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36일째.

출근하지 않는 일상이 제법 익숙해지고 편안해 진 때.

by 제니

[투루언니의 육아살림생활기] 아이와 긍정적인 애착을 형성하고, 잊고 있던 소중한 일상을 발견하고, 쉼을 통해 다음 스텝을 그려보기 위한 투루언니의 재충전.

<투루언니의 코칭 퀘스천>

Q)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 중 관점 전환 할 만한 것이 있나요?
Q)습관적으로 하는 말 속 나는 어떤 이미지(관점)을 갖고 있나요?
Q)그 말을 '긍정적인 관점'으로 바꿔서 다시 말한다면 어떻게 말 할 수 있나요?



#1 - 일상에서 얻은 지혜


백수가 된 지 어언 한 달이 지났다. 매서운 추위가 가득했던 3월의 쌀쌀한 날씨에 어벙벙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월이다. 꽃샘추위로 종종 추위가 몰려 오지면 벚꽃과 봄 내음 가득한 ‘봄’인건 어쩔 수 없다.

걱정과 달리 아들은 한 달이 지나니 유치원에 매우 잘 적응했다. 특히 3월 3째 주경 친해진 도보친구 H(여자사람친구)와 매일 하원 후 유치원 앞 놀이터에서 20분 내,외를 놀다 간식을 먹으며 집으로 가는 일상이 계속된다.


재미난 게, 애들 놀 때 엄마끼리 수다 떨 수 밖에 없는 구조라 나는 근 3주 사이 H양의 부모와 할머니 등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H의 부모는 맞벌이 금융권 부부, 그 엄마는 나랑 동갑, 주중 월~금 오전은 외할머니가 등원, 월~목 오후 하원은 이모할머니가, 금요일 오후는 친할머니가 하원을 한다. 나는 동시에 3 명의 할머니, 이모할머니와 안면을 트고 이야기를 나눴다.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대상은 '이모 할머니'다. 아이를 잘 돌보시고 긍정적 양육마인드가 배울 점이다. 친 할머니는 키가 크고 젊은 스타일이다. 외 할머니는 인상 좋고 낙천적으로 호탕하시며 이번 주 이모할머니 여행으로 어제 등,하원 때 만나서 이야기를 좀 오래 나눴다. 덕분에 나는 H양의 가족관계뿐만 아니라 외할머니의 가족에 대해서도 언뜻 알게 됐다.


9시~9시20분이 등원시간인데, 역시나 아침밥 속도가 느린 아들을 먹이고, 양치 시키고, 옷 입혀서 유치원에 가면 9시 20분~30분이다. 어려서부터 지각을 습관화 하는 것 같아 목소리 톤은 높아지고 나 또한 예민해진다. 오늘도 겨우 밥을 먹고 9시 30분에 등원을 시키는데 H의 외할머니를 만나게 됐다. 같이 내려오는 길에 밥 안 먹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전 할머니 아들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 : "저나 아들 아빠가 키가 큰 편이 아니라서 먹는 게 더 신경이 쓰여요."

[H 외할머니] :
"내 힘으로 안 될 건 포기하는 게 나아요.”

“우리 아들도 키가 작은데 신경 안 쓰고 스트레스 안 줬어요. 고등학교 때 약국에 가서 키를 재는데 165cm인 거예요. 약사가 깜짝 놀랐는데 나는 신경도 안 썼어요. 원래부터 밥을 잘 안 먹는 걸 어쩌겠수. 안 먹는 것도 타고 난 거라. 근데 작아도 야무지고 자기가 놀다가 군대 갔다 와서 뭐 먹고 살까 고민하다 취직도 잘 하고 결혼도 잘 해서 잘 살고 있어요.

보니까 우리 아빠가 작은 거라. 종자는 못 속인다니까. 우리 손주도 작아서 며느리가 엄청 열심히 먹이는데 속으로 “걔도 안 클 거다 종자가 작아서” 라고 한다니까."



그러고 보니 아들에게 은근, 아니 대놓고 획일화된 주입식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또래보다 작아서 '괴롭힘' 당하거나 '상처' 받을까 걱정이 됐다. 남자는 특히 키가 작은 게 안 좋은 것이라는 나의 '무의식적 편견'이 이미 작용해 끼니 때마다 아들에게 습관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이다.



“키 작으면 안돼, 밥 다 안 먹으면 버린다, 치운다.”
“엉덩이 붙이고 밥 먹어라. 움직이지 말고 먹어라.”


미술을 같이 할 때, 색칠공부 할 때고 내가 자주 하는 말이 “oo야 꼼꼼하게 칠해야지”,

아들도 종종 나에게 “엄마 꼼꼼하게 칠해야 맞죠?”라고 되묻는다. 어떤 그림은 여백의 미, 추상성이 필요할 때도 있을텐데 말이다.



이미 내가 주입한 내용들이 아들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정답지’로 자리잡을 텐데, 오늘 H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아뿔싸’ 하게 됐다. 이래라 저래라 주입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우리 아들' 그 자체로 바꾸려고 하지 말자.


▷사진설명: 아들과 산책하며 아파트 놀이터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봤다. 청명한 하늘, 탁 트이는 시원함.



#2 - 체급 전


운동에서 체급이 중요한 것처럼 내 체급을 아는 게 중요하다. 복싱에서 50kg 체급이 80kg랑 붙으려고 하면 KO패하기 쉽다. 체급이 맞지도 않는다. 성공하는 일을 하기 위해선 체급 분석이 필요하다.


이번에 자발적 백수가 되면서 아들 등,하원을 온전히 맡고 있는데 아들의 유치원 여사친인 H의 엄마는(본 적도 없다) 월~금 양가 어르신 세 분의 도움으로 일을 하고 있다.


지난 2년여는 친정 수원에서 도움을 받았지만 출퇴근이 너무 멀어 이곳에 왔지만 시댁에서는 도움을 못 준다고 이야기하고 도우미를 쓰기에는 리스크가 컸다.(아들 적응 비용 등) 매우 부럽지만 그렇다고 내가 H의 엄마가 될 수는 없다. 처음에는 괜한 시기 질투도 했다. 퇴근 후 피곤에 찌든 남편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왜 시댁은 손주를 못 봐준다고 하냐…등등)


능력이나 다른 상황적 요소는 고려하지 않은 채, ‘일 하고 싶은 의지가 있고 육아에 도움을 주는 손길이 많음’을 그저 부러워하고 있던 것이다. ‘엄친아’는 다 필요 없다. 이 시기가 되고 보니 육아를 위해 양가 어머님, 아버님들의 손이 최고인 것이다.


인생은 짧다. 내 체급을 분석해서 난 잠시 가정으로 돌아와야 했다. 50kg인데 자꾸 80kg을 비교대상으로 삼고 일희일비했다. 반성한다. 내 것이 아닌데 탐내고 질투한 것을. 주제파악 못 하고 내 체급을 인정하지 않은 것을. 이제 내 체급에 맞게 계획을 세워야 한다.




▷사진설명: 곳곳마다 벚꽃이 가득하다. 그냥 보기만해도 예쁘다.



#3 - 오늘도 사랑해


자코메티에게 받은 감동은 잠시 접어두고 2시50분 하원을 맞추기 위해 다시 신데렐라가 된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점심을 거르고 모래놀이, 물 티슈, 간식거리를 챙겨서 유치원으로 간다.
엄마를 보자마자 “나 H랑 놀이터에서 볼 거예요.” 라고 말하며 뛰쳐나가는 아들을 보며 담임 선생님은 애처로운 눈빛을 보낸다.


괜찮다. 어차피 남 줄 녀석인걸, 잘 키워서 자기와 비슷한 좋은 성품의 짝을 만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강풍이 몰아쳐도, 아이들은 해맑다. 마스크가 벗겨 저도 깔깔깔, 개미를 봐도 깔깔깔, 서로 같은 걸 하겠다고 잠시 다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깔깔깔.


그런 동심을 꾸준히 보고 있자니 나 또한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간 쌓였던 분노, 절망, 시기, 미움, 원망, 부정적 사고, 감정의 바닥과 쓰레기들을 꼭꼭 담아 둔 마음이 조금씩 열린다. 이런 게 아이들의 힘인가?


▷사진설명: 집으로 오는 길은 짧은데 참으로 오래 걸린다. 땅 속 개미도 한 번 봐야하고, 나뭇잎도 따야 하고, 신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뜀박질도 해야 한다. 너란 녀석, 참 바쁘구나 ㅎㅎ



헐레벌떡 버스에 올라 좀비처럼 자고 일어나 사무실에 앉아, 점심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만 보던 나의 시선이 바뀌었다. 여기, 저기, 위, 아래. 최근 10년 간 일상에서 이렇게 봄을 가까이에 느끼는 건 처음이다. 아파트 단지 내 꽃들이 피는 걸 보고 계절을 직감한다. 목련 꽃, 벚꽃, 봉우리에서 활짝 피는 모습들을 보자니 하루하루가 새롭다.


출퇴근을 하던 패턴에서 나름 질서가 잡힌 새로운 패턴이 나온다. [기상-아침준비-청소or운동-자유시간-하원-놀이터 놀기-빵집 가서 빵 사고 영상 잠시 보여주기-산책-놀다가 저녁 먹기-씻기고 책 보여주기-재우기] 그 안에서 나름 자투리 시간을 좀 더 멋지게 사용하려고 애쓰고 있다. 방해물은 다 하나 ‘게으름’. 일단 대충 옷을 입고라고 밖으로 나가자. 그러면 ok다.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이 쌓여간다. 억지와 부담의 마음에서 이제 조금씩 즐기게 됐다. 아들이 점점 교감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신뢰의 속도도 빨라진다. 이것이 일상이구나. 내가 모르고 지내던 그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상.


한 달이 이렇게 지나갔다. 자주 가는 단골 카페에서 아이스라떼 한 잔 하며 발견한 잡지의 주옥 같은 글귀가 내 마음을 위로한다. 오직 고요, 지금은 그러한 때.


▷사진설명: ARTRAVEL TRIP26권에 소개된 글귀. 이 잡지 취향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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