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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53일째.

나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게 하는 ‘육아’,그럼으로 성장할 수 있는 '보석

by 제니

[투루언니의 육아살림생활기] 아이와 긍정적인 애착을 형성하고, 잊고 있던 소중한 일상을 발견하고, 쉼을 통해 다음 스텝을 그려보기 위한 투루언니의 재충전.


<투루언니의 코칭 퀘스천>

Q) 스스로에 '어떤 편견'을 갖고 있나요?
Q) 그 편견은 '내'가 만든 것인가요, '타인'이 부여해 준 것인가요?
Q) 자신에 대한 '편견'중 한 가지를 직접 실행해본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1 – 꽃의 피고 지는 것을 눈으로 본다


일상을 가장 빨리 느낄 수 있는 건 ‘’이다. 매일 등, 하원 하는 그 길에서 꽃의 모습도 서서히 변해간다. 꽃이 활짝 피었다 어느 순간 지기 시작한다. 하얗고 풍성함을 자랑하던 목련이 특히나 그러하다. 꽃은 벚꽃축제에서나 본다고 생각해왔는데 매일이 즐거운 꽃밭이다.


▷사진설명_아들을 데려다 주고 오가는 그 길의 꽃 모양이 조금씩 변한다. 활짝 폈다 어느 순간 조금씩 잎이 떨어진다.



#2 – 나에 대한 편견이 무너지는 새로운 시간


나에 대해 비교적 잘 안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림’은 나와는 너무 먼, 나는 미술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기억은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 살 터울의 오빠가 내가 그리는 사람 그림을 보고 우스갯고리로 “네 그림은 발전이 없으니 그만 그려라.” 라고 한 말에 나는 '그림'과는 관련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편견을 만들었다.


허나, 요즘 나를 닮은 아들녀석의 고집이 나를 움직인다. 미술 놀이를 같이 하자고 하는 아들은 이것 저것 그려달라 아우성이다. 매우 난감하지만, 처음으로 다람쥐와 올빼미를 그렸다.


아들은 엄마 너무 잘 그렸다고 한다. 아들 덕분에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변화다. 내 스스로는 60평생 한번도 안 그려봤을 ‘다람쥐와 올빼미’를 그리고 나니, 미술수업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아,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 만든 울타리와 편견 속 시도하지 못하고 꽃피지 못한 채 꺾이는 건가.


그래서 조금 비틀어 낯설게 나를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백지에 새로 그림 그리듯 그 동안 내가 알던 나가 아니라 새롭게, 다시 한 번 거꾸로도 보고 고개 돌려도 보고 그렇게.


▷사진설명_아들의 요청으로 그린 동물 그림.(매우 허접하다 ㅎㅎ)



#3 –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는 열린다는데


회사 생활 중 인간관계가 안 좋았을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며 식이요법을 했는데 5kg정도 감량하며 자신감을 얻었다. 그 후 회사에서 마음 맞는 벗을 사귀어 주1회 치맥을 하니, 요요와 도로아미타불 다시 살찐 몸이 되었다. 뭐든 하나씩은 장점이 있구나 .


회사를 다닐 때면 분주하고 극심한 스트레스가 있으나 통장에 입금이 되고, 집에 있으니 전보다는 여유가 있지만 점점 줄어드는 잔고,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버리는 시간, 아이의 만족감이 커질수록 반비례하게 나의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공존한다.


인생은 그래서 공짜가 없나 보다. 이 ‘불안감’은 자극이 없을 때는 덜하나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마음 속에서부터 슬금슬금 기어온다.


남편은 대학원 시험기간이 이번 주라 퇴근하고도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잔다. 그 모습이 대견하고 짠하면서도 한편으론, 저렇게 투자(시간과 노력을 들임)를 하면 힘들지만 ‘학위’라는 결과물이 남을 텐데,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파고든다.


안다,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 집에 와서 편하게 놀고 먹고 자고 싶은 마음을. 허나, 일상이 참으로 반복되는 할 일들 속에 파묻혀 있는 나를 보자니 ‘학위’라도 남는 그 노력이 새삼 부럽다.


여러 조직을 거쳐보니 사회생활이 어렵기도 참 어렵지만 그만큼의 보상도 어느 부분 공존한다. 싫은 사람도 있지만 마음 맞는 사람도 있고, 극심한 스트레스 속 잠시 마시는 커피 한 잔. 더럽고 치사하나 일단 ‘어떤 무리’안에 있다는 ‘소속감’과 ‘안도감’도 있다. 하기 싫은 일들도 많지만 '성취감'도 있고 개인으로 있을 때보다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비리비리 어리버리 신입 시절이 있더라도 군대처럼 시간, 경력이 흐를수록 일도 수월해지고 권한도 늘어간다. 일을 분배하거나 목소리를 낼 자리도 커진다.


허나, 가정에서는 한 두어 달 있었는데도 난감하다. 오직 나의 클라이언트이자 상대자는 한 명(아들)뿐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요구사항은 다이나믹하게 바뀌어간다. 권한이 늘기보단, 할 일의 리스트가 늘어가고 투자한 것에 대한 보상은 너무 심플하다. 아이는 자연법칙으로 큰다. 다만 어떤 재료를 줬는가에 따라 다르게 자라는 것이다. 안 먹이면 마르고 작겠지만 크긴 큰다.


그래, 이론서 등에서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 그저 좋아요.”라고 말하는 엄마들은 누구일까.


나의 모성이 잘못 된 것일까.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수시로 찾아오는 ‘불안감’을 마주한다.


가끔씩 찾아오는 불안감이 우울감으로 표정이 변하면 남편은 물어본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안 좋네?”

절대 티 내지 말고 나이스 하게 프로답게 하자고 마음먹지만 감정은 숨기기가 어렵다.


이 시간은 내면의 밑바닥까지 마주하는 쓰라린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런만큰 '성장'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그렇게 믿으련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中>

나는 분만기가 닥쳐올수록 이러한 생각이 났다. ‘내가 ‘모’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러나 있기에 자식이 생기는 것이지.’하며 아무리 이리저리 있을 듯한 것을 끌어 보니 생리상 구조의 자격 외에는 겸사가 아니라 정신상으로는 아무 자격이 없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품이 조급하여 조금 조금씩 자라 가는 것을 기다릴 수 없을 듯도 싶고, 과민한 신경이 늘 고독한 것을 찾기 때문에 무시로 빽빽 우는 소리를 참을 만한 인내성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무지몰각하니 무엇으로 그 아이에게 숨어 있는 천분과 재능을 틀림없이 열어 인도할 수 있으며, 또 만일 먹여 주는 남편에게 불행이 있다 하면 나와 두 몸의 생명을 어찌 보존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의 그림은 점점 불충실해지고 독서는 시간을 얻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 자신을 교양하여 사람답고 여성답게, 그리고 개성적으로 살 만한 내용을 준비하려면 썩 침착한 사색과 공부와 실행을 위한 허다한 시간이 필요하겠다. 그러나 자식이 생기고 보면 그러한 여유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내게는 군일 같았고, 내 개인적 발전상에는 큰 방해물이 생긴 것 같았다.

이해와 자유의 행복된 생활을 두 사람 사이에 하게 되고, 다시 얻을 수 없는 사랑의 창조요 구체화요 해답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행복과 환락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어찌나 슬펐는지 모른다.
-1921년 5월 8일



#4 – ‘너랑 똑 닮은 자식 한 번 낳아봐라’


코웃음을 쳤다. 나 닮은 자식이라면 정말 기특하다고 업고 다닐 것이라 여겼다. 허나 그 기대는 아이를 낳은 뒤 와르르 무너졌다. 특히나, 자아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5세가 된 이후 너털웃음을 질 때가 많다.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었다니,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흔히 말 하는데, 가끔 정말 그런가 생각하게 된다. 아이의 '자기중심성'을 목격할 때마다 거울을 마주하듯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간혹 어릴 때 연년생 남매를 키우느라 지친 엄마가 아빠와 심하게 싸우고 나면 누워 있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결혼했는데 연년생 남매를 키우는 게 쉽지 않았을 거다. 어렸을 땐 엄마랑 나랑 오빠랑 짜장면을 시켜놓고 셋이서 울었다고도 한다. 그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유치원 하원 길,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아들이 놀이터 가겠다고 뛰쳐나갔다. 워낙 빛의 속도로 빠르게 나갔는데 하마터면 유치원 차에 치일 뻔 했다. 모두가 놀라서 당황하고 있는데 아들은 “사고 안 났으니 괜찮아요~.” 하며 가방까지 집어 던지고 놀러 간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집에 와서 참았던 게 폭발했다. 혼자 먼저 뛰어가고 하면 사고 나는데 어쩌려고 그랬냐고 물어도 소용없다. 작은 소리로 말하던 나는 끝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아이를 혼냈다. 그리곤 눈물이 났다.

큰 사고가 날까 걱정되는 마음과, 감정의 활화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내 모습을 직면하는 게 너무 슬퍼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나를 보고 아들도 울었다.


“엄마, 가지 마요.” 하고 서로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설정 값을 바꿔야겠다.

늘 좋고, 행복하고, 유쾌한 날만 있는 게 아니라,

사건사고 없이 무탈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엄마가 많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자립을 하자고 다짐했건만 나는 엄마에게 카카오톡으로 SOS를 청했다. 수원에서 일을 하는 엄마는 딸의 다급한 호출로 대충 정리하고 먼 길을 나섰다.


너무나도 답답하고 절박한 상황에, 도움 청할 곳이 아무도 없어 막막하고 눈물 나던 그때, 엄마는 손 내밀어준 은인이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나도 주체할 수 없는 그런 순간에 누군가 날 위해 먼 곳을 달려와 준다는 사실이, 이사 후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이 지내고 있는 나에겐 한 줄기 빛과 희망이었다.


엄마는 운전을 못 하기에 수원에서 사당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전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한다. 도착 연락을 받은 시간은 저녁 6시가 조금 넘어서다. 2시간 내외로 걸려서 도착한 엄마를 보니 미안하면서 반갑다. ‘친정엄마’라는 단어 그 자체로 마음이 든든한 순간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감사할 게 많다. 의식하지 못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 중 당연한 게 없다. 엄마한테 잘 해야겠다. 옆에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같은 '여자'로서 엄마를 이해하며 나 또한 '엄마'가 되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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