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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허투루 Aug 28. 2024

눈치 (Nunchi)

눈 똑바로 떠라!

서론


“눈치(Nunchi)가 2021년 9월에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OED)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풀이를 하자면, “the subtle art and ability to listen and gauge others’ moods”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빠르게 파악하고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능력을 뜻한다.


눈치가 능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타인의 감정이나 미묘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파악하는 것이 능력이라면, 그다지 반박을 할 말은 없다. ‘상황에 맞게’란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걸 능력치라고 한다. 아무리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해도,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는 절반에 불과하다. 뒤늦게 “가만히 있을 걸” “한 마디만 더 할 걸” 등등 아쉬운 남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아쉬움은 단순한 아쉬움이지 집착이나 후회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니, “눈치”가 능력이라면 참으로 처염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눈치”가 처염하지 않다면, 눈치라 부르지 않고 매너나 배려라 하지 않을까. 나의 눈치 능력치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수치이지만, 부득이하게 확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하곤 한다. 나는 어디서 누구에게 그렇게 눈치를 보고 있는가. 내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람의 발길이 없는 외딴섬 같은 기분이 든다.


본론


대학 때부터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이 있다. 어떤 한 분야를 함께 걸어가는 클래스메이트나 선후배가 아닌, 각각 삶의 현장에서 경제적 풍요를 위해 애쓰는 친구들이다. 가끔 만나 술 한잔의 수다와 뒷담화를 거하게 안주 삼는 모임이다. 누구 하나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어렵거나 불편한 것은 철저히 배제한 시간이자 공간이다. 그렇게 믿어왔다. 믿음을 배반할 그 어떤 가능성 따위가 없는 그냥 그런 모임지만,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묘한 조짐이 일었다. 그 묘한 조짐으로 생긴 변화를 눈치채며 나의 눈치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여섯 명 중 나 혼자 남성이란 점이다. 사실 이 부분은 딱히 조짐을 의심케 하는 중요한 사실이나 의미는 아니다. 현제 나와 또 다른 한 명을 제외하고 대학 때부터 오늘에 이르는 사이 모두 시집이라는 걸 가게 되었다. 이 모임보다 더 치중할 생황이 생겼고, 이 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패턴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각자 시간을 맞추는 게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우리가 자주 모이던 술집이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 술집 사장님도 우리가 모일 때 마치 모임의 일원인 것처럼 참여했고, 술안주 하나쯤은 아무렇지 않게 서비스로 제공할 정도로 매우 친했다. 사장님이 가게를 정리했을 때, 우리를 집결시킬 매개체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 우리의 모임 횟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몇 달에 한 번이 일 년에 한두 번, 그리고 결국 모임을 거의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이 더 지났을까? 자매 같은 그 다섯 명은 나를 빼고 간헐적으로 모임을 이어오고 있었다. 네 번째 친구가 결혼하게 되었고, 그 결혼식에서 모임 친구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바로 헤어지기 아쉬워 차 한 잔 하면서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들끼리 가끔 모임을 한다는 걸 나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워낙 그 다섯 명은 서로 친하고, 사는 곳도 그리 멀지 않았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모임만 없었을 뿐, 한두 명은 간간이 얼굴을 보고 지냈다. 누구를 만나도 다른 친구들 소식이 줄줄이 들려왔기 때문에 내가 빠진 모임에 대한 서운함이나 섭섭함은 없었다.


다만, 그 친구들이 가끔 모일 때, 항상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불러 달라고 했지만, 한 번도 부름을 받지 못한 지금, 내가 끼어들지 말아야 할 자리에 눈치 없이 끼워 달라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지 않도록 곰곰이 붙잡고 물고 늘어져 보았다. 내가 불편한 이유가 있는 걸까? 같이 맞담배도 피우고 쌍욕도 한 사이에, 말 못 할 무언가가 있는지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 사이에 내가 끼지 못할 무언가 있다는 촉이 발동! 띠리링 울렸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좋지 못할 것만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쨌든 이건 하나 예를 든 것뿐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계속 생긴다면, 눈치력 만렙을 찍을 거 같은 느낌이 들어 매우 서글프다. 친구 별로 없는데 그나마 있던 친구도 다 없어질 거 같은, 이런 기분도 눈치인가? 의문이 든다. 나는 장소든 사람에게든 눈치를 볼 만큼 감각적이지 않다고 자평한다. 눈치를 볼 만큼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걸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편이다. 그렇다고 진상을 부리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애초에 눈치를 보지 않는 게 진상이라면 할 말은 없다. 눈치라는 건 결국 부정적인 순간의 방어적인 반응 아닌가?


결론


눈치가 처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방어적이다. 방어라는 것은 어떤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와 인식이다. 지킨다는 것은 신체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신과 마음, 그리고 선택과 가능성도 포함한다. 굉장히 소심한 친구 A가 좁은 길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 행인을 피해 돌아서 간다고 해보자. A는 우선 저 담배 연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으니, 이는 선택적 방어에 해당한다. 담배 연기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게 될 경우, 괜한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가능성적 방어에 해당한다. 괜히 담배를 하나 피웠을 뿐인데, 그 사람이 시비를 걸 것이라는 A의 선입견은 애먼 사람을 잡는 듯한 인식적 방어에 해당한다


점점 눈치력이 차오를 때마다 처절한 과정을 거칠 것이며, 자기 자신을 지켜낼 힘이 생길 것이다. 자존감 또한 함께 상승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면 눈치는 더 이상 회피하기 위해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이 가진 역량을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보탬이 되는 큰 자산이 될 것이라 믿는다.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눈치의 모습도 완전히 변화할 것이다. 그렇게 바뀐 아름다운 눈치의 모습이 두 번째 이유이자 처염의 방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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