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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Apr 27. 2023

보라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신 그리고 고통1

해당 글은 원고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수정되고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구약성경 전도서 4:1)




    “사람들이 왜 신을 안 믿는 것 같아?”

   

나의 모든 여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가장 원초적인 질문이었고, 군대 훈련소에서 알게 된 동기가 위의 질문을 듣고는 잠깐의 침묵의 시간을 갖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미 세상이 지옥이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더 이상의 설명을 부탁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본 적 없는 무언가를 상상할 필요도 없었고, 더 많은 논쟁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는 대답이었고, 그제서야 나는 내가 다음으로 맞서 싸워봐야 할 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씨름해봐야 할 다음 대상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다소 지나친 낙관론자였던 나는 고통의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왔다. ‘주님께서 다 뜻이 있으실 것이다. 지금의 시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의 선물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고통은 이전에 내가 지은 어떠한 죄의 결과이고 벌일 것이다…’ 나름 그럴듯해 보이는 대답들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세상의 고통에 대한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의 참혹하고 비극적인 현실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그리고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보면서, 나는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다. 상상하기만 해도 손이 떨리는, ‘추악하다’라는 단어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이들의 범죄를 목도하면서, 자연재해로 인해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이들을 보면서, 정말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찾아온 공감하기에도 벅찬 비극적인 소식들을 전해들으면서,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의 절망과 분노와 슬픔의 눈물을 맺은 눈동자가 나의 눈과 일직선상에 이르게 되면서, 나는 또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이것도?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어째서? 왜?’


   지금도 나는 이따금씩 세상의 끔찍한 사건들 앞에서 할말을 잃어버린다. ‘다 하나님의 뜻일거야’라는 문장 정도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들이 이미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런 현실 앞에서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지전능하시다는 하나님은 고통이 그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런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지금부터 이 질문에 대하여 걸어온 여정을 다시 돌아볼 생각이다. 




   우리 개인의 삶에, 그리고 인류 전체에 존재하는 고통의 의미를 알아보기 전에, 반드시 당부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앞으로 나누게 될 모든 내용들을 부디 실제로 고난을 마주하고 있는 이들을 치유하고 위로하기 위한 글로 바로보지 않기를 바란다. 갑작스러운 고통으로 인해 끔찍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나의 대답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리차드 스윈번이 말했듯이, “그러한 이들에게 이 글을 추천하지 않는 이유는 이 장의 논점에 오류가 있어서가 아니라, 깊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논증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논증은 실질적인 고통을 즉각적으로 해결해줄 수 없다. C.S. 루이스도 그의 책 <고통의 문제>를 쓸 때에 서두에서 이렇게 강조하였다. 


“이 책을 쓴 유일한 목적은 고통이 야기하는 지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임을 덧붙이겠습니다. 꿋꿋함과 참을성을 가르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과제이지만 저는 스스로 이 일의 적격자라고 나설 만큼 어리석지도 않을 뿐더러, 고통을 겪고 있을 때에는 많은 지식보다 작은 용기가, 큰 용기보다 적은 인정(人情)이,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가장 작은 사랑이 더 도움이 된다는 확신 외에는 독자들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고통의 문제, pp.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증의 시간을 갖는 것은 개인에게 있어서 분명하게 그리고 필수적인 유익이 될 것이다. 언제까지 이 고통의 문제에 대해 눈과 귀를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한 것은, 고난이 ‘삶에 그토록 허다한 악과 고난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이 지성적인 이슈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질문은 ‘어째서 나한테 이런 시련이 찾아온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이 상황을 돌파해나갈 수 있을까?’이다. 이 두 가지의 질문은 각각 전혀 다른 영역에 있는 문제이다. 즉, 고난에 맞서기 위해서는 지성적인 준비만이 아니라 마음의 채비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지성적인 준비는 우리에게 분명한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마음에 견고한 닻이 되어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붙들어 줄 것이다. 그래서 “지성적인 준비가 탄탄하다면 역경이 닥친다 해도 나가떨어질 만큼 큰 타격을 입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고난이 닥치면 머리로 아는 사실과 마음의 창고에서 꺼내 쓸 수 있는 자원 사이에 간격이 크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고난을 헤쳐 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라도 주님은 그 지식을 현실화시키고 새로운 방식으로 의미를 갖게 하신다.”


   엘빈 플란팅가는 스스로, 혹은 가까운 누군가가 시련을 겪고 있을 때에는 철학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목회적인 보살핌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처음 접했던 당시에 신학생이었던 존 페인버그(John S. Feinberg)라는 사람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신 이유를 설명해 주는 지적인 답을 가지고 있다면 고난을 당해도 불만스러워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가 대학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자리에 올라간 뒤, 그의 아내가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되고, 그것을 시작으로 그의 온가족에게 시련의 구름이 몰려왔다. 물론 그는 ‘머리로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욥기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고, 시카고 대학 박사학위 논문에서 악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룰 정도로 고통에 대한 지적인 답안들을 훌륭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향해 일부러 못된 장난을 치고 계신다 느꼈고, 그러는 와중에 그의 모든 지적인 답들은 그가 느끼는 감정에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다섯 살 된 딸을 잃은 부모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번 일을 통해 당신들이 주님을 더욱 붙들고 그분만을 더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이 시간을 지나고 나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훨씬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라는 소리부터 해야겠는가? 아마 그랬다가는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맹령하고도 눈물을 머금은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시기에 부모한테 ‘영적인 교훈’을 주시려고 죄 없는 어린아이를 희생시킨단 말입니까!” 물론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뜻과 간섭을 벗어나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으며, 어떠한 열악한 환경이 찾아오더라도 그 너머에는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궁극적인 선이 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어린 자녀를 영원히 떠나보낸 부모에게 처음으로 꺼내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설령 그것이 그들을 도와주고 치유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가장 먼저는 부모의 애통하는 마음을 위로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성경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생때부터 성경의 엘리야 선지자를 정말 좋아했다. 특히, 어릴 적에는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850명의 선지자들을 상대로 갈멜산에서 대결을 하고, 또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승리하면서 마침내 이스라엘 전역에 단비를 내리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그를 동경하곤 했었다. 그런데, 성인이 된 이후에는 다른 이유로 그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어릴 적 나는 그가 정말 완벽한 선지자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러한 그의 삶 속에서도 우리처럼 완전히 쓰러지고 무너지는 순간이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을 때 나는 한편의 동질감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 속에 놓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일으키시는지를 배울 수 있어서 더 큰 감동이 되었다.


   엘리야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사역을 감당해왔다. 그래서 비록 그가 정말 대단한 선지자였고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 고되고 지치는 사역에 대한 압박감이 분명 그를 계속 짓누르고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던 비를 내렸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엘리야와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심지어 그 당시의 왕비였던 이세벨은 그에게 사신을 보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를 죽이겠다고 선언한다. 이 모든 시련 앞에서 결국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엘리야가 주저앉는다. 아무도 없는 광야로 홀로 들어가, 자신의 키정도 높이밖에 되지 않는 작은 로뎀나무 아래에서 그가 신뢰하던 하나님께 그의 모든 고통을 토로했다.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왕상 19:4) 그리고는 나무 아래에 고단한 몸을 누이고 깊은 잠에 빠진다. 


   그는 선지자였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였고,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등불은 당장이라도 꺼질 것만 같았으며, 눈 앞에 다가온 시련과 스트레스때문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더이상 “오직 주님 안에서 기뻐하겠노라!”라고 고백할 힘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믿는 하나님을 향하여 더 이상 그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엘리야를 향해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신다. 그런데, 그 천사가 그를 찾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밥을 지어 먹였다.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이 이르니라(왕상 19:5-8)


   하나님은 실의에 빠진 이 남자에게 천사를 보내 어떻게 하셨는가? “회개하라! 어떻게 내게 소망을 두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이냐!”라고 다그치셨는가? 아니다. 그럼, “기뻐하라! 내가 좋은 소식을 가져왔노라!”라고 강요하셨는가? 아니다. 무언가를 캐물으셨는가? 그것도 아니다. 천사는 단지 어루만졌다. 그를 잡아 흔들지 않았다. 반가운 이에게 인사하듯, 다정하게 다독였다. 그러고는 밥을 짓고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힘을 내렴. 그래야 가던 길을 계속 가지.” 엘리야를 조금 더 재우고 나서 다시 밥을 먹였다.


   하나님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엘리야를 향해 처음으로 하신 일은 비난이나 권고도 아니었고, 논증이나 해명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선지자이기 이전에 남들과 똑같은 인간이고, 그들과 같이 지치고 탈진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런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휴식과 음식, 따뜻한 어루만짐과 위로였다.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이유 모를 공허함, 미래에 대한 두려움, 내가 잘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 죄책감과 같은 수 많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우리를 괴롭힐 때에,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고통의 문제를 논하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점이 한 가지 있다. 절대로 기독교는 슬픔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억제해야 할 감정’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눈물을 자연스럽고 선한 것으로 여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고통과 슬픔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의 품 안에서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아픔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지금의 교회 공동체가 신자의 눈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성경은 분명히 “애통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의 시편을 보면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고 그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시편 44편 기자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주님, 깨어나십시오. 어찌하여 주무시고 계십니까? … 어찌하여 얼굴을 돌리십니까? 우리가 고난과 억압을 당하고 있음을 어찌하여 잊으십니까?” (시 44:23-24, 새번역) 심지어 욥기와 전도서는 삶의 부당한 고통과 실망을 토로하고 또 성찰하기 위해 쓰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욥기는 고난을 당하는 욥의 한탄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통의 시간 동안, 그는 비명을 지르고 자신을 저주했으며, 끊어지지 않는 고뇌로 인해 하나님을 향하여 격분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욥을 보면서 그의 지적이 옳았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인정하셨다(욥 41:7). 


   나는 이 점이 너무나도 의아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길 욥은 누구보다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였다. 그런데, 나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보면 욥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욥기를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욥이 겪은 고난의 시간을 나는 단 1%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그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부정하고, 시종일관 쓰디쓴 불만과 절절한 회의를 표출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행동을 믿음의 본보기로 삼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믿음의 본보기로 삼길 바라고 계신다. 어째서일까? 팀 켈러 목사는 하나님께서 욥의 흔들리지 않는 단 하나의 자세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욥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불만을 쏟아 내긴 했지만 하나님께 토로했다. 의심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의했다.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쳐 댔지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였다. 제아무리 고뇌가 깊어도 쉬지 않고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끊임없이 주님을 찾았다.
하나님은 마침내 욥이 이겼노라고 하셨다. 그렇게 슬퍼하고, 노하고, 의심하는 걸 지켜보시고도 여전히 “네가 이겼다”라고 말씀하시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욥의 행위가 다 괜찮아서, 그러니까 욥의 마음과 동기가 늘 합당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얼굴과 임재를 찾은 욥의 근성은 고난을 통해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 가까이 나가게 되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왜 이리 고통스러운 것인가, 하나님은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철학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접근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 모든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진 마음을 갖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를 논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한다. 걱정할 필요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는 우리의 절박함을 오래 참고 지켜봐 주신다. 그러니 개인에게 찾아온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위로가 사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무너졌을 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은 그저 휴식과 위로를 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어느정도 고요해지고, 고통에 의한 격분으로 뜨거워졌던 그의 마음이 식어진 뒤에, 하나님은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그와 대화하기 시작하셨다. 이제는 천사가 아닌 하나님이 직접 임하셔서 그로 하여금 절망에서 빠져나오도록 그를 도전시키셨다. 그에게 질문을 던지시고, 그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시고, 그 끝에는 엘리야가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어떠한 오류가 있었는지를 짚어주시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계획을 공유하신 것이다. 욥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눈물의 시간을 지난 뒤에, 하나님은 욥에게 직접 나타나셨고, 그가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본질을 보여주신다. 그리고는 마침내 욥이 스스로 회개하는 데까지 인도하신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 보고 들으면서 깨달았던 것들이 정말 완전히 새로운 깨달음이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엘리야와 욥이 ‘실수하지 않으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눈앞에 다가온 현실의 아픔때문에, 그 진리를 의심하고 부정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위로하신 뒤에 직접 그들과 대화하시고, 그들이 지금껏 신뢰해왔던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를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욥은 그의 고통의 여정 끝에 이렇게 결론짓는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5)


   C.S. 루이스가 한 말 중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말이 있다. 


참으로 위대한 도덕 선생들은 새로운 도덕을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가짜나 괴짜들이나 새 것을 소개하는 법입니다. 존슨(Samuel Johnson) 박사 말처럼 “사람은 가르쳐야 할 때보다 기억시켜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귀로 듣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이전에 배운 것을 기억하는 시간일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게 되는 새로운 배움의 시간도 될 것이다. 부디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롭게 얻은 지혜와 지식이 먼 훗날 마음의 창고에도 쌓이기를 기원한다. 이 배움의 여정이 먼 훗날 고통의 파도가 몰려와 우리를 흔들 때 배를 붙잡아 줄 수 있는 하나의 닻이 되어줄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전하며,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깊이 생각하라! 속에서 기쁨이 솟아날 때까지, 다가올 영광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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