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도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타인'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암 그렇지. 그걸 깨닫는 데 좀 오래 걸렸다.
나는 원하는 걸 다 '누려야 하는 대상'이라고 착각했다. 30대 이후 그게 잘 안 되어 괴로웠다.
그간 누려온 것들이 나의 노력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과 배려'가 있었음을 잘 알지 못했다.
#2
오전에 오랜만에 요가를 갔다. 1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선생님 저 진짜 유연했었는데.... 아 그건 20대니까 너무 예전이네요.ㅎㅎㅎ"
누구에게나 '인싸'시절이 있다.(물론 몇 부류들은 '아싸'였다고도 하지만) 근데 그게 너무 오래전 일이라면 문제가 되겠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나 또한 하루하루 소멸되어가고 있다.
조금 느리더라도, 지금의 자리에서 뿌리내려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비록 후회되는 과거의 사건이 있더라도, 아쉬운 결정들이 남아있더라도, 이루지 못한 꿈들이 있을지라도.
그런 면에서 나는 여전히 '융통성'이 없다. '명확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말이다.
#3
폭발할 것 같은 그 무언가가 가슴에 남아있다, 예전에는 그 '에너지'를 쓸 곳이 명확했는데(공부, 수능, 대학, 취직 등등) 그 '대상'이 모호해져서 생기는 병 같다. 막 가슴이 미치게 답답한데, 뭔가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 상태. 뭔가 해야 할 게 너무 많은데 뭐부터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