세이와 아오이가 두오모 쿠폴라를 올라갔기에... 단순한 우리는 두오모 쿠폴라에 오르기로 결정하고 예약했다. 쿠폴라는 명성답게 예약이 금세 차버려서 두달 전에 예약을 했는데도 내가 원하는 일몰 시간은 놓쳤고, 오후 1시대로 겨우 예약할 수 있었다.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가파른 높이를 자랑하던 약 462개의 계단을 15분 정도 오르자 드디어 피렌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쿠폴라 꼭대기가 나왔다. 올라가자마자 보였던 돔들, 감성을 자극하는 저 갈색풍의 지붕들이 정말 인상적이었는데...지금 다시보니 역시 사진이 주는 느낌은 직접 보는 것만 못하다.
462개의 계단을 오른 후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냉정과 열정사이 ost를 들으며 철조망에 기대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보자니 이제서야 피렌체에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서있는데 열일곱 그때가 떠오르며 뭔가 뭉클한 마음이 속에서 올라왔다. 용돈으로 샀던 책 두권을 읽고 또 읽으며, 두 주인공의 감정에 푹 빠졌던 그때 순수했던 마음들을 지금 들여다보자니 왠지 쑥쓰럽기도 하고 그립기도 했다. 내가 지금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는다면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읽을까? 지금 처음 읽는다면 그때만큼 이 소설이 좋을까?
뭐든 '그 때' 에만 느낄 수 있는 것과 '그 때' 에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두오모에 올라 마치 새로운 일인것처럼 새삼 깨닫는다.
남편도 냉정과 열정사이 영화를 보았고, 특히 ost를 굉장히 좋아했기에 돔에서 내려와 우리는 함께 피렌체를 걸으며 '냉정과 열정사이'의 흔적들을 찾아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
준세이가 화구를 샀던 골목길 화방은 문이 닫혀 있었지만, 아오이와 준세이가 마주보고 있던 저 안눈치아타 광장은 정말 사진을 찍고보니 스틸컷이랑 똑같았다! 저 TORRONE 좌판만 없었더라도 완전 100% 똑같을텐데....이런 곳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좌판이라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그냥 골목길일 뿐이겠지 ㅋㅋ
우리들의 여행테마는 '냉정과 열정사이' 였지만, 그래도 '우피치 미술관' 도 가고, 마지막 날엔 '산타 크로체 성당' 도 갔다. 요즘 그림 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어서 우피치 미술관도 엄청 기대하고 갔건만, 런던에 이미 너무 퀄리티 좋은 무료 미술관을 많이 돌아다닌 덕분(?)인건지 아님 기대가 너무 컸던 탓 + 전문가가 아닌 내 탓으로 인해 살짝 실망감도 들었다. 그림에 크게 관심없는 분들이라면 굳이 가지않아도.. 피렌체엔 볼 게 너무 많다.
나는 오히려 오디오 가이드도 없고 기념품 샵에 엽서로도 나와있지 않은, 화가이름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 그림이 우피치에서 가장 좋았다. 갈보리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진 이 그림의 제목도 "갈보리" 였는데, 부활절을 하루 앞둔 날이어서 더 마음에 와 닿았는지도... 암튼, 유명한 그림이 아니어서 오히려 더 가까이서 오래 보고 느낄 수 있어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산타 크로체 성당은 피렌체 마무리 여정으로 그만인 곳이었다. 조용하고 관광객도 많지 않아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성당 안에 제법 볼만한 그림들도 있고, 무엇보다 미켈란젤로, 갈릴레이의 묘와 마키아벨리 기념상이 있다. 가기전엔 사실 무덤이 뭐 대수랴 싶었지만, 고향인 피렌체에 묻히길 원했다는 천재 미켈란젤로의 묘 앞에 서 있으니 500여년의 세월의 길이가 온데간데 없이 지금 이 순간 미켈란젤로와 마주하고 있다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500여년 전의 그는 과연 자신이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3박 4일의 기간동안, 나는 그리 넓지 않은 피렌체 골목 골목을 누비며 최대한 거리의 풍경들과 느낌들을 내 눈에, 마음에 담으려고 애썼다. 좁은 골목마다 무심하게, 그러나 존재감을 과시하듯 모습을 드러내던 대성당과 아기자기한 가게들. 그 사이에 풍겨오는 가죽냄새. 맛있는 커피와 음식들까지.. 또 올 수 있을거란 기약이 없는 방문이었기에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랬기에 더 후회없이 보냈던 4일의 시간이었다.
피렌체는 역시, 내 20년 간의 기다림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아름다운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