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열 시가 넘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이 시간에 올 전화가 없는데?’라며 의아함으로 화면을 보니 대학 후배인 L이다. 화면에 떠 있는 그녀 이름에 의구심은 더욱 깊어진다.
L과는 몇 달에 한 번쯤 통화하는 사이다. 몇 주전에 연락한지라 주기와 맞지 않은 빠른 전화였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주저하며 전화를 받으니 밝은 목소리 너머로 침울함과 분노가 새어 나온다.
그녀가 아는 친구가 암에 걸렸다며 건강 괜찮냐고 내 안부를 물었다.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느낀 침울함은 이것이었다. 이렇게 훈훈한 서로에 대한 건강검진이 끝나자 본론이 나온다.
회사에 대한 고민이 있단다. 그리곤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내가 느낀 분노는 이것이었다. 이제야 이런 갑작스러운 전화가 이해가 갔다.
긴 얘기를 나눴지만 고민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았다. L은 현재 조직에서 차석을 맡고 있다. 막내 포지션이었던 전과 비교하면 업무 범위가 넓어지고 많아졌다. 현재 맡고 있는 일도 겨우 해나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자기 일을 인계했던 나이는 많지만 아래 직급인 사람이 일을 제때 못 끝내서 그 일이 자꾸 자신에게로 온다는 것이다. 이 일을 팀장에게 말해봤지만 “네가 해야지 어쩌겠어”란 대답만 돌아왔단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 대해 나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여기에 대해 난 일 못하는 사람을 바꿀 순 없으니, 이런 상황을 팀장님에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업무조정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안 되면 할 만큼 하고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L은 자기는 그 사람이 떠넘긴 일을 처리하지 못해 자신이 좋게 평가받지 못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여기에 대해 난 “그럼 어떻게 그 사람 바꿀 수도 있는 것도 아닌데”라고 말하자 그녀는 내가 사람 좋다며 혀를 차고 그 일 못하는 사람 편을 드는 거냐며 따졌다. 난 그 사람 편을 드는 게 아니고 현실이 그런데 어쩌겠냐며 항변했다.
그녀는 그렇게 오래 일했는데 일 못하면 그거 잘못된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잘못된 게 맞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세상에 빌런은 많고 이게 현실인걸.
한동안 대화는 평행선을 달린다. 여기까지 오자 그의 고민에 대해 솔직히 난 해결책을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그는 나보다 오 년 넘게 살았으면 해결책을 줘야 하는 게 아니냐며 나를 향해 따져댔다. 불통이 이상하게 나에게 튀었다.
이런 반응은 자신에 직장에 있는 그 사람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상했다. 내 스타일과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강변에서 뺨 맞고 나에게 화풀이람.
하지만 한 편으론 평소에 이러지 않는 친구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길래 이렇게 반응할까도 싶었다. 그래서 다소 무례하게 느껴지는 이런 태도에 대해 뭐라고 하진 않았다.
전화는 끝내 평행선을 달리다 “다음에 연락해요.”란 말로 서먹하게 끝났다. 통화 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왜 L의 말에 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내 장점 중 하나는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기분 나쁜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점이 내 안에 무엇을 자극했는 지를 살펴본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불교를 접하면서 배우게 된 좋은 습관이다.
이 친구의 화법이 거칠긴 했다. 인생 편하게 살았다는 말을 듣고도 기분이 좋을 사람은 얼마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후배 L의 말은 내 일에 대한 열등감을 자극했다.
아까 전화 통화에서도 L에게도 밝혔듯이 난 일을 잘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못하는 편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이 사람과는 일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는 정도는 아니고 “음.. 일은 그냥 그런데 도냥이 애는 착해”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런 냉정한 인식은 슬프지만 현실이 그런 걸 어쩌겠나. 직장에서 삼 년을 넘게 일하면서 만났던 선후배 중 나보다 못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도 이 년 넘게 같이 일한 내 위 과장님에게도 매일 잔소리를 듣는다. 팀장님에게 보고를 할 때면 아직도 식은땀이 난다. 최근에는 나랑 동기인 두 살 어린 친구가 내 위 선임이 됐는데, 이런 동기와 나에 대한 은근한 비교도 나를 괴롭혔다.
나도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잘 안 됐다. 책도 읽어보고 주위에 조언도 들어가며 해봤지만 일을 잘하게 되진 않았다. 그래서 발버둥을 친다. 이렇게 힘껏 발장구를 쳐야만 그나마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이런 내가 모터로 가는 배를 몸으로 물장구치며 쫓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그녀가 한 말이 내게 아프게 다가왔던 것 같다. “너 무능한 사람이야”라고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난 정말 무능한 사람일까? 아직 회사에서 쫓아내지 않을 걸로 봐서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과장님도 팀장님도 내가 정말로 구제불능이라면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피드백을 줄 것 같지도 않다.
배우자인 HJ도 엄마도 친구 A도 날 좋아한다. 나도 이런 내가 썩 나쁘지 않다. 이런 걸 차치하고 난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는 사람이다. 통화 도중 후배 L이 나에게 인생 편하게 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는 답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인생도 마냥 편하진 않았어 그리고 지금도 그래. 하지만 그래도 살아갈 거야 기쁘면 기쁘다고 소리치며 춤출거고 힘들면 힘들다고 바닥에서 울 거야.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이랑 하하 호호 웃으면서 지낼 거야. 그렇게 매일 발버둥치면서 난 오늘 하루도 살아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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