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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Han Dec 23. 2019

Current War /커런트 워 ,에디슨 vs.테슬라

알폰소 고매즈 -레존 감독 

https://www.youtube.com/watch?v=qAcON2zivwU


[커런트 워 ] 영화 Current War 는 근대사 뛰어난 천재 에디슨과 vs 현재의 전기 자동차의 대세 테슬라의 이름 그대로 그들의 저존심 걸린 한판 대결이다.  웨스팅 하우스와 다영향 국책 연구 기관도 참여 하게된 당시로는 매우 중차대한 전기 선로 전송 방식에 있어서 , 직류 혹은 교류를 사용 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미래세대및 막대한 전력 자원이 요구되는 공장과 기관차 , 증기기관등에 의해 움직이는 혹은발전 하는 수력 발전소 조차도 발전된 전역을 안전하게 멀리 송출 할 수 있는 선로 계획과 실험이 당시에도 필요한 초기의 일이다. 


연기파 베네딕트 컴버비티의 에디슨 연기는 초창기 전기회로 개발및 전구 개발에 몰두해온 에디슨의 집념과 성과를 잘 보여 준다. 그는 자존심 강하고 무엇이든 정치력을 밣휘하여 군중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엇다. 하지만 근원적인 전력 구동에 있어서 효과와 효율을 대비하여 빠르게 산업회되는 미국과 , 대륙 횡단 열차를 운행 가능하게 하는 선로 시스템에 공급 하여야 하는 전기 선로 또한 직류 만으로는 해결 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이를 교류 전기자를 개발 하여 교류 선로를 주장하는 니콜라스 홀트 ( 니콜라 테슬라)의 출연으로 에디슨은 그의 연구 성과를 과소 평가 하나 결국 그의 선지적인 설계안이 실제 체택되어 웨스팅 하우스에서는 이를 직접 시연하고 이어서 수력 발전이 가능한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회전차를 발전 시켜 교류 선로를 이용 장거리에 이르는 도시간 전등을 밝히는 일에 크게 조력 하였다 하지만 개인적인 부는 오히려 에디슨이 많았고 니콜라 테슬라는 연구저적 수준에서 자신만의 생활고 조차도 해결 하지 못한체로 생을 마감 한다. 


사무엘 인셜역의 톰 홀랜드나  조지 웨스팅역의 마이클 새넌등의 균형잡힌 연기력과 대사도 같이 보면 좋을 영화이지만 , 미국 근대사 투자자로의 선견적인 뛰어남과 남다른 입지를 가지고 있던 JP 모건의 투자 전력을 눈여겨 보는 것 또한 영화를 보는 재미이다. 매쿠맥퍼틴으로 조연으로 출현한 그이지만 JP모건의 향방이 나타나는 면모는 두드러 진다. 


또한 닥터 스트레인지로도 유명해진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영국 유명 탐정 소설 셜록의 드라마로도 호평 받은 바 있다 그의 집착력 있는 연기 또한 실제 에디슨의 집중력을 보는듯 하다. 1000여개가 넘는 발명 특헐을 가진 그의 회사의 위치는 미국 그자체이다 거기에 도전장을 내민 이름없는 이민자의 청년 니콜라 테슬라의 일대기와 그의 교류 발전이론에 승리한 현제의 산업 시스템은 교류 발전 전송 선로이다 다만 건전지 직류 만을 빼놀고 말이다.  


참고로 테슬라 전기차는 베터리로 기동 하는 차저 이기 때문에 4세데 축전지를 사용한다고 한다. 


니콜라 테슬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스트리아 제국(현재의 크로아티아)의 크로아티아 군대 변경 지대(Croatian Military Frontier)의 스밀랸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계 오스트리아인인 테슬라는 태어날 때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후에 미국의 시민이 되었다. 라디오를 통한 무선 통신을 1894년 최초로 실현시켜 특허청에 1897년 10월 2일 출원, 1900년 3월 5일 승인 되어 무선통신의 아버지로 불린다. 또한 전류전쟁의 승리로 인해 테슬라는 미국에서 가장 대단한 전기 공학자 중 하나로 널리 존경을 받았다. 그는 현대 전기 공학을 개척했으며 수많은 그의 발명은 선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테슬라는 1893년 이전에 무선 에너지 통신부터 전력 장치까지 개발했으며, 비록 완성하진 못했지만 그의 와덴클리프 탑 프로젝트에서 대륙을 잇는 무선 통신을 실현시키기를 갈망했다. 


자기장의 국제 단위인 테슬라는 니콜라 테슬라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니콜라 테슬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디슨과 전류전쟁[편집]


에디슨과의 만남[편집]


1884년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미국에서 에디슨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에디슨의 발전소 중 미국 펄가에 있던 발전소는 뉴욕에 있는 수백 개의 부유한 개인 저택과 도시 전체에 퍼져 있던 제분소나 공장, 극장 등에도 전기를 보내고 있었다. 에디슨은 점점 더 많은 전기 조명 설비 요청을 받고 있었는데 직류 전기 장치로 인한 문제로 많은 고장 문의가 들어와 누전, 화재 등의 일을 수습해야만 했다. 


이때 테슬라는 에디슨과 만나게 되었고 그는 고장난 설비를 고치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테슬라는 그 일자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에디슨에게 인정을 받아 자유롭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작업을 하던 테슬라는 에디슨이 만든 원시적인 발전기를 좀 더 효율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발전기를 다시 만들 것을 요구하여 스물 네 개의 발전기를 다시 설계하였고, 자동 조절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발전기 성능을 크게 향상시켰다.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이 프로젝트의 대가로 보너스 5만 달러를 약속했었으나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 금액을 지불하지 않았고, 이것은 테슬라가 회사에 사표를 내는 계기가 되었다. 


기술자로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테슬라는 일단의 투자가들로부터 테슬라에게 회사를 차려주겠다는 제안을 받게 되고 이를 수락하였다. 테슬라는 당시에 사용하고 있던 것보다 더 안전하고, 단순하며, 경제적인 아크등을 개발하여 특허를 내는 등의 일을 하였으나 회사로부터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테슬라는 경제 침체로 1886년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다가 웨스턴 유니온 전신회사의 경영자 A. K. 브라운(A. K. Brown)을 만나게 되어 테슬라의 이름을 딴 또 다른 회사가 세워졌다. 




              1882년 테슬라의 발명품




전류전쟁[편집]


1887년 4월 테슬라 전기회사가 새로이 창립되어 테슬라는 매우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많은 발명품들이 이미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많은 특허를 따낼 수 있었다. 코넬 대학교의 전기공학과를 만드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윌리엄 앤터니(William Anthony)는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바로 지지하기를 시작했다.  


때마침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을 바탕으로 수많은 발전소를 보유하고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의 발명품의 가치를 눈여겨 보게 되었고, 테슬라는 2천 달러의 월급을 받으며 웨스팅하우스의 설비를 자신의 교류 시스템으로 바꾸는 직업을 갖게 된다. 


에디슨은 테슬라가 웨스팅하우스와 교류와 관련된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이때부터 전류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에 위협을 느낀 에디슨은 곧바로 교류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를 담은 자료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에디슨은 교류 전기를 이용해 애완동물들을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죽인 장면들이 포함된 전단지들을 배포하고 웨스팅하우스가 소유하게 된 특허들에 소송을 거는 등 끊임없이 웨스팅하우스의 교류시스템을 비난했다. 이를 지켜보고만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에디슨에 대항하기 위해 교류에 대한 교육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연설, 기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두 회사가 모두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면서 전류전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에디슨은 교류를 막기 위해 알바니에서 전압을 800볼트로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고, 웨스팅하우스는 법에 위반되는 음모를 꾸민 죄목으로 에디슨을 고소했다. 뿐만 아니라 에디슨은 죄수들의 사형에 교류 전기 충격을 사용하자는 주장도 하였으며, 웨스팅하우스는 계속해서 교류의 실상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세는 점점 직류에서 교류로 넘어오기 시작했고 이를 직감한 에디슨의 많은 직원들은 에디슨이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디슨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최종적으로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여 자신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고, 웨스팅하우스는 사업 영역을 확장시켜 끝내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을 이용한 발전소를 세웠다. 이는 1891년 광산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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