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우리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면서 입 밖으로는 "저는 애를 안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내 마음속에는 어떠한 것들이 맺혀있기에 그런 식의 표현을 하고 있을까?
내 꿈, 커리어가 지상 최대 목표였는데, 그것을 또 한 번 희생하면서까지 아들을 위해 동생을 만들어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나인데 말이다. 그 해답의 힌트를 발견한다면 한결 자유로워질까?
어제는, <아들러심리센터>에서 열린 두 번째 아스날(아들러 스터디의 날)에 참석했다. 한 코치님의 단톡 방 초대로 눈팅만 하던 곳이었는데 주제가 너무 흥미로워서 어색함을 뒤로하고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했다.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성격이 형성되고, 각 출생 순서마다 고충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연년생 남매로 남동생처럼 경쟁관계로 자랐다. 내 기억 속 10살 전후까지는 약해서 오빠가 때리면 울고 그랬는데 한 4학년 즈음부터 힘이 생겼는지 오빠가 10대 때리고 1대 때리며 나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렇게 자라다 20대가 지나 오빠는 군대도 가고 하느라 먼저 인생 과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특히 엄마) 나를 [듬직한 차남]으로 생각했다. 나는 서열상으로는 둘째이자 막내인데 어쩌다 보니 대학시절부터 자취로 타지로 간 오빠를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그런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 것처럼, 30대 결혼 후 퇴행이 와서 엄마가 특히 걱정을 많이 한다. 나이 먹어서라도 나도 걱정근심 받고싶은 자녀라는걸 보여주고 싶은걸까. 내 자녀가 있고 부모님이 노화되고 있는 시점에도 나는 내 아들의 동갑처럼 관심과 염려와 사랑을 바라고 있다. (현재도 ing)
요즘 돌이켜보니 한 살 터울의 친오빠도 빡센 여동생 상대하느라 나름의 고충이 있었겠다 싶다. 부모가 성숙해서 평등하게 자녀를 양육하면 출생 순위에 상관없이 잘 자란다고도 했다.
수업 중 질문 시간이 있어서 나의 상태를 말하고 6세 아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 둘째를 낳는 것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다. 아들인데 아이가 눈물이 많고, 우는 모습이 유독 싫다고 했더니 강사님이 내게 질문을 던져준다.
내 안의 슬픔 직면하기, 내가 왜 우는 게 싫고, 나는 왜 아이가 싫은가(싫다고 표현하는가) 지금은 둘째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내면]을 더 들여다봐야 한다고 한다.
작년에 갭이어 후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알아차렸다 했는데 아직도 갈길이 먼가 보다.
2018년, 퇴직 후 갭이어를 할 때는 내 인생 모토였던 [가성비/생산성/손해 보지 않음/결론 지음으로 상황 종결]등의 패턴으로 퇴직금으로 <내면 아이> 없애기(달래주기)를 하면 바짝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올해 2019년의 깨달음은, 이 내면 아이는 없어지지 않고 평생 동안 달래면서 잘 지내야 한다는 거다. '달래기'가 취약점인 나는 우쭈쭈를 연습해야 한다.
예스냐 노냐, 날 따라올거냐 떠날 거냐, 같이 할 거냐 말 거냐, 아니면 됐다 식으로 살아온 나에게 앞으로 우는 아이들 달래기는 평생의 숙제가 될 것 같다. 내 안의 내면 아이도 달래고, 우리 집에 있는 큰아이, 작은아이도 달래고.(큰아이는 내가 딸이라고 하지만.)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 책을 정말 임팩트 있게 봤는데 책장에서 다시 꺼내 보아야겠다. 몇 년 전과 지금은 눈에 들어오는 포인트가 달라졌는지도 보고 싶다.(신기한 게 똑같은 책인데 마음속에 와 닿는 포인트가 다 다르더라 ㅎㅎ)
출산 이후 미해결 과제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쳐서 허덕이는 중이고 사실 <리워크 스튜디오>를 만든 건 내가 rewalk 하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