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어젯밤에 윤석열이 계엄했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내가 한 말이다. 길지도 않은 한 문장이건만 그녀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억양이 부정확하거나 말이 빨랐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계엄'이란 단어의 생경함 때문이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 단어는 예전 역사교과서나 영화에서 봤던 케케묵은 용어 아닌가? 요즘 역사책을 많이 읽더니 이런 고급(?) 말장난까지 치는구나' 등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오갔다.
이런 내 상태를 알았는지 “진짜라니깐”라며 그녀 가 볼멘소리한다. 이때까지도 아내 연기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반신반의하며 핸드폰으로 네이버 기사를 찾아보니 진짜다. 그녀 말이 사실이었다. 심지어 새벽에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해서 대통령이 계엄 해제까지 한 상황이었다. 뉴스 영상 속에서 군대와 시민들이 대치하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나서도 큰 감흥이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한 내 느낌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대통령이 또 황당한 짓을 저질렀다 정도였다. 그들 간 정치싸움이고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겼다. 심지어 이 사건을 도파민 축제라고까지 생각했다. 내 무료한 삶에서 재미를 주는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했다. 만약 내가 민주시민 시험을 본다면 낙제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 날부터 네이버 정치 뉴스란을 들락날락거렸다. 시간마다 계엄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이 쏟아졌다. 언론사들은 당파 할 것 없이 [단독]이라는 타이틀로 자극적인 정보들을 쏟아냈다. 도파민 축제였다. 이런 것들로도 모자라서 평소에 들어가지도 않던 여러 커뮤니티들을 전전하면서 실시간으로 그들의 반응을 보며 도파민을 채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문회가 시작되고 수사가 시작되며 점점 더 많은 이야기들이 세상에 풀렸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그중에 충격적이었던 것은 북한과의 분쟁을 유도했다는 점이었다. 남측으로 오물 풍선을 보내는 북측을 향해 원점 타격을 계획했다는 점이었다.
원점 타격이란 오물 풍선을 보내는 북측 영토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타국을 향한 공격이므로 전쟁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다행히 합참의장의 거절로서 이 작전은 무산되었지만 만약 성공했다면 제2차 한국전쟁의 시발점이 되어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런 사실에 대해 커뮤니티는 우스갯소리로 이럴 때는 김정은이 아무 말도 안 한다며 희화화했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만약 김정은이 영토를 확장할 야심이 있거나 정치적으로 몰려있어 뭔가 타개할 계책이 필요했다면 전쟁을 선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합리적인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과거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보면 역사는 꼭 합리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자 도파민 축제가 생겼다는 내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정치적 사건이 나와는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꽤나 많이. 만약 북한을 원점 타격해 전쟁이 시작되었다면 나도 현역병으로 끌려갔을 테고 거기서 다치거나 죽거나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 내 주변사람들은 고통을 겪을 수도 있었다.
이런 극단의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약 역사가 달라져서 계엄군이 국회를 봉쇄하고 이 기간이 길어졌다면 유혈사태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지금 밝혀지는 바에 따르면 이번 계엄에 방송으로 나온 인원들 이외에도 지방에 다른 군인들이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들과 시민과 유혈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피해자가 내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이런 개인적인 비극들이 모여 지역차별보다 더한 갈등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런 갈등은 우리 사회에 생산적인 논의들을 모두 삼켜버리고 소모적인 논쟁으로만 날을 지새우게 만들었을 것이다.
최근에 봤던 유발하라리의 신작 <넥서스>가 떠올랐다. 이 책에서도 저자는 지속적으로 경고한다. 지금 있는 이 체제가 필연적으로 된 게 아니라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 하나였다고 말이다. 만약 조금만 세계선이 뒤틀렸다면 우리가 독재주의이고 북한이 민주주의 국가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번 사태가 수억 명이 죽는 3차 세계대전으로 발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 계엄사태는 유혈 사태 없이 비교적 평화롭게 마무리 됐다. 그리고 이런 사태를 만든 대통령은 탄핵 소추로 그 대가를 받고 있다. 이런 일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역사에서는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런 일을 통해서 나와 정치가 연관성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힘이 모여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권력기관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는 유발하라리의 경고처럼 우리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선 시민들이 정신을 또렷하게 유지하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서 권력기관들을 감시해야 한다. 이런 토대 위에서만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있다.
※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나 직위들은 작가에 의하여 모두 임의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