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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Han Nov 12. 2021

Andy Warhol ; 앤디 워홀 자화상이 380억

1672 / 시사저널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26922


서울 청담동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앤디 워홀 전시장에 들어서면, 전시공간 정면에 걸린 워홀의 보라색 자화상과 빨간색 자화상 두 점을 만나게 된다. 단색조의 정사각형 캔버스 두 점의 첫인상은, 마릴린 먼로나 마오쩌둥 같은 명사나 캠벨스프 깡통 같은 다국적 상품 브랜드를 현란한 다색 판화로 옮긴 작품처럼 세간에서 곧잘 유통되는 앤디 워홀의 대표 미감과는 다르다. 대형 스케일에 단색조를 따른 점에선 미니멀리즘 미학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특히 이번 전시의 홍보 포스터에 쓰인, 비쭉 솟구친 가방을 쓴 워홀의 자화상은 ‘워홀’ 자체에 집중한 전시임을 도드라지게 한다. 그래선지 전시 제목마저 《앤디를 찾아서》(2021년 10월1일~2022년 2월6일 전시)다. 모조리 초상화만 내놓은 이 전시 출품작 22점 가운데 익명의 복장도착자 초상화 한 점을 뺀 나머지는 전부 앤디 워홀 자화상이다.

애디 워홀은 어떤 작가 인가 .. 



앤드루 워홀라 주니어(영어: Andrew Warhola Jr., 1928년 8월 6일 ~ 1987년 2월 22일)는 앤디 워홀(영어: Andy Warhol )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미국의 미술가이자, 출력물 제작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다. 시각주의 예술 운동의 선구자로, 팝 아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산업 일러스트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에 화가, 아방가르드 영화, 레코드 프로듀서, 작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한 워홀의 그림은 1963년에 제작된 캔버스로 1억 달러에 거래된 《여덟 명의 엘비스》(Eight Elvises)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개인적으로 거래된 이 사실은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이코노미스트는 미술 시장의 주도자로서 워홀의 지위를 설명한 것이다.[1] 1억 달러라는 가격은 잭슨 폴록파블로 피카소구스타프 클림트와 윌렘 드 쿠닝만이 기록한 기준 가격이다.


생전에  워홀은 자화상을 다수 제작했다. 앤디 워홀 사후 20주기를 겸해 2007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 대규모 앤디 워홀 전시 《앤디 워홀 팩토리》의 전시 구성 중에는 독립된 부스가 그의 자화상에만 배당될 정도였고, 그의 자화상만 모은 기획전시는 국외에서도 곧잘 있다. 외모 콤플렉스가 많았던 워홀은 유명 인사가 되길 희망했고, 명사들과의 사교 생활과 친분이 자신의 작품으로 연결돼 나타나곤 했다. 이 전시에도 폴라로이드로 찍은 자화상이 출품되었는데, 그는 1958년부터 사망한 1987년까지 SX-70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소지하고 다니면서 그레이스 존스, 제인 폰다, 잭 니콜슨, 에디 세즈윅, 바스키아 같은 유명 인사나 지인들을 폴라로이드에 담았는데 그 수가 2만 장에 이른다. 당시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촬영 직후 인화된 사진을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으로 치면 디카나 폰카 정도 되겠다. 오늘날 디카·폰카는 친분 과시를 증명하는 수단 아닌가. 앤디 워홀의 창작 과정은 인정 욕구와 유명해지는 수단을 구현시키는 방편이기도 했다. 이름값이 미적 전략이었던 앤디 워홀의 작품은 대중문화가 전 지구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오늘날까지도 작품의 얇은 표면만으로 인지도와 권위를 지키고 있다.

앤디 워홀의 예술세계를 풀이한 해석들을 한번 찾아보라. 흔들릴 수 없는 공식처럼 굳은 문장이 앵무새처럼 여러 화자들의 입으로 반복된다. ‘워홀은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의 위계를 파괴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님은 현실의 여러 지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워홀의 작품 발표 당시 사정이 설령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시점을 알 수 없는 어느 때부터 현재까지 앤디 워홀의 작품은 완고한 고급 예술계의 일원으로 간주된다. 공산품처럼 예술품을 찍어낸다는 취지로 이름 붙인 워홀의 작업공방 팩토리(Factory)에서 제작된 판화가 공산품 가격에 팔리지 않았으며, 그의 관심사가 유명인이 아닌 대중에 이른 적도 없다시피 하다. 앤디 워홀이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그가 활동했던 시대에 너무 난해한 미궁으로 빠져드는 현대미술에 대한 거리감, 명성을 작품과 결합시킨 워홀의 작품 경향이 대중의 속물근성과 전 지구적인 대중문화 전성기와 우연히 만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앤디 워홀 자체를 앞세운 루이비통 소장품 전시의 간판 격인 1986년 자화상을 보자. 가로세로 거의 3m에 육박하는 스케일의 이 회화 작품은 다섯 가지 버전(초록, 파랑, 보라, 노랑, 빨강) 중 보라색 작품인데, 2010년 뉴욕 소더비에서 익명의 응찰자에게 3250만 달러(380억875만원)에 낙찰됐다는 기사가 잡힌다. 아크릴 물감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검정과 보라 투톤으로 앤디 워홀의 얼굴을 큼지막하게 찍은 자화상을 가까이서 아무리 뜯어본들, 멀리서 오랜 시간 뚫어져라 응시한들 이 작품이 왜 380억원대 시장 가치를 갖는지, 세계적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이 소장을 결정했는지 등의 객관적인 사실들과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엔디워홀에 좀더 관심 있는 독자 들은 워홀 박물관을 둘러 보도록 하자 , 실제 티켓팅을 하면 스케줄에 맞춰 

현지 뮤지엄도 관람이 이제는 가능하다.!! 


https://www.warhol.org/read


현대미술은 인지 부조화와의 만남

그게 정상이다. 현대미술과의 만남이란 대개 이 같은 인지 부조화를 겪는 과정과 통하는 것이다. 이때 세 갈래 길이 열린다. 5할은 현대미술은 터무니없다며 상식선에서 선을 긋는 길을 택한다. 4할은 해당 예술가를 향한 기성의 평가를 자성 없이 따라 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자기암시를 주는 길이다. 4할의 감동 작동 방식에 화답해 성공한 사례가 미스터 브레인워시 같은 후대 대중미술가일 텐데, 4할의 수요자와 생산자 간의 상호 피드백이 왜곡된 감동이라는 전염병을 확대 재생산시킨다. 남은 1할은 앤디 워홀의 작품 자체가 대단한 것이 아니며, 앤디 워홀을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가 그를 비평적으로나 시장 가치적으로나 몇 갑절 위대한 것으로 인지하게 만든다는 걸 깨닫게 되는 길이다(혹은 그런 맥락을 깨닫고 감동받는 길이다). 1할의 자각은 앤디 워홀을 평가절하하지 아니하되, 과대평가하지도 않으면서 그의 예술세계를 즐긴다. 1할은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털어놓은 워홀의 고백의 진가를 이해하는 길이다. 


캠펠 수프로도 유명한 그의 페인팅 기풍과  팩토리 기법으로 실크 스크린 인쇄 방식을 택하였던 현대적인 방법으로 이름이 드높던 그는 ,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이렇게 애기 한다. 


[[  워홀의 작품 세계는 대부분 ‘미국의 물질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돈, 달러 기호, 식품, 잡화, 구두, 유명인, 신문 스크랩 등을 그렸다. 그에게 이런 주제들은 미국 문화의 가치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는 언제나 코카콜라다. 대통령이 마시는 코카콜라는 내가 마시는 코카 콜라와 같은 그 콜라다". 그는 대중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이미지를 이용해 20세기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화려한 색채 같은 도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실크 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마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스타의 이미지와 상품, 달러 기호 등 미국 사회에 유포하는 경박한 기호를 작품화했다. 고전 예술과 모더니즘 등과는 달리 그 도안은 풍부한 미국 사회를 구현하는 명쾌한 팝아트, 상업 회화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대중문화’가 가지는 대량소비가 아닌 인류, 진부, 공허함이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편성을 구한 그의 작품은 그 자신이나 대중이 매일 접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매스미디어와도 관련이 있으며, 또한 사고와 죽음의 이미지도 그려졌다.


워홀은 자신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을 없애고 표면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유명한 것에 애정을 숨기지 않고, 스타와 정치인이나 사고, 패션 제품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으며, 그것이 유명하고 또 내 자신도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그 자신이 미국의 유명인이 되고 나서도 걸음을 흩트리지 않고, 유명인을 연출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유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soruce from WIKI , 


팝아트의 선구자격인 그의 이름과 명성은 아직도 이어져 오고 있으며, 현대 미술계의 거장으로 일컬은 그의 예술 주제들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대중적이고 유명한 것을 사랑하는 그의 중독적인 편향 ;  바이어스 덕분에

다수의 작품을 즐기며 관람 할 수 있는 것이 현제 이다..   대중 문화의 경박함과 팝아트예술의 진중함의 중간 어딘가에 그의 편안한 시선이 잠들어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 오늘은 여기 까지 입니다.  Written by  E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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