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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May 17. 2021

둥지

맥베스를 찾아온 욕망의 새

    16세기 유럽의 부패한 종교를 변화시키기 위해 종교개혁의 중심에 섰던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가 이러한 말을 남겼다

새가 머리 위를 지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머리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나쁜 생각이란 마치 머리 위를 스치는 새와 같아서 막아낼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나쁜 생각이 머리 한가운데 자리를 틀고 들어앉지 못하게 막을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현대사회 속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또 다양한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마음에 품은 것들이 때로는 날아가는 새처럼 금새 사라져버리지만, 때로는 마치 새가 둥지를 짓는 것처럼 마음속 깊이 자리잡기도 한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마음 속에 완전히 정착해서 마치 우리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지곤 하며, 우리는 이를 “인격”이라고 부른다. 이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짓는 뿌리가 되어 그들의 인생을 때로는 희극으로, 때로는 비극으로 몰고 간다. 이러한 것들을 여러 등장인물들을 통해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는 문학작품이 있다.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라는 희곡이다.

맥베스는 ‘욕망’이라는 새가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둥지를 트는 것까지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으며,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욕망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비극을 불러오는지,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는 과연 어떤 새들이 둥지를 트고 또 어떻게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장군인 “맥베스”는 어느 날 반란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3명의 마녀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그에게 두 가지 예언을 하게 되는데, 하나는 그가 코더라는 지역의 영주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으며, 또 하나는 스코틀랜드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이것을 듣는 순간, 맥베스의 머리 위에는 ‘욕망’이라는 새가 앉게 된다. 마녀의 예언을 통해 맥베스의 마음 속에는 왕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점차 올라오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이 예언은 어찌 보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초인적인 것이 아닌 단순히 사람의 내면에 욕망을 심어주고 그것을 자극하는 촉매제일 뿐일지도 모른다.

마녀의 예언을 들은 맥베스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그의 부인과 대화는 나누게 되고, 그 때에는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 욕망이라는 새의 둥지가 완성되고 난 뒤였다. 왕이라는 자리를 향한 탐심이 그의 내면에 가득 차 있었으며 이것이 그의 행동과 삶을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날 밤 왕을 칼로 살해한 뒤 그것을 술에 취한 경비병들에게 뒤집어 씌우면서, 결국 그토록 원하던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 이후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이전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오히려 더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자기도 왕위를 노리는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안에서 몸부림쳐야 했으며, 이는 결국 또 다른 살인으로 이어졌다. 그의 왕위에 위협이 될 것이라 느껴지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죽여나갔으며, 그들 중에는 맥베스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벵코우라는 장군도 있었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살아가던 맥베스는 어느 날 자신의 곁에 있던 아내가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게 되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자신이 등장할 때는 무대 위를 거드름 피우며 거닐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 처량한 배우일 뿐이다. 바보 천지들이 지껄이는 이야기, 요란한 소리와 흥분으로 차 있으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맥베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욕망의 새가 둥지를 틀도록 내버려둔 사람들의 인생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알 수 있다. 처음에 그들은 자신 안에 있던 욕망으로 인해 살인과 같은 악한 행동을 저지르고 이를 ‘해야만 했던 일’이라며 합리화한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자신의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것을 지키고 싶은 욕심으로 인해 자기를 방해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등 더 심한 범죄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들 앞에서는 가면을 쓰고 선한 사람의 흉내를 내지만, 그 내면은 점점 더 망가지고 결국 자기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삶. 그리고 그 끝에는 삶에 대한 허무함만이 남아 있는 삶. 이는 단순히 맥베스만의 비극이 아닌 ‘욕망이 인격이 되어버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비극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마틴 루터가 말했듯이 새가 사람의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 즉 악한 생각이 마음의 중심에 들어와 우리의 행동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막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준 “맥베스”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뱅코우라는 장군이다. 뱅코우도 맥베스와 똑같이 마녀들에게 한 가지 예언을 듣게 된다. 그것은 바로 비록 그는 왕이 될 수 없지만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말을 부정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맥베스에게 내려앉은 새가 뱅코우에게도 찾아왔지만,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는 그는 곧 바로 그 새를 쫓아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새는 한번 쫓겨났다 하더라도 금새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마녀가 떠난 이후에도 뱅코우의 내면에는 계속해서 그를 유혹하는 목소리가 찾아왔고, 이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진실이 너에게 실현된 것을 보면 내가 받은 예언도 그 실현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은가? 쉬, 이만해 두자 … 자비로운 천사들이여, 꿈 속에 뛰어드는 사악한 망상을 깃들지 못하게 해다오!”

 그는 계속해서 저항했다. 더 이상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천사들에게 그 목소리가 떠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비록 안타깝게도 그는 맥베스의 야심으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욕망의 새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그의 성품을 지킬 수 있었다.




    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동의’하는 순간, 우리의 내면에는 그들의 둥지가 지어지게 된다. 마녀의 예언을 들었을 때에, 맥베스는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했고 그들의 목소리에 동의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직접 그들을 다시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까지 했다. 반대로, 뱅코우는 예언이 머릿속에서 생각날 때마다 그것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마녀들의 예언이 그를 파멸로 이끄는 유혹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 결말 또한 비극일수밖에 없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기에, 그는 천사들에게 부르짖으면서까지 저항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유혹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목소리에 동의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 동의하는 것은 곧 내면의 둥지가 되고, 인격이 되어 우리의 삶을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욕망’ 이외에도 수 많은 감정과 생각을 직면하게 된다. 그 중에는 ‘겸손’이나 ‘사랑’과 같은 흰 비둘기의 모습을 띄고 있는 것들도 있지만, ‘교만’이나 ‘분노’와 같이 어두운 까마귀의 모습을 띄고 있는 것들도 있다. 처음에는 그러한 것들 모두 스쳐 지나가듯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중에서 우리가 동의하는 것들, 즉 우리가 지키고 보호하는 새들은 곧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을 것이다. 새들은 점점 많아지고,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서, 머지 않아 우리의 행동과 입술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의 내면에 악의 둥지가 있는 것을 한 동안 인지하지 못한 채 방치하고 살아간다면, 어느 날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하더라도 이는 단순히 새 한 마리를 쫓아내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이미 기질화된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다. 환경의 어려움을 통해 찾아올 수 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를 통해서도 만나게 될 것이다. 비록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들이 우리의 마음에 집을 짓고 한 몸이 되려 하는 것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삶을 비극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새들로부터 우리의 마음과 성품을 더 효과적으로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우리의 내면을 선한 비둘기의 둥지로 채우는 것이다. 마치 왕에 대한 충성심과 경외심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간 뱅코우처럼 말이다. 인생을 살아갈 때에 ‘겸손함’과 같은 선한 새들이 우리의 내면에 찾아온다면 우리는 그들의 둥지를 지키고 그들이 우리의 삶에 한 부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말의 뿌리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그들의 목소리에 ‘동의’해야 하는 것이다. 인격은 누군가에게 받는 것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은 받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 본질은 결국 자기 자신이 직접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새들의 보금자리는 한 사람의 인생이 희극이었는지 혹은 비극이었는지를 결정짓는 척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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