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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Apr 08. 2021

불평등의 열매

"죄와 벌"이 그려낸 비교중심사회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마틴 데일리와 마고 윌슨은 살인에 대해 굉장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남성을 ‘살인’이라는 유혹으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세상을 돌이켜보았을 때, 살인범의 대부분은 남성이었으며, 그들이 겨냥한 사람들 또한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두 교수는 이러한 데이터가 어떤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알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의 각 주에서 발생한 살인사건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그들은 놀라운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말 많은 양의 살인사건이 다름 아닌 “지위 경쟁”과 “불평등”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각 주(州)를 살펴보았을 때, 모두가 가난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주(州)에서는 남성의 공격성이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모두가 부유한 주(州)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불평등이 비교적으로 극심했던 주(州), 다시 말하자면 서로 간의 경제적 및 사회적 환경의 차이가 심했던 주(州)에서는 남성의 공격성이 급격하게 올라갔다. 이 연구결과의 상관관계는 0.9에 달했으며, 이는 살인의 주요 원인에 대해 불평등 이외에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가 없다고 여겨질 정도의 수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살인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절대다수의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 오는 분노와 불만 속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이는 삶의 무기력함, 열등감, 그리고 자신의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져 결국 사회 전체의 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명료하게 표현해낸 작가가 한 사람 있는데,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라 불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이다. 그는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이라는 작품을 통해 사회의 불평등으로부터 시작된 서로 간의 관계와 그 속에서 각자가 추구하는 다양한 삶을 심도 있게 그려냈으며,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이라는 벽을 직면하면서 갖는 심리적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전에 먼저 우리는 불평등이라는 요소 그 자체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불평등이라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우리는 “돈”이라는 요소를 빼놓을 수가 없다. 상위 1%의 자산이 하위 50%의 자산과 맞먹는 사회를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은 사회가 불공평하다는 비난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이런 형태의 분배 구조를 “마태 효과 (Matthew Effect)”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는 성경의 마태복음 25장 29절인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상이 단순히 돈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미국에는 매년 150만 종의 책이 출간되지만, 그 중 10만 부 이상 팔리는 책의 수는 500종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작곡가들이 클래식 곡들을 써 왔지만, 현대 오케스트라에서 다루어지는 곡들 중 대다수는 단 4명의 작곡가인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가 남긴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각국의 도시들을 보면 일부 도시에만 인구가 집중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외에도 특정 사람들에게 집중되는 영상 조회수, 약 500단어가 커뮤니케이션의 90%를 차지하는 단어 사용 빈도수 등 그야말로 모든 분야에 이 “마태 효과”가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불평등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의도성이나 어떠한 변화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임과 동시에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는 극심해져 가는 빈부격차를 예로 들어 불평등이 자본주의의 한계성이자 자본주의만이 가져오는 특성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나, 이는 완전히 잘못된 주장이다. 사회적 구조에 상관없이 우리는 불평등이라는 “현상”을 절대로 막을 수 없으며, 심지어 분배와 평등을 가장 많이 외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도 결국은 이 벽을 넘어설 수 없다. 불평등은 마치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사회가 평등을 추구하기 위해 해온 지금까지의 노력들은 모두 무의미하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평등은 인간의 심리적 압박감을 불러오며 서로 간의 갈등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를 설령 “해결”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지금까지의 노력은 이따금씩 유의미하게 작용되곤 했다. 이전 왕권 체제에서는 권력이나 계급, 혹은 핏줄에 의해 각자의 사회적 위치가 가시적으로 나눠졌으며, 이를 넘어설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계급”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자본주의 안에서 조금이나마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불평등을 완전히 근절시킬 수는 없었으며, 이는 단순히 사회의 제도나 구조만으로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더 심도 깊은 관찰과 연구가 필요한 요소이며, 어쩌면 인류가 끝내 해결하지 못할 난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들어 동정, 연민, 분노, 원망과 같은 감정으로부터 시작된 정책으로 사회의 불평등을 개선시키려는 시도가 반복적으로 일어났으며, 이는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마치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니코프”라는 청년이 저지른 살인행위가 그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초인사상”에 빠져 자신이 비범한 사람, 즉 사회 개혁을 위해 불법을 저지를 권리와 의무를 가진 사람이라고 여겼으며, 결국 이는 한 노파를 살인하는 행위까지 이어진다. 사회개혁을 추구했다는 것은 그가 사회를 향해 어떠한 원망이나 분노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분노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는 그의 논문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아주 지식 있는 법학생이었으나,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지적 능력에 상관없이 빈곤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딱히 특별한 능력도 없을뿐더러 많은 사람들이 “이(蝨)”같은 존재라고 비난하던 한 노파는 라스콜니코프와 달리 부유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이러한 “불평등”한 세상을 바라볼 때, 사회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그를 채웠을 것이며, 이것이 분명 노파를 살인하는 것의 잠재적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의 살인은 사회에 단 하나의 긍정적인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사회개혁을 추구하던 그의 행동은 역설적이게도 선한 사람이자 사회적 약자라고 여겨지던 “리자베타”를 죽이는 데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사회의 발전을 위한 행위가 사회의 혼돈으로 끝난 것이다. 라스콜니코프 또한 살인 이후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큰 심리적 고통을 직면해야 했으며, 결국 그의 감정으로부터 시작된 살인은 본인과 타인 모두의 삶에 어떠한 결실도 맺을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준”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감정기반사고체계(Emotional thinking)”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감정기반사고체계로 인해 그날의 기분 그리고 일시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피해의식, 불평, 원망으로 가득 차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기분이 항상 옳다”라는 가장 위험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결국 자신의 상황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최근 “불평등”과 “능력주의(Meritocracy)”의 관계성에 대한 논쟁이 화두가 되고 있다. 현대사회는 “능력주의”를 중심으로 운영되는데, 이는 “좋은 성적을 거둔 사람에게 더 많은 보상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능력주의에 대한 사회의 비판이 요즘 들어 점점 거세지고 있으며, 특히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이 그들의 중심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는 “공정하다는 착각(Tyranny of Merit)”이라는 책을 통해 능력주의가 갖는 한계성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능력주의로 인해 발생된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로서 마이클 샌델이 지적했던 것은 다름 아닌 “비교의식”이었으며,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감정기반사고체계와 함께 개인의 심리를 거세게 뒤흔들면서 그들의 눈을 가리는 또 하나의 위험한 요소이다.

더 좋은 성과를 거둔 사람은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회 속에서, “비교의식”은 사람들의 삶에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두 씨앗을 심는다. 먼저, 열등감이 심어진 이들은 자기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동경을 넘어선 그들과 “똑같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마음에 품게 되고, 그러다 환경적 및 개인적 한계를 직면했을 때에 스스로 자멸해버리거나 혹은 이전의 존경심이 질투심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열등감은 이전보다 높은 곳에 올라갔다 할지라도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속해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올라가지만, 사실상 한 분야의 정상에 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정말 극악의 확률로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른다고 해도, 그 뒤에는 지금껏 하지 않은 또 다른 분야를 찾아서 다시 올라가려 할 것이다. 즉, 열등감을 원동력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를 없애버리지 않는 한 평생 자신을 혹사시키면서 살게 되고, 결국 피폐해진 삶을 자초해서 만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월감이라는 씨앗은 사람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가? “죄와 벌”에 이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바로 “루쥔”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능력과 재력을 모두 갖춘 그야말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성공으로 인해 우월감을 느끼던 그는 겉으로는 점잖은 행세를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찮은 존재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라스콜니코프의 여동생인 두냐를 약혼자로 맞이할 때에도, 그는 자신이 두냐와 그녀의 가족을 구원할 존재라고 여기며 앞으로도 그녀가 자신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런 루쥔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라스콜니코프가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제 생각으론 당신의 장점을 몽땅 긁어모아도 당신이 지금 돌을 던지고 있는 저 불행한 아가씨의 새끼손가락만 한 가치도 없습니다. (죄와 벌 2 pg.52)”


여기서 언급된 “불행한 아가씨”는 가족을 위해 매춘부 생활을 하고 있던 “소냐”를 칭하는 말이었다. 루쥔은 이 말을 엄청난 모욕으로 여겼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로 인해 “두냐와의 파혼”이라는 결말에 다다른 그는 앙심을 품고 소냐를 도둑으로 몰아 복수하려 하지만 이 또한 실패하게 되고 결국 라스콜니코프와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모욕을 당하며 도망가게 된다.

이러한 루쥔의 삶 속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항상 품고 있던 “나는 항상 옳다”라는 마음가짐이다. 그는 계속해서 실패를 직면하고 모욕을 받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생각과 행동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이는 우월감이라는 씨앗이 자라서 맺는 가장 위험한 신념이다. 어떤 이들은 열등감보다는 차라리 우월감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우월감이 열등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 열등감이 “나는 틀렸어”라는 생각의 뿌리를 내린다면 우월감은 “나는 절대 틀리지 않아”라는 생각의 뿌리를 마음속 깊이 내리게 된다. 그래서 열등감은 도중에 자신이 심리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비교적 더 수월하게 인지할 수 있지만, 우월감은 어쩌면 평생 동안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갈 수도 있다. 만약 계속해서 자기 안에 있는 우월감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면, 실패를 직면하고 주변에서 사람이 떠나가도 변화하거나 성장하지 못한다. 과거에 성공했던 자기 자신만을 기억하면서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사라지게 되고, 결국은 패망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만약 지금까지 한 행동들이 옳은 것이 아닌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때는 열등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마치 고뇌 속에서 몸부림치다 결국 더 이상 삶을 이어나갈 것을 포기한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의 자베르 경감처럼 말이다. 이러한 열등감과 우월감의 씨앗은 비교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며,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습성이다. 즉, 앞서 말한 두 가지의 씨앗은 능력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 심어져 있으며, 다만 각기 성장하는 속도가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두 씨앗이 삶에 얼마나 뿌리내렸는지를 계속해서 경계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주목하지 않는 한,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더럽힐 것이다.




    능력주의의 다양한 한계성을 직면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능력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서로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능력도 다를 뿐만 아니라 각자가 태어나면서 마주하는 경제적 여건이 각양각색이기에, 결국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하다가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실패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성공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태어나면서부터 마주하는 선천적인 불평등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평등이란 현재로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기에 똑같은 노력과 똑같은 시간을 투자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결과를 맺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 안에서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수많은 청년들은 의욕을 잃고, 낙담하며, 불합리한 사회에 불평불만을 늘여놓고 있다.

이러한 감정의 변화를 겪는 많은 청년들을 향해 충고의 메시지를 전해주며 그들의 삶을 위로해주는 한 교수가 있는데, 바로 토론토 대학에서 인문학과를 담당하고 있는 “조던 피터슨” 교수이다. 그는 “12가지 인생의 법칙 (12 Rules for life)”이라는 책을 통해 험난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는데, 앞서 이야기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매사에 부정적인 내면의 목소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따뜻한 독려가 아니라, 합리성으로 위장한 비열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12가지 인생의 법칙 pg.136)”


그 후에 피터슨 교수는 청년들이 가진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지적했다. 우리의 삶을 성공과 실패라는 두 잣대로만 판단하기에는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런 흑백논리에서는 우리 삶의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를 잊게 만든다. 이 잘못된 사고방식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성공이 단 한 번의 게임을 통해 결정된다고 여기며, 능력이라는 것 또한 한 가지로 단정 지으려는 습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성공과 실패는 단 한 번의 게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12가지 인생의 법칙 pg.137)”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훌륭한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 모든 사람이 상위 1%에 속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한 번의 게임일 뿐이며, 만약 그 게임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면 다른 게임에 다시 도전하면 그만인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게임은 단순히 취업이나 합격 같은 큰 성취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직업, 친구와 가족,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작업 중인 예술작품, 심지어 즐겨 하고 있는 운동까지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고 있는 게임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모든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렇게 계속해서 승리만 한다는 것은 새로운 분야, 까다로운 분야에는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설령 승리는 있었을지라도 성장은 없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에 가장 의미 있는 성공은 다름 아닌 “성장”이다.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지 못한 채 열등감, 우월감, 그리고 감정의 지배를 받는 많은 사람들은 이전에 각자가 지나온 성공은 금방 잊어버리고 당장의 실패만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세상의 성공의 기준은 언제부턴가 “돈과 능력”이 되어 버렸다. 더 높은 지위, 더 뛰어난 능력, 그리고 더 많은 부가 성공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지금의 사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이어져온 사고방식이다. 이런 사회를 향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디모데후서 2장 20~21절)”


자신을 가장 쓸모 없는 존재라 여기는 질그릇은 나무그릇을 동경한다. 그리고 나무그릇은 은그릇을, 은그릇은 금그릇을 동경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릇의 재질, 즉 우리의 능력이나 경제적 형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릇의 가치는 재질이 아닌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라는 남자는 금 그릇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안에 담겨 있던 것은 불법과 욕망과 물질주의뿐이었다. 결국 그는 금이라는 재질을 가졌음에도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한 그릇이 되었고, 결국 절대 깨질 것 같지 않던 그는 “자살”로 인해 완전히 산산조각 나게 된다. 반대로 “소냐”라는 여인은 가장 먼저 깨질 것처럼 보이는 질그릇 같은 소녀였다. 가난한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팔고, 매춘부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고, 또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리자베타와 두 부모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질그릇 같은 그녀의 삶에 담겨 있던 것은 “사랑과 용서”라는 가장 값진 보화였으며, 이것이 그녀를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자기보다 더 뛰어난 재질을 갖고 태어난 라스콜니코프를 감정과 고통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시베리아에 있는 수많은 죄수들에게는 “어머니”로서 그들을 위로해주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능력이나 사회적 위치가 아닌 각자가 품고 있는 마음의 중심이다. 그렇기에 앞으로 사회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서로간의 능력의 차이로부터 오는 불평등함이 얼마나 심각한가’가 아닌 ‘각자가 갖고 있는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와 ‘그 성공을 토대로 어떤 마음을 품을 것인가’이다. 
사회의 불평등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오는 부정적인 생각은 충분히 막을 수 있으며 또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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