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그가 오로지 인간에게만 준 선물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 번째로, 그는 우리가 본능과 욕구에 지배당하지 않게 해주는‘이성’을 주었고, 두 번째로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던 것처럼 새로운 물건을 고안해서 그대로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창조성’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 속에서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윤리성’까지도 그는 선물로 주었다. 이성과 창조성, 그리고 윤리성을 받은 인간은 그 어떤 생명체들보다 더 빠르게 발전해서 어느새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주인이 되는 과정과 주인이 된 이후의 삶이 마냥 행복한 이야기들로만 채워져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전쟁과 약탈이라는 단어 없이 그들의 과거를 설명할 수 없으며, 지금도 인간관계로 인해 많은 이들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인간이 이러한 갈등, 슬픔, 그리고 고난을 직면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신이 그들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자 가장 특별한 선물인 ‘자유 의지’때문이다.
자유 의지를 갖게 된 인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각자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자유 의지가 주어진 사회에서는 언제나 고통이 함께한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으로 인해 각자가 걸어가는 길을 옳다고 주장하면서 남의 행복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으며, 이 길이 언제 끝나는가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이 길이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길을 걸어가다 넘어지면서 느끼는 절망과 슬픔이 인간의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다. 도대체 이런 대가를 감수해가면서까지 신이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설령 이 세상이 신의 창조가 아닌 빅뱅을 포함한 우연의 연속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에게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자유’가 진정으로 얼마나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 하나인 “한여름 밤의 꿈”에는 ‘사랑의 꽃’이라는 아주 독특한 요소가 등장한다. 이 꽃을 즙으로 만들어 자고 있는 사람의 눈에 바르면 그 사람은 잠을 깨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맨 처음의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작품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헬레나”라는 여인은 오래 전부터 “드미트리우스”라는 남자를 사랑했으며, 그를 향해 끊임없이 사랑의 고백을 전해왔다. 그러나, 이미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드미트리우스는 헬레나의 구애를 계속해서 거절했으며, 심지어는 그녀의 외모를 비하하는 발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함께 요정이 사는 숲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드미트리우스는 사랑의 꽃으로 인해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다. 이전에는 혐오하던 그녀의 외모와 성품을 찬양하기 시작했으며, 그걸 들은 헬레나는 처음에는 매우 당혹스러워 했지만, 작품의 끝에 가서는 결국 그의 구애를 받아주면서 함께 연인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한여름 밤의 꿈”을 읽다 보면 다양한 이들의 사랑고백을 보게 된다. 그 중에서 드미트리우스를 포함한 몇몇의 사람들은 사랑의 꽃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을 향해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을 전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들의 사랑고백을 들으면서 일말의 설렘이나 로맨틱함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의 모습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한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인형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 C.S. 루이스는 “자동기계-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들-의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다”라고 말한다.
기계가 아무리 아름다운 목소리와 말투로 사랑의 고백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고백이 자신의 의지로 부모의 입에 입을 맞추며 “사랑해요”라 말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모의 말은 무시하고 하지 말라는 건 더 해서 속상한 아이지만, 그런 아이가 ‘자유 의지로 표현하는 사랑’은 부모에게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귀한 보물일 것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아기들을 생산하는 장면을 연출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단지 ‘두 사람의 사랑’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일까?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고 누군가를 사랑할 생각이 없는 이들은 영원히 자유의 가치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들의 고난과 고통만을 주목하고, 그것을 허락한 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올더스 헉슬리”라는 영국의 문학작가가 “멋진 신세계"라는 책을 통해 매우 흥미로운 세상을 그려냈다. 그곳은 모든 사람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 행복한 세상이다.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아무도 질병에 걸리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 곳의 아기들은 모두 공장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머니’는 가장 수치스러운 단어일 뿐이다. 그 곳의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직업이 정해지며, 각자의 직업에 완벽히 적응하고 만족할 수 있도록 신체적 및 정신적 특성이 조작된 뒤에 사회로 들어선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즉시 느끼게 해주는 “소마”라는 알약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개개인의 심리적인 고통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혹시 무엇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소마가 기다립니다. (멋진 신세계 pg.333)”
이 책에서는 멋진 신세계를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로 묘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조지오웰의 “1984”와 함께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에 들어간다. 독자들이 “멋진 신세계”를 디스토피아, 즉 암울하고 어두운 사회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곳에 사랑과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에 연인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가 맞지 않는 면이 발견된다면 쉽게 이별할 수 있는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이해가 요구되지 않는 관계’는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멋진 신세계에는 직업을 선택하거나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책에도 이러한 사회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더러 발견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이 문명에 개화되지 않은 한 야만인이 그 곳의 간부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 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멋진 신세계 pg. 362~363)
자유라는 선물의 대가는 무엇인가? 슬픔과 이기심과 갈등과 고통과 어둠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있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과 행복의 가치를 알 수 있었고, 이기심이 있기에 이타심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서로 간의 갈등이 있기에 그것을 극복해낸 사랑의 무한한 가치를 경험할 수 있었고, 육아의 고통이 있기에 모성애의 귀함을 알 수 있었다. 삶에 어둠이 있기에 우리는 빛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에서 가장 완벽한 희극을 꼽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고민할 것도 없이 “뜻대로 하세요”라는 작품을 선택할 것이다. 이 작품을 제외한 4개의 희극에서는 주연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동안, 일부 조연들이 마음에 앙심과 분노를 머금은 채로 복수를 다짐하면서 그들의 극을 마무리했다. 혹자는 “한여름 밤의 꿈”도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지 않냐고 주장할 수 있지만, 자유를 빼앗긴 채로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원히 한 사람을 사랑해야만 하는 드미트리우스와 그 사랑을 받는 헬레나를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희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뜻대로 하세요”에서는 이전에 악역이었던 인물들까지도 참회를 하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결말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등장인물들의 행복을 되찾는 모든 과정이 오로지 개개인의 ‘자발적 선택’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도 비슷한 이유 때문에 이 희극의 제목을 “뜻대로 하세요”라 지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완벽한 희극의 시작은 다름아닌 ‘등장인물들이 자유 의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자유 의지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희극을 만들어냈듯이, 신도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아 움직이는 배우들에게 완벽한 희극의 시작인 자유 의지를 선물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순전한 기독교 pg.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