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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안 착해 임마!

나 답게 사는 거 쉽지 않다.

by 도냥이

사람 자주 만나는 편이 아니다.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직장동료, 아내, 친구 한 두어명 독서모임원들이 다다. 이런 점이 외롭거나 힘들진 않다.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좋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내 생활을 똑같다. 도서관에서 가서 좋아하는 책을 읽고 브런치를 쓰며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집에서 기타 친다. 누군가는 이런 삶을 단조롭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삶에 자족스럽다.


하지만 나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라 누군가를 보긴한다. 친구 D를 자주 보는 편인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난다. 반 년에 한 번 친구를 볼까말까한 내 성향을 고려할 때 사실상 D를 매일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의 관계는 중학교 동창에서 시작됐다. 다들 그렇듯이 앞자리에서 두 세 번째 줄에 있던 우리는 자연스레 친해졌고 쉬는 시간이나 학교가 끝난 후에도 청소년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어울렸다.


이 후에도 우리 인연은 이어졌다. 당시 우리 동네에서 가지 않던 고등학교를 지원해서 간 나는 거기서도 D를 만났다. 심지어 취업 준비할 때도 걸어서 십 분 거리인 우리는 집 근처 도서관에서 같이 하고 지금은 같은 회사까지 다닌다. 이런 이유들로 요즘 자주 보고 있다.


사람마다 말 습관이 있는데, D도 그렇다. 그와 커피나 술을 마시다보면 꼭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XX은 착해서 좋아” 여기서 XX는 주변 친구나 회사 동료를 이야기도 하고 나를 지칭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 말이 거슬리지 않았다. 지가 좋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여기에 대한 내 반응은 좋다고 하니 좋은가보다 정도였다. 그런데 이 말을 반복해서 듣다보니 묘하게 불편했다. 특히 '착하다' 라는 표현이 목 안의 박힌 가시마냥 깔깔했다.


글을 쓰면서 생긴 습관 중 하나인데 이런 마음 속 불편함이 드는 순간 이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는 것이다. 장강명 작가는 이런 행위를 마음속에 낚시대를 드리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다보면 부정적인 감정 너머에 있는 내 안의 무엇이 이 말에 반응했을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막연하면 일기가 되고 명확해지면 브런치 글이 된다. 지금 쓰는 글도 이런 식으로 쓰고 있다.


일단네이버 사전에 착하다를 쳐본다. 다음과 같은 풀이가 나온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


언뜻 보긴 좋은 말이다. 언행, 곱다, 바르다라는 단어들 모두 휘핑크림을 바른듯 달달하다. 하지만 모두 주관적이다. 판단의 주체가 내가 아닌 상대방이다. 즉 착하다는 말을 풀어보면 '나에게 크게 거슬리지 않는 성격을 가졌구나'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곧 이 말은 본인에게 크게 거슬리지 않는 범위에서 행동하라는 무의식적 암시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말이 우리 본성과 연결될 때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 말에 부응하려는 기질이 있다. 이것은 개인이 아닌 단체로서 종을 부흥시킨 인간의 본능 중 하나다. 그래서 좋든 싫든 우리는 타인에게 부응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인간 본성을 다룬 로버트그린의 벽돌 책 <인간 본성의 법칙>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내가 다른 사람의 투영 대상이 되었을 때는 나를 그렇게 이상화시키는 상대의 기대에, 그의 판타지에 부응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상대가 흥분하는 모습에 사로잡혀 그가 상상하는 그대로 나는 훌륭하고, 강인하고, 공감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상대가 바라는 역할을 연기하기 시작한다. 상대가 그토록 갈구하는 어머니상 혹은 아버지상이 된다. 하지만 결국에는 후회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자질을 통해 인정받을 수 없기에 더 이상 '당신 자신'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설사 상대가 바라는 역할을 잘 수행한다고 해도 결국은 후회로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상대가 바라는 모습은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가 자신답다고 느끼지 못할 때 무력해지고 불행해진다.


내 사례로 예를 들어보면, 친구 D는 "내게 도냥이는 착해서 좋아"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한다. 이 말은 들은 나는 여기에 부응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내 행동을 조정하게 된다. 이런 행위는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가 들고 만남이 피로해진다. 내 자신으로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닌 꾸며낸 느낌으로 있는 느낌이 사이즈가 두 치수는 작은 옷을 입은 것 같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미 가짜 내 모습을 전면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이를 수정하기도 어렵다. 결과적으로 만남을 반복될 수록 불편함은 커지고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살기 힘들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바람에 우리를 맞추려고 하고 조금 더 커서는 또래들에게 그리고 성장하면 사회에 맞추려고 하게 된다.


물론 이런 사회화 과정을 거쳐야 사회에 한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것에 너무 매몰되어 버리면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된다. 특히나 우리나라 같이 집단 문화가 강한 곳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 살기 위해 바락해야 한다. 그래야만 좀 더 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 수 있고 그것이 우리 스스로에게도 좋다. 사실 사회도 좋다. 이럴 때 인간이 가진 재능이 만발해 사회에 좀 더 나은 기여를 할 수 있다.





※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나 직위들은 작가에 의하여 모두 임의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그림 출처 : Ai Copi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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