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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Han Jun 11. 2019

정신 차리기 기술

세라 나이트 

카페                                          

정신 차리기 기술]  인생이 복잡해 지기 시작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중 유력 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정리하지 못하는 습관이나 예전에 해왔던 관성적인 일들에 대한 익숙함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때때로 편하다는 관점으로 많은 불편한 것들을 감내하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특이한 것이 정리하지 못하고 잘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다. 


무슨 일로든 집안에 들여온 것을 내보내기 아까워하거나 어쩌면 한번 더 쓸 일이 있을지 몰라서 약 5년 이상 보관하고 있던 헌 옷 가지들이나 한복 세트를 결혼식 폐백 이후로 약 10년 이상 보관해 오신 분들이 있다면 당장 내일 기부를 하시길 권해 드린다.... 장 올 속의 가치는 1도 없고 만약 타인에게 가서 하루 라도 입어 준다면 감사할 따른 이고 그로 인해 돌아갔던 복이 되돌아온다면 금상첨화 이다... 


이 책 정신 처리기 기술은 맥락은 다르지만 , 주변부 늘 모든 것을 껴안고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의 자화 성을 여과 없이 보여 준다... 일의 순서는 차지하고 ,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환경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 겠다면 좀 더 세부적으로 시행 계획을 짜고 전략적으로 그리고 행동에 돌입하는 것만이 문제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아무런 실행 계획 없이 걱정만 하는 일은  하늘이 비가 오는 날까지 기우제를 지내 겠다는 사고와 같아.... 언젠가는 이뤄질 일이지만 , 효율성은 제로이다.. 


우리가 쉽게 착각하는 일중의 하나와 현상은 인간은 절대 멀티 펑션 하지 않다 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이어폰 들으면서 자판을 두들 기고 소설가가  카페에 않아 글을 쓰면서 옆사람과 얘기하는 것 , 이멜일을 주고받으면서 업무 지시를 내리거나 , 반대로 , 업무 지시를 받으면서 다른 일을 동시에 생각하고 실횅 한다라는 불가능에 가까웁고 선행적인 시간 흐음 속에서 순차적인 신호 전달만을 받은 뇌에서 무의식적으로 동시 다발적이라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한 번에 하나씩 ,,, 먹는 것도 그러하고 , 생각하는 것도 그러하다. 다만 신속한 빠르기와 반응이 사람마다 다를 뿐... 


글은 전체 적으올 4가지 챕터로 이어져 있고 ,, 서론에서 사소한 문제들로 고민하는 사람들과 웬만해선 정리가 안 되는 일들은 순차적으로 풀어 보는 방법 , 그리고 챕터 2에서 비교적 어려운 문제를 잘게 쪼개서 자금과 시간 계획 전햑을 짜는 일.. 챕터 3과 4는 좀 더 강화하는 프로그램으로 근본 거인 인생의 문제들, 내면적인 갈들을 넘어서는 멘토로서의 해결 책을 저자는 제시한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To do 리스트는 안다. 그리고 그중에 좀 더 중요한 할 일 Must to do 도 안다... 하지만 이 둘을 잘 분간하지 않으면 머스트 두 와 투두가 그냥 석여 버려서 우선순위에 지장을 초래하고 처음부터 다시 챗바퀴를 돌려야 한다. 


인생의 순서 또한 그러하다 내 입장에서 분명 To do이었여야 하나 결과적으론  먼저 진행하였어야 할 Must to do 리스트 여사라는 것을 나중에서 알아 버린다.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고  체스나 바둑처럼 되 물리기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방법은 잇다.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전략을 짜는 방법 , 가능 한 빠른 시간 안에 정상적인 범주로 회귀하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 보는 것 ,,, 때때로 일이나 생각이 벅차 오른 다고 느낄 때마다 사물을 단순화해보자.. 그리고 하나하나 퍼즐을 풀듯 도전하고 이뤄내자.. 


인간 관계도 이제는 SNS , 페이스 북에 1000여 평 이상 5000명 이상 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과연 일생에 한 번이라도 아님 단 10초 라도 일별 할 수 있는 관계 일까... 너무 번잡한 관계망은 정리를 하도록 하자 ,, 내 인생 나만의 시간을 기계적인  동작으로 SNS 관리에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 하기엔 저마다의 인생 경로가 너무 짧지 않은가.... 


너무도 복잡하게 일상과 과제가 꼬여 있다면 그림으로 플로 차트를 한번 만들어 보자 ,, 이 책 뒤편에 일러 스트레이트로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차트를 그리다 보면 나 스스로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정지하고 다음번 무엇을 해야 할지가 그림이 그려진다.. 그림을 그리고 머릿속 상상력이 작동하면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고, 계획이 서면 행동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스스로에게 자문에 보자 나의 인생 설계는 과연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맡긴 것일까?  내가 관여한 부분은 과연 몇 % 나  될까 ,,, 지금 부터라도 한번 시작해보면 결코 늦은 적이 없는 시행 하기 바로 전 가장 빠른 날이 오늘일 것이다,... 


그러하게 생각해보고 실천 준비계획을 세워 보는 또한 冊曆去99  였습니다. 


Value Up to 벤자민 프랭클린 -미화 100 달리 지폐 주인공 이다.... 미국인 들이 매일 쓰지만 그에 대해서는 글세 10% 도 잘 모른다가 정답이다...


생애[편집]

                            Franklin, 1825

유년기[편집]


대장장이이자 농부인 토머스 프랭클린과 제인 화이트의 아들이자, 프랭클린의 아버지인 조사 이어 프랭클린은 1657년 12월 23일 영국의 노샘프턴셔주 엑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아비아 폴저는 제분업자이자 교사인 피터 폴저와 전에 계약 하인 (Indentured servant)이었던 메리 모릴의 딸로서 1667년 8월 15일 매사추세츠주 낸터킷에서 태어났다. 폴저의 자손 J.A. 폴저는 19세기에 폴저스 커피를 설립했다. 


조사 이어 프랭클린은 2명의 부인과 함께 17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는 엑튼에서 대략 1677년 그의 첫 번째 부인으로 앤 차일드와 결혼했고 1683년 보스턴에 그녀와 함께 이주했다. 그들은 이주하기 전에 3명의 아이가 있었고 이주 후 4명을 더 갖는다. 그녀의 죽음 후에, 조사이어는 새뮤얼 윌러드의 주례로 올드 사우스 미팅 하우스 (Old South Meeting House)에서 1689년 7월 9일 아비아 폴저와 결혼했다. 그들의 8번째 아이인 벤저민은 조사 이어 프랭클린의 15번째 아이이자 10번째 막내아들이었다. 


1706년 1월 17일에 보스턴에서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집안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10살 때 집안 형편으로 인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형의 인쇄소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열정적인 노력 덕분에 능숙한 인쇄기술을 습득하게 되었고, 또한 글 쓰는 솜씨를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1723년, 그의 나이 17세 때에 프랭클린은 가출하여 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빠른 시간에 인쇄업자로서 성공했고, 1730년에는 24살의 나이로 인쇄소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1732년 프랭클린은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Poor Richards Almanac)이라는 책을 발간해서 대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정치활동[편집]


1731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도서관을 설립하여 도서관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736년에 펜실베이니아의 하원의원으로 임명되어서 1751년부터 1764년까지 국회의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펜실베이니아 시 체신장관 대리로 일하였으며(1737~53), 그 결과로 전 식민지의 체신장관 대리로써, 우편 업무에 관한 사항을 많이 개선시켰다.(1753~74) 


과학[편집]


1748년 그의 사업이 많이 번창함에 따라서, 프랭클린은 과학에 뜻을 두어 사업을 대리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봉급을 받으면서 과학을 탐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740년대 초기에 그가 발명한 난로(프랭클린 스토브)는 아직도 생산되고 있으며, 그 이후에도 아주 많은 실험을 행하였다. 1752년에 그의 유명한 실험인 '연 실험'을 행하였고, 번개가 전기를 방전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번개를 구름에서 끌어내기 위해 금속으로 만든 뾰족탑을 세우자고 제안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과로, 또 프랭클린의 실용적인 면의 재현으로, 그의 피뢰침이 발명되었다. 후에 복초점 렌즈가 발명되는데 이것도 프랭클린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1753년 영국의 로열 소사이어티(Royal Society) 회원으로 선정되었고, 코플리상을 받았다. 그해 전 식민지 체신장관 대리 가 되어 우편제도를 개선하였고 54년 올버니 회의에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참석, 최초의 식민지 연합 안을 제안하였다. 57년 펜실베이니아의 이익을 위하여 교섭을 벌일 목적으로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에 자주 과세권을 획득하고 귀국하였다. 64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의 철폐를 성공시켰다. 75년 귀국하여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뽑혔고 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 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83년 파리조약에는 미국 대표의 일원이 되었다. 


정치적 업적[편집]


정치가로서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자치에 대해 영국의 관리들과 토론을 벌일 때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활약했고,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으며,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의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얻어냈다. 또한 영국과 협상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표로 참석하여 13개 식민지를 하나의 주권 국가로 승인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2세기 동안 미국의 기본법이 된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들었다. 특히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문'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케나디언 록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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