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다닌 지도 벌써 사 년이 다 돼 간다. 처음에는 버거웠던 일도 익숙해졌다. 월급도 오십만 원가량 올랐다. 그럼에도 주말마다 오마카세를 먹거나 매달 해외여행을 가기엔 부족한 금액이다. 하지만 책을 사거나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아내와 카페에 가는 등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엔 부족함은 없다.
애가 없어서 시간도 많다. 이렇게 먹고살만하다 보니 여유가 없을 때 못했던 취미들을 하나둘씩 해보고 있다. 귀가 얇은 편이라 요가, 러닝, 헬스, 기타 강습, 독서, 브런치 등 좋다는 건 다 해보고 있다. 이런 까닭에 쉴 때도 바쁘다.
이렇게 취미들을 하나둘씩 수집하며 새로운 것을 배우면 좋지만 때론 현타가 올 때도 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잡다하게 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어디선가 좋다고 들어 시작했는데 언젠가부터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것을 하는 건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여름방학에 밀린 일기 숙제하듯이 이것들을 하다 보면 내가 뭐 하는 건지 하는 회의감이 짙어진다.
이런 고민에 현재에 몰입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어중간한 나날을 보내던 찰나에 언젠가 책에서 봤던 일화가 떠올랐다.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에게 젊은이가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런 그에게 버핏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스물다섯 가지 적어보라고 권했다.
부모님이나 친한 친구가 적어보라고 했으면 안 했을 것 같은데 워런 버핏이 말해서 그런지 이틀 후 젊은이는 목록을 모두 써갔다. 여기서 버핏은 중요한 다섯 가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지워버리라고 말했다. 이럴 거면 한 번에 말해줬으면 됐지 않나 싶지만 넘어가자.
나머지 목록이 아까웠는지 언제 해야 하냐고 묻는 그에게 버핏은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위 다섯 가지가 달성되기 전까지는 나머지는 쳐다도 보지 마세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그것을 집중해서 하라는 것이다. 모든 걸 이룰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겠지만 인간에게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하다. 다방면으로 천재적이었던 정약용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닌 이상 탁월함에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수적이다. 본인 스스로가 대가였던 버핏은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로군”하고 끝내고 넘어가면 내 인생에 실질적인 변화는 없다. 그동안 책을 수백 권 넘게 읽어보면서 몸으로 체감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젊은이처럼 현재 하고 있는 활동들을 모두 적어보았다. 다 적어보니 열두 가지가 나왔다. 그 후엔 아래 사진처럼 목록 옆에 중요한 순서대로 번호로 매겼다. 숫자가 낮을수록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동이다. 상위 다섯 가지만 남기고 나머지엔 줄을 그었다.
현재하고 있는 열두 가지 활동들.
정리해 보니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활동은 아래 다섯 가지였다.
1. 운동하기(헬스, 요가, 러닝)
2. 아내와 함께 시간 보내기
3. 브런치에 글쓰기
4. 독서하기
5. 회사 보충 공부 하기
젊은이와 내가 다른 점은 그가 목표를 적었다면 나는 하고 있는 활동을 적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본질이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핵심은 같다고 봤다.
이렇게 다섯 가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일주일 간 이것들 위주로 했다. 이 말은 매일 이 활동을 가장 먼저 수행하겠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론 저녁 여섯 시에 퇴근을 하고 요가원이나 헬스장을 간다. 그 후 집으로 가서 아내와 같이 대화를 하면서 식사한다.
그 후엔 글쓰기를 하고 나머지 시간에 회사 공부를 한다. 이십 분 정도 되는 출퇴근시간이나 점심시간에는 독서를 한다. 만약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하는 상황이라면 우선순위가 낮은 회사공부나 독서를 뒤로 미룬다.
이렇게 해보니 좋았던 점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내가 하고 있는 활동들을 적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내가 파악한 나는 다음과 같다.
운동은 나에게 최우선 순위이다. 고관절 만성통증으로 이십 년 넘게 고통을 겪었다. 지금도 통증이 있지만 헬스나 요가 같은 운동으로 많이 나아졌다. 이때 겪은 경험을 통해 건강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집중해서 열심히 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아내와 시간 보내는 것이 두 번째 우선순위이다. 퇴근 후 밥 먹으면서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카페에서 같이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행동을 할 때 평온함과 깊은 행복감을 느낀다. 의외였던 점은 친구들이나 회사 동료등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를 통해서 나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넓게 맺는 걸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보다는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몇몇 사람들과 깊게 시간을 보낼 때 행복감을 느낀다.
3번~5번 항목은 뭔가에 몰입하여 배우고 창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난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뭔가를 만들어낼 때 큰 재미와 의미를 얻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무엇을 할 때 판단이 명료해진다는 점이다. 예전 같으면 심심하면 친구를 갑자기 만나거나 유튜브를 멍하니 시청하곤 했다. 이렇게 시간이 남을 때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 머릿속에 해야 하는 우선순위가 분명히 있다. 만약 친구나 유튜브를 본다고 쳐도 내가 어떤 것을 포기하고 이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알고 있다. 똑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큰 차이다.
세 번째는 자기 효능감이 올라간다는 점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동들을 우선에 두고 꾸준히 해나가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이런 것들이 내 태도에도 반영이 되어 일상생활을 할 때도 자신감으로 표출된다.
뭔가를 계속하면서 하루종일 바쁘게 살았던 불안했던 예전과 달리 중요한 것들을 이미 했다는 생각에 나머지 시간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도 여유가 있는 건 덤이다.
세상은 온갖 변수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내일 점심메뉴도 뭘 먹을지 확신할 수 없는 게 우리 삶이다.
그러니만큼 우선순위를 정한다 해도 이렇게 기계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긴 어려울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코어키퍼>라는 게임을 하느라 우선순위대로 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우선순위를 정한 효과다. 이렇게 시도하고 실패하는 과정 속에서 언젠간 내가 원하는 곳에 다다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