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1807
담장을 사이에 둔 낙원과 지옥 《존 오브 인터레스트》 - 시사저널 (sisajournal.com)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 집에서 다섯 명의 자녀와 함께 사는 부부. 어느 날 남편은 회사의 전출 요구에 따라 다른 도시로 이동하고, 아내와 아이들은 집에 남는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남편은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자신의 일을 지속한다. 주인공과 사건 중심의 일반적 소개 방식을 거치자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런 영화다.
하지만 이는 실체와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는 요약일 뿐이다. 가족의 아름다운 집을 둘러싼 담장 너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400만 명을 학살한 수용소 아우슈비츠다. 그리고 주인공 루돌프(크리스티안 프리에델)는 이곳을 지휘하는 장교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과 처절한 죽음의 사운드.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요소를 단단하게 한데 묶은 러닝타임 내내 관객은 참상의 실상을 아무것도 목격하지 못한다. 하지만 역으로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평범하고 평온한 악의 얼굴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의 비극에 대한 지극히 영화적인 응답. 아직 2024년의 절반이 남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올해의 영화 중 하나로 꼽는 것이 그리 성급한 결정은 아닌 듯하다. 폴란드 최초의 집단 학살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던 곳이다. 초기에는 폴란드 정치범 수용 목적으로 건립됐지만, 1942년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나치의 정책 수립 이후 400만 명이 학살당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슈츠슈타펠(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주요 군사조직)이 관리하던 아우슈비츠 주변 지역을 뜻하는 단어다. 폴란드 인구를 제거한 농경지에서 수용소 수감자를 재교육하고, 농산물 판매로 슈츠슈타펠의 재정적 이득을 쌓기 위해 1941년에 생겼다.
이 지명을 그대로 따와 제목으로 쓴 것은 영화에 앞서 원작의 결정이다. 아우슈비츠 방문 회고록과 소설 등을 꾸준히 남겼던 작가 마틴 에이미스는 2014년 동명의 소설을 썼다. 원작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각색 과정에서 당시 아우슈비츠 지휘관이었던 루돌프 회스와 아내 헤트비히 회스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루돌프 회스는 아우슈비츠에서 사용한 독가스 ‘치클론 B’ 도입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당시 회스는 땀과 오물투성이의 시체들을 남기는 배기가스와는 달리, 깔끔한 뒤처리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치클론 B 사용을 권고했다고 알려졌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루돌프와 헤트비히(산드라 휠러)를 결코 괴물의 얼굴로 그려내지 않는다. 그들은 일과가 끝난 후 가족과 여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중시하며, 자신들이 머무르는 생활공간을 정갈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몰두한다. 은퇴 이후 농사를 짓는 삶을 꿈꾸는 부부의 바람은 평범하다. 다만 이들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일 수 있는 중요한 무언가의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루돌프는 영화 내내 굳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윤리적 딜레마의 결과가 아닌 군인으로서 다듬어진 직업적 태도에 가깝다.
자신이 손수 꾸민 정원의 아름다움에 계속 탄복하고, 수용소에서 나온 쓸 만한 옷이나 화장품 따위를 거리낌 없이 소유하는 헤트비히는 집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을 아예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군다. 실제로 이들 가족에게 담장은 실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공기와 같은 존재다. 철저한 구획의 분리 안에서 이들의 삶은 쾌적하고 안전하며 풍요롭다.
회스 부부의 모습은 독일 출신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1961년 이스라엘 압송 재판을 취재한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실제로 저지른 악행에 비해 너무 평범한 인상의 아이히만을 보고 충격을 받은 아렌트는 이 보고서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다른 저서인 《인간의 조건》에서 “생각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며, 폭정 아래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고 말하기도 했다. 생각이 결여된 삶. 이것이 바로 회스 부부 일상의 정체다.
담장 너머 아우슈비츠 굴뚝에서는 매일같이 사람을 태우는 연기와 재가 치솟는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온 재는 회스 부부의 정원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흙에 무심하게 뒤섞여 버린다. 영화 중반, 아이들과 함께 강가에서 여가를 보내던 루돌프에게 서서히 잿물이 흘러오는 모습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손에 꼽게 인상적인 이미지 중 하나를 남긴다.
수용소에서 내려온 재와 이물질이 섞여 흐르는 물이 몸에 닿자마자 루돌프는 아이들을 데리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온다. 수용소와 집 사이는 긴 담장으로 분리될 수 있지만 강물의 흐름까지는 막아세울 수 없다. 강물이 흘러가듯 시간이 흐른 후, 회스는 역사의 심판으로 단호하게 처벌됐다.
고통을 전시하지 않고서도 역사를 직시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카메라는 종종 중심인물들의 반경에서 벗어난다. 헤트비히를 비추다가 돌연 그 곁을 지나가는 하녀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식이다. 이는 마치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동시다발적인 현재성을 느끼도록 고안된 것이다.
헤트비히가 이웃을 초청해 차를 마시는 테이블 곁으로 하녀의 분주하고 꼼꼼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그 너머의 방에서는 마치 평범한 상품 판매원처럼 보이는 이들이 루돌프에게 ‘사람을 가장 효과적으로 많이 태울 수 있는’ 최신 소각로 디자인을 설명하고 있는 식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이 같은 연출을 위해 주무대인 회스 부부의 집과 정원에 총 10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촬영했다. 각 장면은 배우들이 마치 연극 무대에 오른 것처럼 각자의 동선대로 움직인 결과다.
영화는 단 한 장면에서도 아우슈비츠의 내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러닝타임 내내 목격할 수 있는 것은 회스 부부의 일상이 전부다. 다만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사운드는 내내 관객의 귀에 들러붙는다. 고통스러운 절규와 아이의 울음소리, 군대의 행진, 자동차와 소각로의 소음은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관객 각자의 머릿속에 이미지화한다.
사운드 디자이너 조니 번은 연기자를 통해 고통의 소리를 재연해 녹음하는 대신, 유럽 곳곳의 스포츠 경기장과 취객들이 고함을 지르는 밤의 거리 등에서 사운드를 수집했다. 그중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한 것은 2022년 파리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다. 고통을 결코 전시하지 않지만 정확하게 직시하는 연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 최전선에 있다.
숨이 막히는 압도적 체험이지만 인류애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작품은 아니다. 영화는 중간중간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이 노역을 하는 구간에 밤마다 숨어들어 사과를 숨기는 소녀의 모습을 비춘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어린 시절 폴란드 저항군에서 일했던 여성의 실제 사연을 듣고 만든 장면이다.
극 중 인물들을 차마 조금이라도 근사하게 담을 수 없어 촬영용 조명을 전부 배제한 채 자연광만을 택한 이 영화의 현장에서 야간 촬영이 가능한 기술 도구는 군사용 열화상 카메라가 유일했다. 사실상 궁여지책이었지만 이로 인해 생긴 효과 역시 분명하다. 처음에 소녀는 마치 유령처럼 포착되지만, 반복해 등장할수록 어둠에서 반짝이는 빛의 존재로 보인다.
이는 이 영화가 숨겨둔 작은 희망의 증거다. 이후 소녀는 은밀하게 반출된 악보 하나를 주워 피아노로 연주한다. 실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한 음악가가 작곡한 곡인 《Sunbeams》다.
밤의 계단을 내려가며 끝없는 어둠 속으로 향하는 루돌프의 모습을 비추다가, 돌연 시간을 점프해 현재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의 풍경과 연결하는 라스트 신 역시 쉽사리 잊기 힘든 감흥을 남긴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동일한 선상에서 담아낸 이 영화적 연출은 우리가 역사 안에서 무엇을 남기고 기록할 것인지를 묻는다.
거세한 아름다움만을 남기고 기록할 것인가, 시대의 엄정한 증인이 될 것인가. 구획과 분리를 택할 것인가, 인간성의 연대를 택할 것인가. 분쟁과 참사가 여전히 존재하는 오늘날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던지는 질문은 결코 과거의 것만은 아니다.
역사는 늘 다시 흘러 과거사를 재조명 하지만 각자가 혹은 세대 별로 받아 들이는 기억의 혹은 내밀한 사건의 압박 과 감당 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는 매우 심하게 존재 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유희에 불과한 찰나적인 기억 일지라도 말이다.... 아픔과 상처가 치유 될리 없는 엄정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개개인은 늘상 자신만이 알고 있는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일상의 이별 과 영영 떠나버림 조차도 말이다.. Written by E HAN
#≪존 오브 인터레스트≫#루돌프#헤트비히#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인간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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