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칠 년 넘게 책을 읽어왔다. 독서를 시작한 지 처음 2년은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봤다.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였기에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취업 이후에는 책을 직접 사서 읽기 시작했다. 월급을 받게 된 것도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문장에 형광펜을 칠하고 그 이유를 여백에 적고 책 귀퉁이를 접는 나만의 독서 방식이 자리 잡으면서부터다.
책은 주로 온라인 교보문고에서 구입했다. 최근 3개월간 30만 원 이상을 써야 받을 수 있는 플래티넘 회원 자격을 거의 놓친 적이 없을 정도였다. 오프라인에서는 교보문고나 종로서적 외에도, 여행지에서 들른 독립서점에서 책을 사기도 했다. 이렇게 하나둘 책을 사다 보니 어느새 내 서재는 책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집에는 5 ×5 칸짜리 책장이 있었다. 책을 칸마다 꽂고, 남는 공간 위에는 가로로 눕혀 올리고, 또 그 앞에는 책을 쌓았다. 뒤쪽 책들은 제목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마저도 부족해 책장 앞 바닥에도 책이 놓이기 시작했다. 점점 우리 집은 책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바뀌어 갔다. 마치 스타크래프트에서 저그가 건물을 지으며 점막을 넓혀 가듯이. 한 번 점막이 퍼지면, 테란은 그 위에 어떤 건물도 세울 수 없듯, 책이 놓인 자리는 더 이상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정리해야지 생각하면서도, 막상 손을 대려니 일이 커질 것 같아 그저 바라만 본 날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책장만 노려보던 어느 날, 아내가 느닷없이 정리를 시작했다. 나도 '이때다!' 싶어 잽싸게 옆에서 거들었다. 일단 아내의 지시에 따라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모두 바닥으로 옮겼다. 아내 책은 왼쪽, 내 책은 오른쪽. 둘이 함께하니 생각보다 금세 정리가 끝났다. 나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건, 바로 이런 뜻밖의 장점이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책을 모두 꺼내는 것까진 순조로웠지만, 버릴 책을 고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속도가 확 떨어졌다. 독서인에게 책을 버리는 일은 실로 고역이다. 나름 미니멀리스트라 물건 정리에 자신이 있지만, 책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약해진다.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을 보면, 그 책을 샀던 이유와 함께 쏟아졌던 호평들이 떠올라 쉽게 버릴 수가 없다. 혹시 인생책을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도 스친다. 이미 읽은 책들도 마찬가지다. 읽으며 느꼈던 감정이 남아 있어 손이 잘 가지 않는다. 게다가 언젠가 다시 필요해져 되사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까지 몰려온다.
이렇게 버릴 책과 남길 책을 고르는 일은 심적으로도 상당히 괴롭다. 여기에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편향까지 작용하면,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 인간은 ‘손실회피’와 ‘보유효과’라는 인지 편향을 가지고 있다. 손실회피란, 같은 크기의 이익보다 손실을 두 배쯤 더 크게 느끼는 경향을 말한다. 그러니까 책 한 권을 버리는 것은 심리적으로 두 권을 새로 사는 것만큼의 손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보유효과는 우리가 가진 물건의 가치를 실제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말한다. 소유하게 되는 순간, 그 물건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외국의 한 대학 실험에서는 머그컵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를 1달러에 사겠다고 했지만, 머그컵을 받은 후에는 3달러에 팔겠다고 했다. 같은 물건인데도 소유 여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 것이다. 당근마켓에서 내 물건이 생각보다 안 팔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감정 소모와 편향들로 책정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는 힘든 일인 것이다.
이런 감정적 소모와 심리적 편향 때문에, 책 정리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정리를 끝내고 나면, 그런 어려움을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의 이득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알라딘 중고서점 같은 곳이 성황을 이룰 리 없었을 것이다. 책을 정리하고 나면 책장에 여유 공간이 생기는데, 이런 빈틈은 우리의 뇌에도 묘한 안도감을 준다. 책은 생각보다 많은 인지 자원을 차지하는 존재다. 책을 정리하면서 그 안에 담겼던 감정과 정보들을 덜어내면, 뇌에도 여유 공간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지막으로 책 정리에 도움이 되었던 팁을 하나 공유하자면, 나는 이럴 때 오히려 책에서 해답을 찾는 편이다.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의 저자 곤도 마리에는 '명예의 전당' 전략을 제안한다. 자신의 인생에 남을 만큼 중요한 책만을 고르고, 나머지는 과감히 떠나보내는 방식이다. 운동선수들이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 힘든 것처럼, 이 기준을 통과한 책만 남긴다는 철학이다.
반면, 여러 분야의 지식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박문호 박사님의 경우는 전혀 다른 접근을 취한다. 그는 "한 줄이라도 도움이 되는 책은 산다. 버릴 책은 애초에 사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책을 사기 전의 선택 기준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두 방식 모두 일리 있다. 중요한 건 자기에게 맞는 기준을 정하고, 거기에 책임 있게 따르는 것이다.
나의 경우, 곤도 마리에와 박문호 박사님의 방식을 적절히 섞어 책을 정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곤도 마리에의 ‘명예의 전당’ 방식처럼 정말 인생에 남을 만한 책만 남기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니 남는 책이 너무 적어졌고, 나중에 글을 쓸 때 참고할 자료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박문호 박사님처럼 '버릴 책은 아예 사지 않는다'는 방식도 시도해 봤지만,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책을 고르기가 어려워지고, 그 결과 책을 잘 사지 않게 되면서 독서의 범위가 오히려 좁아지는 부작용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기준을 만들었다. 글을 쓸 때 참고할 만한 책은 남기고, 다시 읽고 싶은 책과 ‘이 달의 책’으로 선정한 책들도 보관하는 식이다. 읽을 때마다 인상적인 문장이나 생각을 기록해 두는 습관도 함께하고 있다.
사실 책 정리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여러 방법을 직접 시도해 보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가는 것도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번거로운 작업도 조금은 즐겁게 다가올 수 있다.
그림출처 : chat gpt 4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