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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아내가 죽었다.

메멘토모리

by 도냥이

어젯밤 아내가 죽었다. 불의의 사고였다. 마음은 의외로 담담했다.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가 된 느낌이었다. 아마 이것은 뇌의 노력일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해서 정신적 충격을 완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다음 날 퇴근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을 보고 멈칫한다. 분명 늘 봤던 풍경이건만 생경하다. 잠시 멈춰 심호흡을 한다. 세 번쯤 숨을 뱉고 손잡이를 잡고 돌려 문을 연다.


문 안에는 열려 있는 화장실 문과 버리려고 출입문 옆에 둔 쓰레기봉투가 있다. 문 턱을 지나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데 그녀만 없다.


너무 많이 울었나 의식이 흐려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불은 구겨져 오른쪽 다리 저 멀리 가 있고 배게에는 침자국이 가득하다. '아 꿈인가 보다 다행이다.'


몸을 일으켜 가장 먼저 아내 방으로 간다. 침대 중간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다행이다.'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한 후 식탁에 앉아서 아침을 먹으며 일어난 그녀에게 무서운 꿈을 꿨다며 아이처럼 칭얼거린다.


아내는 내 이야기에 보조개를 드러내며 썩쏘를 지으며 나를 흘겨본다. 머릿속으로 "또 날 죽였군"하는 목소리가 내게도 들린다. 맞다 사실 내겐 이런 꿈이 처음이 아니다. 그녀 반응을 보니 아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꾸고 그녀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난 죽음에 대한 꿈을 종종 꾼다. 주인공은 대부분은 아내다. 아마 심리적으로 나와 가장 가깝기 때문인 것 같다. 내 꿈은 보통 아래와 같이 흐름으로 진행된다.


1) 어떤 불의의 사고로 아내가 이 세상을 뜬다.

2) 사고 당시 난 정신이 없다.

3) 다음 날 텅 빈 집에 들어와 펑펑 울면서 깬다.


아내의 반응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꺼린다. 어렸을 때 아빠차를 타고 경인고속도로를 지나서 목포에 있는 시골로 갈 때 "엄마 이거 부딪혀서 사고 나면 어떡해"란 말에 엄마가 재수 없는 소리 말라며 핀잔을 줬던 기억도 난다. 이런 걸 보면 본능적으로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본능을 이겨내고 내 삶에 죽음을 마주하고 인정하는 순간 얻는 것들도 있다.


이런 것들이 로버트 그린의 9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인 <인간 본성의 법칙>의 마지막 챕터인 '죽음'편에 잘 정리가 되어있다. 이 책에 따르면 죽음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효과는 세 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타인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다. 평소에 내 심기에 거슬리던 직장 동료마저 이래나 저래나 같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간으로서 동지애가 생긴다. 같은 처지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니 내 옆에 있는 아내, 부모님, 누나들은 말에 무엇할까. 심지어 지금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거나 자격증을 공부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들에 대한 연민이 느껴진다.


이런 연민의 마음이 드는 순간 평소에 들었던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긍정적인 감정이 더 우위를 점하게 된다. 아무래도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이 우리에게 더 좋을 것이다.


두 번째는 잔걱정이 없어진다. 상사에게 미숙한 일처리로 혼이 난 것, 아내가 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해서 눈초리를 보낼 때 등 평소에 나를 흔들었던 것들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애정마저 느껴진다. 물론 그들에게 어차피 같이 죽을 건데 그렇게 화내서 뭐해요 우리 행복하게 삽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과 내가 있는 온도는 다르니 혼자 속으로만 이런 생각을 할 뿐이다.


세 번째는 쓸데없는 망상이 사라진다. 죽음을 인식하기 전에는 여러 가능성들로 상상 속을 헤맨다. 크툴루물을 쓰는 인터넷 작가가 돼 볼까, 평소 아끼던 차장님에게 손 편지를 써볼까, 회사 일을 가지고 소설을 써볼까 등 이런 가능성들에 취해서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다. 이렇게 상상만 할 때의 장점은 그 일을 실제로 하면서 느끼는 고통들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있다. 생선 살만 발라먹듯 뇌 속에서 이런 일을 하지도 않았음에도 쾌감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면 이런 것들이 망상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데드라인이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능성들 속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음을 회피하려는 태도는 이런 가능성들 속을 헤매게 만든다. 죽음을 스스로 인정할 때 내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숙고하고 선택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죽음을 인지하면 타인을 좀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잔걱정과 쓸데없는 망상이 사라진다. 이런 긍정적인 시선과 에너지를 이용해 본인이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그런 것들에 활용할 수 있다면 마지막 임종을 맞는 순간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도 좀 더 행복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나 직위들은 작가에 의하여 모두 임의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그림 출처 : Ai Copi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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