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진지주의 영화뒷담화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제목인 『나이팅게일』의 은유에 대해 고민한다. 백의의 천사란 이미지를 고착하고(지금에 이르러 그것이 좋은 이미지인지는 잘 모르겠다.) 숱한 상징으로 소비되는 '나이팅게일'이란 역사적 위인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생각해보며 점차 영화 속으로 빠져든다. 세계1차대전부터 세계2차대전 영국의 전쟁 역사와 식민지 관련하여 그밖에 역사 지식이 좀 더 있었더라면, 이 영화를 탐닉하는데 좀 더 풍미를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도 든다. 그러나... 영화평론가나 대중문화비평가, 연구원 따위가 아닌데, 영화 한 편을 위해 역사서적을 뒤지고 책상 위에서 펜대를 굴리는 것도 굉장한 부담이거니와, 지나치게 유난을 떠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이 영화 한 편을 소홀히 하지 않고 정성스레 소비하므로, 글을 써서 누군가와 나누는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행위(?)라면 더더욱! ㅜㅜ
어쨌거나, 원체 얕은 근현대 역사 지식의 한계를 실감하며, 약 130분가량의 러닝타임을 견뎌본 바, 매우 흥미로운 추격 드라마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팅게일』은 제75회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신인배우상 수상 및 제9회 호주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주요 부문 6관왕을 차지하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제35회 선댄스영화제 공식 초청에 이어 다양한 유수 영화제에서 51개 수상 및 노미네이트 되는 놀라운 행보는 지음 허투루의 ‘아무도 안 볼 것 같은 영화 리뷰’에 딱 맞는 옷이다! 단박에 낙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를 보고, 정보를 찾아보기 전에 저런 이력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하여, 처음엔 나이팅게일 생애,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그저 그런 교훈, 계몽 같은 것이 아닐까 막연히 추측하고, 마구 삐뚤어진 상상을 펼치기도 했다.
아일랜드 출신 죄수인 ‘클레어’는 형기를 다 채우고 남편, 아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호킨스’에게 약속됐던 추천장을 요청하지만 계속해서 거절당한다. ‘클레오’와 안타고니스트인 ‘호킨스’는 준수한 외모와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욕망에 눈이 멀어 ‘클레어’를 비롯한 주변인들에게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매력적인 빌런이다. ‘호킨스’의 진급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굿윈’(이웬 레슬리) 대위가 찾아온 어느 날, ‘클레어’의 남편과 ‘호킨스’의 갈등이 드러나며 그토록 바라던 진급이 허사가 된다. 이후, 호킨스는 부하들과 클레어 집으로 찾아가 ‘클레어’의 모든 걸 것 빼앗는다. ‘클레어’는 분노의 추격을 위해,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흑인 ‘빌리’’의 도움으로 점점 추격의 거리는 좁혀진다.
빌런의 매력은 역시 악랄함에 있다. 악도 이유가 있어야 더 악해지고 더 강렬한 법이다. 그런 면에서 ‘호킨스’란 인물은 전형적인 위력 행사에 능숙하고, 집요와 미련 사이 갈팡질팡 따위는 사치스러우며,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죄인 취급하는 아일랜드인이나, 식민지 원주민인 흑인은 도덕적 대상이 아님을 맹신하며, 전쟁시대 침략의 정신이 각인된 채 내뱉는 대사마다 날카롭게 서린 울림을 준다. 그 앞에 설 때마다 자신이 약자임을 여실히 깨닫는, 그의 최후는 이래도 저래도 결국 뭐 하나 바뀌지 않는 무서운 현실 그 자체로 말이다. 그의 마지막은 빌런으로 아쉬움이지만 아쉽지만은 않은 요상한 상쾌(?)따위로 호젓하다. 숱한 ‘호킨스’(어쩌면 우리)가 ‘호킨스’(어쩌면 나)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모습부터 끈질긴 집념으로 무자비한 복수의 추격전을 벌이는 강인한 모습까지 다채로운 매력의 ‘클레어’. 처음에는 그녀의 처연한 배경과 반드시 지키고 싶은 절실과 무너진 절실에 의한 깊은 분노를 관객으로 하여금 동화되어 따라간다. ‘빌리’의 도움 앞에서도 복수만을 위해 길을 재촉하는 ‘클레어’ 첫 복수 대상자인 군인을 잔혹하게 응징하면서부터 점점 분노는 길을 잃기 시작한다. ’빌리’의 도움으로 최종 보스 ‘호킨스’에 다다르지만, 클레어의 복수는 처음 분노에 휩싸인 끈적끈적한 어둠과 그 색채가 달라져 있다. 남편과 마을에서 오순도순 지내며 서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노래로 군인들 위문하던 그때... 아무것도 몰랐을 우물 밖 개구리를 처절하게 경험한다.
‘빌리’는 ‘클레어’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 안에 깊이 묻어두었던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고통은 ‘빌리’를 안내자에서 추격자로 변화시키고 그가 외면하고 있던 분노의 실체를 확인하고 들끓게 한다. 민족의 파괴를 외면했던 빌리는 ‘클레어’와 동행하며 검은 새 영혼이라는 정체성 찾는다. 검은 새와 빌리의 주술적 노래는 클레어와 변화와 대조하며, 한 인물을 향해 애착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클레어’ 심리적 변화는 관객의 바람을 따르지 않는다. 배신감에 빠져 흥미를 잃을 관객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통쾌한 복수 액션이 아님을 암시하는 복선을 여기저기 별 티 안 나게 뿌려놓았다.
극한의 경험은 인간이 어떻게 동료애, 인간성, 용기를 지킬 수 있는지 보여주며, ‘폭력과 복수의 허무함/통쾌함을 통한 반(反) 폭력과 폭력, 용서와 응징 대한 메시지’를 클레어와 빌리를 통해 인물을 통해 전달한다?
또한 이 영화의 매력 중에 디테일을 빼놓을 수 없다. 원시림 같은 거친 느낌과 신비로움이 주는 공포, 날것 그대로 끈적거리는 불쾌 따위를 자아내는 숲은 전경. ‘핏’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영국 군복과 인물들의 의상. 원주민들의 언어와 노래. 시대와 지역이 어긋나지 않게 공들여 묘사한 이 영화의 미장센은 그 자체가 매력이다. 식민지 사회의 폭력은 단순히 고통으로만 순화되지 못한다. 특히 우리나라 일제 강점 식민의 역사의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나로선 더더욱! 폭력을 고통이 아니면 무엇으로 더 설명할 수 있을까?의 고민! 질문에 답을 주저하게 만드는 무거운 분위기가 솜털을 곤두세우는 것 같다.
어떤 인물을 따라가듯 영화의 막바지에 다다라선 한 가지 의문만이 남는다. 왜 ‘나이팅게일’인가? 그 나이팅게일이 아닌 다른 뜻이 있나?
‘클레어’가 ‘호킨스’ 앞에서 더 이상 나는 당신의 소유도, 나이팅 게일도, 천사도 아니며, 나는 나일뿐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호킨스의 악행을 까발리며, 마지막 복수의 방아쇠가 숭고로 기억되길 바랐을까?
어쩌면 보를레르의 『악의 꽃』처럼 서로 대척이 되는 두 이미지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빛나는 것은 빛나고, 폭력은 단지 잔인함보다 더 우리의 현실에 맞닿길 바랐던 것이 아닐까? (난데없이 비약주의ㅋㅋㅋ)
아무도 안 볼 것 같은 영화 리뷰를 시작하고 아직 아무도 내 글을 보지 않을 것 같지만 왠지 추천의 의사를 소심하게 남기고 싶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겠는, 영화 『나이팅게일』이다.
나 오늘 왜 이렇게 진지해? 젠장!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