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상황에서 패턴적으로 떠올려진 불쾌한 그 감정의 복구
[투루언니의 육아살림체험기] 아이와 긍정적인 애착을 형성하고, 잊고 있던 소중한 일상을 발견하고, 쉼을 통해 다음 스텝을 그려보기 위한 투루언니의 재충전.
<투루언니의 코칭 퀘스천>
Q)아이와 힘겨루기 중 자주 찾아오는 감정은 어떤 것인가요?
Q)그 감정은 어떤 느낌인가요?
어제 약속한 ‘키즈카페’를 가기 위해 짐을 챙겨 나왔다. 가장 가까운 한남더힐 릴리펏을 가기 위해 아들과 241 버스에 올랐다. 두 번째 타는 241 버스가 신기했던지 아들은 혼잣말을 한다.
아직 장롱면허라 가까운 거리를 몇 번 버스를 탔는데, 오르고 내릴 때 항상 긴장모드다. 내릴 차례가 가까워 져 아들을 먼저 일으켜서 문 쪽으로 나갔다. 누군가 벨을 누르자, 자기가 누르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 겨우 설득시켰다. 혹시라도 다치거나 넘어질까 초긴장 상태인데 버스가 멈춘 뒤 안고 내렸더니 사단이 났다. “내가 내릴 건데 왜 엄마가 내려줬어.” 부터 시작하는 레파토리.
얼굴이 붉어지고, 구석진 곳으로 이동해서 아이와 이야기를 한다.
대화를 했다가 레이저를 쏘았다가 이래저래 어르고 달래 보지만
한치의 양보도 없는 아이와의 팽팽한 기싸움.
여기서 달래고 목적지인 키즈카페를 갈 것인가, 아니면 이제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을 보여줘야 할 나이일 것 같아 오늘은 떼 쓰고 약속을 안 지켜서 키즈카페를 안 간 것이라고 알려줘야 할지 머릿속 갈등이 시작된다. 어줍잖게 본 책이 떠올라, 이렇게 갈 순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이에게 이야기한다.
나: “엄마는 약속을 지키려고 버스 타고 여기 왔는데 아들이 내릴 때 약속 안 지켜서 못 가는 거야.”
아들: “나 키즈카페 가고 싶어요.”
나: “다음주에 다시 올 때 한 번 지켜 볼 거야.”
아들: 나 키즈카페 가고 싶은데…”
버스타기 싫다는 아들의 말에 6정거장 되는 오르막 길을 무작정 걸었다. 한 걸음에 심호흡을 하고, 또 한 걸음에 화를 추슬렀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던 아들은 이내 잊었는지 다시 활기를 찾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다리가 아파서 업어달라 해 중간중간 업고 걸었다.
동네에 거의 도착 해 핫도그와 옥수수가 먹고 싶다는 아들을 설득해 공룡 스티커로 타협했다.(아무리 걸어도 둘 다 안 나와서) 평화의 시간을 위해 아들은 잠시 스티커 놀이를 하고 나는 아이스라떼를 시켜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왜, 나는 그 순간에 아이를 가볍게 달래고 키즈카페를 갈 수도 있었는데, 엄격하게 훈육을 하고 끝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일까. 과연 누구를 위한 약속이었고, 누구를 위한 규칙이었을까.
아이에게 가장 좋은 건 그 순간 원하는 걸 해줘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오냐 오냐 하면 버릇 든다는 어른들이 말처럼, 규칙을 정해 놓고 지키지 않으면 칼같이 안 해야 하는 것일까. 얄팍한 육아지식으로 인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아들의 과한 감정표정과 짜증, ‘내가 이거 할거야’라는 말에 유독 민감한 이유는 뭘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럴 때마다 수치스러운 기분이 드는 걸 뭘까.
내 어디가 건드려 진 걸까.
집으로 돌아와 알라딘에 접속해 책을 검색 후 장바구니에 담아둔다. '못 참는 아이, 욱 하는 부모’, 오늘도 책이 쌓여간다.
'사진설명' - 이탈리아 성베르도 성당에서 바라본 풍경. 시원하게 탁 트 인 저 창문이 닫혀있던 내 마음과 비교됐었다.
힘겹게 유지해온 2년 여의 시간동안, 헛된욕구로 자동반사적으로 알라딘에서 구매한 책들이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기에 기분이 내킬 때마다 보고 싶은 책을 꺼내본다. 이번에 보인 책은 존 브래드쇼가 지은 <수치심의 치유>라는 책이었다. 한 장 한 장 읽는데 그 내용이 지금 내 상황과 너무 오버랩되며 대 부분의 페이지에 노란색 싸인펜과 중요표시 색깔 펜으로 도배가 된다.
그랬다. 아들과의 대치상황에서 욱 하는 이면에 올라온 것은 바로 나의 '수치심'.
수치심에는 건강한 수치심과 해로운 수치심이 있는데 이럴 때 반응하는 것이 바로 '해로운 수치심'인거다. 건강한 수치님은 우리 자신의 '한계'를 알려주고 '실수'할 수 있으며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걸 인식하게 해준다고 한다. 허나, 인간의 유한성을 알려주는 수치심이 자칫 잘못하다가는 '존재'를 수치수럽게 여기는 것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해로운 수치심은 모든 종류의 정신적 질병을 일으키는 데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고 한다.
(절망/소외/자기회의/고독/외로움/편집증과 정신분열증/강박장애/자아분열/완벽주의/뿌리깊은 열등감/자신을 부적당감/경계선 성격장애/악성 나르시시즘 등) 이 해로운 수치심을 극복해 나가는 일이 인생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한다. 이제 '인식' 단계이니 나도 이 험난한 과정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35년 간 나를 힘들게 했던 '감정'이 내면이 인식된 '해로운 수치심'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그저 허탈할 따름이다.
장소와 등장인물, 상황은 다르지만 유사하게 느껴진 그 '감정들',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감정이 육아를 하면서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나 다운 육아'를 하기 위해서는, 이 '해로운 수치심'이
내 안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들여다보고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의 이 '쉼'이 의미가 있다.
'내면화'란 여러 감정 중 특정한 상황에서 감정의 기능이 멈추어서 아예 성격 스타일 자체로 굳어졌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변에 '투덜이','맨날 인상 찌푸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슬픔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이런 경우 그들은 어떤 특정한 감정이 이젠 그 사람의 정체성(성격의 핵심)이 된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미 그들이 화, 슬픔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보는데 소름이 확 돋았다.
그건 바로, 최근 몇 년 동안의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중 나는 '투덜이', (이건 꽤 오래전부터)와 '맨날 인상 찌푸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에 해당 될 것 이다. (6년째 동거중인 남편이 요즘 하는 말이 왜 맨날 인상쓰냐는 피드백이었다. 근데 이건 애 낳은 이후 당신도....ㅎㅎㅎ)
'사진설명'-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발견한 멈춤 표지판.우리 인생에서도 개인의 속도에 따라 멈추고 다시 걸을 여유가 필요하다. 그게 나는 '지금'인거다.
<book_수치심의 치유 中>
-'감정이 닫힌, 수치심이 내재된 부모'는 아이에 감정에 반영해 줄 재간이 없다. 감정을 반영해 주는 사람 없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아이들은 그들을 돌봐주고 그들에게 반영해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살 수 없다.
-부모는 아이들의 모델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수치심이 내재된 부모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들이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아이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고 들어주는 일은 '감정이 성숙'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 자신이 채움을 받지 못한 부모들은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이런 부모 밑에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요구를 표현할 때마다 수치를 당하는데 이는 아이들이 필요한 것들을 부모 역시 가지고 있지 못한 이유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게 되면 나중에 내면은 그들이 필요할 때에 채움 받지 못한 아이가 자리잡고 있어 늘 공허함을 느낀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여기는가는 우리를 돌봐주는 사람들(주로 부모)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린다.
-아이들은 부모가 가지고 있으되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은 면을 표현한다.
-'규칙'은 수치심이 내재된 가족 구성원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역할을 한다. 수치심이 내재된 가정은 사랑과 존중이 아닌 힘으로 해결하려 든다. 아빠는 가족 전체에 소리를 질러 대고 엄마는 아이들에게, 아이들은 그 화풀이를 고양이에게 한다.
-<유기한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신체적으로 돌보지 않는 상황에다 정신적인 개념까지 포함하였다. 이는 자녀에게 부모가 반응을 해주지 않는다든지, 부모가 자기애에 빠진다든지, 아이와 부모가 거짓되며 허황된 관계에 매여 있다든지, 부모가 아이의 의존하려는 욕구가 자라나는 것을 무시한다든지, 아니면 가족 구성원이 가족 안에 벌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려드는 것을 말한다.
-아이는 의지하고 배울만한 대상을 필요로 한다.
-자기중심적은 사고는 아이에게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이들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엄마나 아빠가 보이지 않으며 자기가 싫어서 그런다고 여긴다. 아직 그들이 자신의 경계를 알 만큼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체적 학대>는 성적 학대에 이어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다. 신체적 학대는 중독되기 쉽다.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밖으로는 폭력으로 표출될 수 있다. 아이에게 신체적 학대를 가하는 부모의 특징을 알아보면 그들은 고립되어 있고 자신들에 대한 평가가 낮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전에는 그런식으로 신체적 학대를 당한 사람이다.
폭력은 그 차제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때를 가늠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이루어진다. 신체적 학대는 특히 역기능적인 가족이 만연되어 있다. 실제로 후려치는 것을 포함해 벨트나 막대기로 고문하는 것, 주먹으로 때리거나 빰을 갈기고 쥐어뜯고 질식 직전까지 가게 하거나, 발로 차고 날카로운 것으로 찍거나 때리고는 버려두는 것, 가둬 놓거나 아이의 잘못에 경찰을 부르는 행위, 심지어는 다른 한쪽 부모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목격하거나 형제자매가 당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자연스런 감정'과 교감하지 못하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감정을 다루는 부분에 있어 적합한 본이 되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정이 차단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정서가 마비된 사람이라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도 잘 모르기에 아이들의 정서적인 발달마저 막아버린다. 부모 자신이 만든 규칙을 신성불가침일 정도로 아이에게 적용시키며 아이들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아이의 마음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그들은 감정은 약한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데 이런 가르침이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게 만들며 본인의 감정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만든다. 더욱이 율법적인 종교는 더욱 해로운 교육 방식을 행하게 만든다.
-그리고 아이들은 너무 활기차다고 수치를 당한다. 너무 크게 웃거나 무엇을 원해도 그렇다. 많은 경우 우리를 역기능적으로 만드는 수치심들이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행해진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한다. 전혀 식욕이 돌지 않는데도 말이다. 음식을 다 먹기 전에는 일어설 수 없다. 음식을 다 못 먹어서 혼자 남겨져 다른 사람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듣는 것은 공개적인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틀이 있는 교육을 받아야 하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 그들은 신뢰의 관계가 필요하며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아이들은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며 자신이 남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안정감이 필요하고 충분한 음식과 옷, 집, 그리고 의학적 돌봄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 아이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거나 지혜를 가르쳐 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아....아...아...중요 부분에 밑줄을 치면서도 그간 아들과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미안, 엄마도 이번 생애 '엄마'는 처음이라.....
-'밥 먹을 때는 무조건 앉아서 TV끄고 볼 것'
-'돌아다닌다, 유난하다, 성가시다, 지나치게 활발하다고 타인 앞에서 수치를 준 것'
-'우는 아이에게 달래주다 지쳐, 뚝!!!하고 소리지르며 '울면 지는거야', 약해 빠져가지고 등 표현한 것'
-'맴매'라는 이름으로 너무 통제가 안될 때 발바닥을 효자손으로 때리거나 욱 하는 기분에 등짝 후려치기, 볼 꿀밤 주기, 머리통 쥐어박기, 반성하라고 혼자 생각의 방으로 들어가라고 한 것 등...'
-'나를 필요로 하는 아들의 욕구를 무시하고 나의 욕구와 관심사에 빠져있던 때...수없이 휴대폰을 만지며 아이컨텍 하지 않고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던 때..../항상 '잠깐만..이거 끝나고...''
2004년 방영 돼 화제에 오른 드라마. 모든 사건의 시작은 3월, kbs 월정액권을 끊어서이다. 그 시초는 ‘연애의 발견’ 16부작 이었고, 그 간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몇 가지 추려보니 kbs에서는 소간지와 임수정으로 대박이 났던 ‘미안하다 사랑한다’, ‘공항가는 길’, sbsd 의 ‘달콤한 나의 도시’ 정도였다.
삼일 전에 시작해 16부작을 다 보고 나니 좀비 같이 변해있는 나. 그래 3월 월정액 이후 보지 않으리라….늦은 시간까지 보게 되면 무언가 입이 심심해 먹게 되고, 체중증가와 신체저하의 악순환이 근 3주간 지속되는 걸 보니, 정말 3월까지로 다짐해본다. 1회부터 정주행 하고 마지막회를 보는데, 오글거리는 전형적인 대사들도 많지만, 이유 없이 수시로 눈물이 난 건 왜일까.
드라마는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봐야 하는 법. (남편은 드라마의 스토리가 너무 뻔하다고 어이없어 한다.) ‘엄마’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는 애를 어떻게 키웠어야 하고, 엄마는 나를 어떻게 키웠고 등의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허나, 결코 엄마만큼 키우기도 쉽지 않은 현실을 인지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4년. ‘윤이엄마’처럼 ‘아들~’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다가도 크고 작은 사건에 ‘은채엄마’, ‘현실엄마’로 돌변한다.
내가 먼저 '치유'하고 변해야 '온전한 육아'를 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비슷한 시기에 TV 드라마와 책을 통해 인지한다.
문제는 아들이 아니라 '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