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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희 May 01. 2023

목욕탕, 왜 우리나라랑 똑같지?-베이터우 온천 박물관

대만 여행 4일째, 베이터우 '더 가이아 호텔' 프라이빗 룸 온천욕으로 지난 4일간의 피로를 싹 씻어냈다. 점심도 배부르게 먹었더니 에너지 100% 충전상태다. 발걸음 가볍게 '베이터우 온천 박물관'으로 향했다.


<1층은 목욕탕, 2층은 휴게 공간. 2층에 입구가 있다.>


베이터우 온천 박물관의 전신은 '베이터우 공공 욕탕(北投公共浴場)'이다. 일본 통치 시기에 일본인인 타이베이 청장의 명령으로 짓기 시작해 1913년에 완공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목욕탕이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목욕탕이었기에 2차 대전 패망 이후 일본인들이 대만에서 물러나면서 문을 닫게 되었고 결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쳐 폐허가 되었다.

1994년 베이터우 초등학교 교사들이 향토 수업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이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아이들, 시민, 문화 역사 관련 종사자들의 청원에 의해 199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내부를 재정비하여 1998년 '베이터우 온천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비 과정에서 타이베이 시의 지원 외에도 주민들의 모금도 있었다 하니 지금의 모습은 민관 합동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제주도 만장굴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만장굴도 초등학교 교사와 탐험반 학생들이 발견한 동굴이지 않은가.


박물관 안에서 안내를 하는 분들이 모두 노인분들이라 노인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고용한 분들인가 싶었다. 그러다 잠깐 쉬면서 온천 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베이터우 역사, 문화, 예술에 관심 있는 자원 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공지를 발견했다. 이 분들이 모두 자원봉사자였던 것이다. 시민의 노력으로 탄생하고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갑자기 노란 필터가 덧씌워진 듯 더 따뜻하고 아늑해 보였다. 

 


박물관 입구로 들어서자 신발을 벗어 저기 보이는 신발장에 넣으라고 안내한다. 일본 통치시기 '베이터우 공공 욕탕'의 모습 그대로 재현하였다 하더니 입구부터 목욕탕 콘셉트이다. 


"어? 우리나라 목욕탕 신발장이랑 똑같네?"


현재 우리나라 목욕탕에 있는 신발장과 유사하여 고개를 갸우뚱했다. 심지어 옛 모습을 재현한 열쇠도 낯지 않다. 어릴 적에 엄마와 목욕탕 갔을 때는 납작한 열쇠를 사용했었다.


입구가 2층에 있어 2층에 있는 휴게실을 먼저 둘러보았다. 공연장으로도 사용된 듯 무대도 마련된 널찍한 공간에 다다미가 쫙 깔려 있었다. 일본 사람이 일본 사람을 위해 만들었으니 다다미 바닥은 당연하다. 하지만 일제 침략기에 일본인들이 만든 건축물도 사적으로 지정하고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한 대만 사람들의 태도에 잠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람도 잠시 "참, 이게 대만이었지?" 하고 곧 이해했다. 추후에 다시 다루겠지만 이는 친일, 반일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문화도 그들이 받아들이고 지켜야 하는 여러 문화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타이난에 있는 네덜란드 침략기의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수십 년 전 고향이 그리운 일본인들이 1층에 있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후끈 달궈진 몸을 이곳에서 식히며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테라스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목욕, 사교, 정보 교환, 향수를 달래는 공간이었음이 분명하다. 


특별 전시실에서 전시물을 둘러보고 계단을 따라 1층 대욕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본 통치시대의 목욕탕 내부가 현재 우리나라 목욕탕 구조와 상당히 닮았다. 


"우리나라의 목욕탕이 일본의 영향이었어?"



벽에 붙은 거울, 수도꼭지, 바닥에 놓인 대야와 동그란 바가지, 낮은 의자, 엄마가 바구니를 얹어 놓던 선반까지도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지금의 일본 대중목욕탕 모습도 이러할까? 일본 온천 여행을 가보지 않아서 몰랐던 것일까? 나이 쉰에 대만 베이터우에서 처음 알았다. 우리 목욕탕 모습이 일제 강점기 일본의 영향이었다는 것을. 


우리도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목욕탕 문화가 없었을까? 서양과 중국에 대중 목욕탕 문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화의 파워는 총칼보다도 강하다더니 그 말이 참이었다. 반일 정신, 항일 운동, 일제의 흔적 지우기 등의 노력을 뚫고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머리카락이 곧추서는 느낌이었다. 


온천 박물관을 나서는데 친근감이 들어 재미있기도 했지만 어쩐지 입맛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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