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전역하기 전에 쓴 마지막 글
이제 난 시간 여행을 하지 않는다. 단 하루조차도.
그저 내가 이날을 위해 시간 여행을 한 것처럼,
나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완전하고 즐겁게 매일 지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우린 우리 인생의 하루하루를 항상 함께 시간 여행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멋진 여행을 즐기는 것뿐이다.
-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 -
한 초등학생 아이와 그의 아버지는 매주 주말이 되면 함께 동네에 있는 작은 산에 올라갔다. 아버지는 산을 오르며 아이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진다. 아이는 아버지의 질문에 나름 성심성의껏 대답한다. 그저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면 아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버지께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아이는 단 두 개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산을 오른다. 하나는 산 꼭대기에 도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아버지가 사주기로 약속하신 햄버거 세트를 기필코 받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와 매주 산을 오르던 초등학생은 어느새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었고, 이제는 동네에 있는 작은 산이 아닌, 현실이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산은 어린 시절 30분이면 거뜬히 정복하던 동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파르고 위험했다. 몸은 커질 대로 커졌지만, 마음은 반대로 지칠 대로 지친 이 청년은 마침 그의 옆에 나무 그루터기가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위에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한다. 쉬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오로지 먼지로 뒤덮인 신발을 향한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빨리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뿐이다. 그런 고민을 하던 와중에, 갑자기 그는 그 고민 자체가 과연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을 진지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내가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나는 실패자가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노력과 수고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나저나, 나는 무슨 목적으로 이 산을 오르고 있는가? 꼭대기에 도달하는 것? 만에 하나 천신만고 끝에 정상에 도착했다고 치자. 그 뒤에는 뭐가 있지? 그때부터는 이제 내려오는 것 밖에 남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과연 그 정상에 도달하는 것만 바라보면서 이 산을 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제서야 아이는 그가 하는 것이 경주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그를 동산에 데려가셨는지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시선은 언제나 정상이 아닌 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한 남성의 후원을 받아 대학생활을 하게 된 주디 애벗이라는 여학생이 있다. 그녀는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그 아이가 놓친 거의 모든 진리를 진작에 발견했다. 부모님과의 기억도 없이 평생을 고아원에서 자란 그녀였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그 남성의 후원에 대한 답례로 4년에 걸쳐 꾸준히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4년간 쓰여진 그녀의 수 십 통의 편지는 매번 다른 어투와 다른 방식 그리고 다른 감정으로 그에게 전달되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그녀의 편지를 읽다 보면 그녀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더 정확히는 그녀가 얼마만큼 성장했는지와 크게 상관없이 그녀의 거의 모든 편지들 속에서 공통되게 느껴지는 그녀만이 가진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행복이었다. 그 행복은 그녀가 학교에서 어떤 것들을 배웠는지, 친구와 어딜 가고 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표현들 속에도 너무나도 잘 스며들어 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느낀 그녀는 이 행복을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도 꼭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편지에 직접 그녀가 그 행복을 얻게 된 비결을 설명한다.
8월 25일
… 아저씨, 스티븐슨의 이런 생각은 멋지지 않아요?
“세상은 수많은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 우리 모두는 왕만큼 행복해야 한다.”
정말 그래요.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서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갈 만큼 충분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이 다가올 때 그저 잡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 비결은 마음을 착하게 가지는 데 있지요. 특히 시골에서는 즐거운 일이 아주 많답니다. 아무 땅이나 걸을 수 있고, 마음껏 경치를 구경할 수도 있고, 아무 개울에서나 물장구를 치며 놀 수 있어요.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마음껏 즐길 수가 있지요.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말이예요.
1월 11일
…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을 경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달려가느라 주변의 아름답고 조용한 경치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지요. 그러다가 문득 늙고 지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목적지에 도달하든 못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저는 차라리 길가에 주저앉아 작은 행복을 많이 쌓을 거예요.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말이예요. 저만큼 훌륭한 여성 철학자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그녀에게도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이라는 인생의 목표, 다시 말하자면 전 생애에 걸쳐 도달해야 할 정상이 있었다. 인생의 목적지가 없는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본 회퍼 목사가 말한 것처럼 무언가를 바라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누구든지 마음에 소원을 품고 살아가야만 삶에 의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원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간다. 비록 많은 소원을 성취하지 못했어도 완성된 삶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들은 어떤 삶이 하늘의 뜻인지 고민하며 살아간다. 자신이 어떠한 목적으로 창조되었는지,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런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창조되었고, 완전히 행복한 사람은 ‘나는 이 땅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었노라’라고 스스로 말할 자격이 있다.”
10년 전,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동산에 올라갔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 길을 아이와 함께 걸어가며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이 사실을 10년이 지나서야 깨달은 아이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그제서야 보이는 신발 오른편에 핀 아주 작은 야생화, 그제서야 들리는 새들의 찬란한 독백, 그리고 그제서야 제대로 다시 마주한 아버지의 두 눈. 10년 전에 동산을 함께 올라갔던 아버지,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아이의 곁을 지켜주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와 드디어 눈이 마주친 아이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 눈물은 분명 사랑과 밝음을 밖으로 흘려 보낸 것이리라.
이제서야 아이와 두 눈을 마주하게 된 아버지는 그의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아이야. 이제 일어나 다시 걸어갈 시간이다.” 여전히 어리고 미숙한 아이는 흐르는 사랑을 닦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그루터기에서 일어난다. 변한 것은 단 하나, 아이의 시선 뿐이다. 먼저는 아버지를 본다. 그 뒤에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본다. 비록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지만, 끝내 그들은 결국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 마지막으로, 아이는 저 아래에 주저앉은 한 사람을 본다. 어린아이는 이제 정상이 아닌 그 한 사람을 향해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