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그것이 재미있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을 관찰한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놓고 가만히 밖을 보면서 사람들의 표정, 몸짓, 걷는 걸음 등등 여러 가지를 본다. 수험생 때 고시원 아르바이트하면서 겪은 감정과 경험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기점으로 여러 곳을 다니고 여러 사람들을 관찰,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취약한 부분과 맞닿아 있는 곳을 위주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경험하기 시작했다. 사람, 공간, 생각 등등 여러 가지 것을 보면서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그랬다.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어느 순간 사람들의 흐름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여러 가지 정보가 들어온다. 원하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감정이 들어오는 느낌이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그것이 분류되고 연결되고 순서를 포착하고 예외를 인지하면서 통합하게 된다.
제3의 눈이라는 게 뭘까? 사전적 정의로는 아래와 같다.
> 현대적 해석 : 자기 성찰, 고차원적 사고, 내면의 눈
" 나는 제3의 눈이 열린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미친놈이다. 확실한 건 만약 그거와 비슷한 게 작용이 되었다면 스스로에게 양날의 칼이다. "
사실 위의 내용도 순화해서 쓴 거다. 더 깊게 쓰고 싶은데 그러기에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딱 이정만 쓰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은 출신 대학교로 인간을 분류한다. 우리는 이것을 편견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연 편견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대학이 전부는 아니다. 절대로 그것이 기준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냉정하게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방법이다. 사람들은 리스크를 줄이려고 한다. 그것은 누구나 동일하다. 그러면 오랜 시간 사회와 대다수 사람들의 인식이 합쳐진 결과물이라면 신빙성 있는 자료가 되는 거다. 편견이라 치부하는 그것을 누구나 인정하기 싫지만 일을 하다 보면 인간을 겪으면서 그것이 유의미하다는 것 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에 근본적 차이는 인간에 따른 차이가 맞고 어떤 형태의 차이라고 본다.
# 본론 10가지 항목 범주화 #
범주 / 항목
인지 결핍 / 사회 동향 무관심, 역사적 통합 사고
부족, 철학적 사고 부족
자기 인식 부족 / 자기 관찰 회피, 에너지·노력 총량
인식 부족
전략 부재 / 전략 없음, 단계적 수행 계획 없음,
방법 맹신
감정 중심 판단 / 감정 우선, 타인 시선 과도한 의식
타인 의존 / 정보 분석 위임, 판단 위임, 실패 시
외부 탓
# 위 결과를 8가지 항목 범주화#
범주 / 항목
행동 역량 / 인식적으로 높은 집단이 반대
성향의 행동, 전략적 선택 가능성 높음
성과와 과정의 연결 / 입결과 과정의 상관성, 학점보다
전략 중요
사회적 구조 / 인간 구분 방식, 통계화와 편견
연결
세대별 적용성 / 40대까지 일치성, 50대 이상 변수
증가
70년대 까지 다양성은 인간과 환경의 기반한 범주이고 80년대 태어난 사람들에 다양성은 욕망을 소비하는 인간범주이다. 즉 한쪽은 환경과 인간에 기반하였기에 사회적으로 인간 자체가 정량화 형태가 아니었고 다른 한쪽은 욕망의 소비형태라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인간이 정량화 형태라고 봐야 한다. 결국 서로가 다양성을 말해도 전혀 다른 다양성을 말하는 거다.
이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냐면 1990년 처음으로 한국은 원조를 받은 국가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즉 x세대까지는 중고등학교 시절은 가난을 보편적으로 경험 한 마지막 대한민국의 세대인 것이다. 80년대 태어난 세대부터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들부터는 가난은 소수의 형태가 돼버렸다. 즉 보편적인 가난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시작된 것 이 고 그것이 2025년까지 이어져 온 거다.
본질적으로 다양성을 논 할 수 있는 세대는 사실상 X세대 까지다. 대한민국에서 인간은 다양해라고 말하는 다양성을 논하는 세대는 여기가 마지막이다. 사회가 변동이 많았고 발전 속도가 하루가 다르던 마지막 성장기였다. 반대로 80년대부터 태어난 세대는 사회가 촘촘해지고 정형화된 틀에서 국가가 인간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다. 다양성은 본질적으로 다양해서 그런 게 아니라 욕구의 소비 성향으로 다양해진 거다. 기본적으로 다양한 인간들이 아니다. 범주화되었고 체계화된 틀에 인간들이다. 아마도 시간에 양상에 따라서 그것은 2025년 강화되었을 거다.
시스템이 완성이 점점 되어 가고 있는데 인간이 다양하다? 그것은 인지 부조화이다. 생각해 보면 X세대 까지는 집단을 강조하는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니까 더더욱 구성원이 다양하다는 거다. 하지만 80년대생 ~ 현재 2025년생은 세상은 다양하고 사람도 다양하다 하며 예외적인 부분을 강조하며 주장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정형화된 틀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다양한 게 아니다. 예외를 말하기에 그 변수가 상당히 미비하다.
분명 지금도 예외가 있다. 하지만 그 예외는 사실상 전체에서 미비하다. 예외를 논하기에 각 개인의 독자성이 어느 정도 거의 완성된 시스템에서 구현된 개인이어서 예외를 변수로 넣으면 그건 호도하는 거다. 예외는 가난이 대세인 세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유의미한 고려적 변수이다. 여기서 가난은 시대적 보편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다. 정형화된 틀에서 길러진 인간은 스스로 성장하기보다는 시스템에 위탁을 하여 성장을 한 거다. 하지만 가난이 대세인 시대는 그 시스템의 작동이 미비하여 스스로 성장하는 유형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80년대생부터는 일반적으로 독자성 만을 강조하는 건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거다.
현 주류 부모세대인 70년 대생들이 말하는 다양성을 당신들의 자녀에게 적용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내용들이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나 욕구의 소비 양상의 따라 다양성을 운운하는 건 다양성이 성립이 될 수 없다. 그래서 70년대 세대 까지는 다양하기 때문에 하면 되는 구조였다. 반면에 80년대 생이 대학을 졸업할 초기 시점부터, 2005년 ~ 현재 까지는 살아남을 려고 소비적인 다양성이 아니라 본질적인 다양성을 추구해야 하는 거였다.
결국 다양성은 소비적인 게 아니라 성장과정에서 시스템에 맡겨진 의존적인 인간이 아니라 정신적, 환경적 모든 면에서 독자성을 구현하고 동시에 외부적이고 구조직인 사회변화가 맞물리면서 형성된 그것이 다양성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욕구의 소비적인 측면의 다양성을 다양하다고 하는 것 은 과도한 상대성 만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의 과도한 욕망 추구를 인정해 주는 근간이 되어버리며 자칫 사회를 붕괴시키는 주요한 원인으로 가는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생긴 이래 가장 황금기 세대라고 생각한다. 낭만도 넘치고 꿈도 넘치고 구성원의 다양성도 넘친다. 물론 모든 세대는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세대보다 낭만이 넘치는 세대는 없다. 학창 시절은 대체적으로 한국이 가난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주 빈곤의 세대는 아니었다. 낭만도 있었고 민주화가 된 첫 시점에 대학생이 되었으며 사람들의 활기가 넘치던 시점 있었다.
1997년은 이들에게 해당 사항은 없었다. 40년대 ~ 60년대생 초반 정도가 금융위기에 정리해고 대상이 이었으며 사실상 x세대는 그해 금융 위기 시기기준으로 두해 정도가 취업난을 겪은 거다. 냉정하게 취업과 금융위기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단지 자신들 전 세대보다 비교하여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거다. 아마도 그 당시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초중고 자식을 뒀 던 가장들이다.
관리자 포지션을 정리해고를 통해 회사를 정상화를 시킨 다음에 금융위기를 살짝 지나고 그 당시 정리해고를 당한 사람들에 자리와 새로운 성장 동력을 구축하면서 일자리가 생긴 자리로 동시에 취업문이 열렸다. X세대는 취업을 하는 데 있어서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에게 불 취업은 느끼지 못 한 감정이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시기부터 문재인 대통령까지 부동산으로 자산을 축적 한 세대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도 사실상 이들은 잘 비껴갔다. 이미 한국 사회는 산업이 고도화된 상태여서 신입에 대한 수요가 확 줄었다. 더군다나 97년 많은 기업들이 사라져 사기업 시장에 취업은 닫힌 지 오래였다. 그 당시 X세대는 관리자 포지션 있었다. 산업의 시기상 더 이상 정리해고 대상자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지난 세대보다 그런 면에서 완전하게 행운이었다. 이러한 우연의 상황들을 기반으로 그들은 자녀교육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세상에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자식 세대가 현재 Z세대이다.
M세대는 2008년 기점으로 취업문 박살이 나면서 사실상 결혼을 반이상 안 했다. 또한 부모를 더 이상 의무적으로 모시지 않는 세대가 되었으며 3포, 4포, 5포.... 그렇게 시작을 한 세대였다. 동시에 히키코모리와 캥거루족이 탄생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많은 분야에서 여성할당제와 여성 가산점 제도를 광범위하게 실시한 세대기도 하다. 반면에 남자에 대한 지원은 아무것도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 중 결혼을 한 남자들은 불과 현재 기준으로 3년 전에 가장 많이 했을 거다.
또한 남녀 갈등이 극에 달한 세대이다. 여자들은 남자키 180 이하 루저 발언, 수억의 연봉과 집을 아무렇지 않게 요구하고 김치녀, 된 장녀 신드롬을 일으켰으며 페미니즘에 전염되어 여자는 뭐든지 할 수 있다며 권리는 주장하였으나 의무를 부인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세대였다. 하지만 강력한 취업난은 남자들은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고 여자들은 나이 많은 X세대 남자들에게 자발적으로 시집을 갔다. 이맘때 동탄녀라는 용어도 생겼으며 이들이 퐁퐁남 현상을 만들어낸 주역이기도 하다.
Z세대들은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부모를 모신 다는 의무감은 더 없을 거다. 직전 세대보다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더욱 붙잡는다. 사실 80년대 태어난 사람들부터 다양성이 사라진 세대다. 규격화된 시스템에서 길러진 세대다. 아무튼 이들이 앞으로 부모인 X세대와 갈등은 심각한 사회 현상을 불러일으킬 거라 본다. 어쩌면 X세대는 곧 닥쳐올 4차 산업으로 인한 변화와 인구 감소 문제가 가장 이들에 위기다. 현재 가진 집도 사실상 팔지 않으면 자산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80년대 중반생들부터 남자 미혼율은 50프로이고 여자 미혼율은 35프로다.
즉 자녀가 있는 사람이 x세대보다 거의 없다. 그것은 곧 부동산의 몰락을 암시하는 거다. 자신들이 은퇴하는 그 시점부터 시장에 매물은 쏟아질 거고 성장 동력이 사라진 한국사회는 저성장으로 진입했다. 자녀들의 취업은 더욱 불투명해지고 자녀들 또한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큰돈이 아니면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X세대는 가장 지금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확실하게 서술해야 한다. 이 세대 구별은 거의 남자를 기준으로 한다. 대부분 한국에서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많은 여자들이 부의 불평등을 결혼을 통해서 해결했다. 세계에서 결혼으로 부의 분배 1위로 이뤄진 기현상이 벌어졌다. 즉 경제 주체가 남자라는 것이다. 물론 X세대 중간 까지는 아직 차별의 잔재가 남았지만 대부분 그 이후에 여성들은 교육적으로 불평등을 겪지 않았으면 유리천장은 사라진 단어가 되었다. 현재 지표를 보면 추정이 가능하다.
# 대학 전공 선택 성향 (2023년 기준) 교육부 #
성별 문과 계열 선택률 이공계 계열 선택률
남성. 약 35~40% 약 60~65%
여성 약 70~75%. 약 25~30%
# 남녀 대학 진학률 비교 (2021학년도 기준) #
성별 대학 진학률 (전문대 포함)
여학생 81.6%
남학생 76.8%
그럼에도 남자의 경제력에 기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직장은 사회를 탓하며 언제든 그만뒀고 스스로 남자와 결혼 한 즉시 1~ 2년 후 그만두는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자녀가 없거나 혹은 1 아니면 많아야 2인 데 그것도 유치원 들어가는 시점을 지나도 스스로 재취업을 하지 않는다. 사회 탓을 하기에는 스스로가 기본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한 거다.
가부장제도에 남자가 온전하게 책임지는 장점과 민주주의 시대에 여성, 시민, 국민의 권리를 온전하게 취하며 의무를 거부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실제로 많은 드라마가 맞벌이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쇼프로에서도 맞벌이 많이 한다고 포장하지만 실질적으로 여성 취업률은 20프로가 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정량인 결과를 놓고 여성단체는 차별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살펴보면 그들의 자발적 선택이다.
히키코모리의 대략 75프로는 여성이며 쓰레기 집 현상도 여성이 주다. 하지만 TV는 혼자 사는 남자들을 타깃으로 한다. 이것은 방송국 작가들이 여성이기에 그들의 농간이다. 여론을 호도하고 없는 사실을 마치 있다는 것처럼 만들어내는 상업적 조작이다.
# 쓰레기 집 증후군#
> 내 용 : 주요 연령대 20~30대 청년층
성별 비율 : 여성 약 90% (청소업체 증언 기준)
주요 원인 : 우울증, 번아웃, 정서적 고립, 사회적 비교, 역할 갈등 등
직 업 군 : 인플루언서, 아나운서, 대기업 직원, 방송국 PD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도 포함됨
# 히키코모리 비율 #
> 수치 및 내용
전체 추정 인구 : 약 30만~40만 명
서울시 청년층 은둔 비율 : 약 4.5% (12만 9천 명)
전국 청년층 은둔 비율 : 약 2.4% (국무조정실 2022년 조사 기준)
성별 비율 : 여성 72.3% (보건복지부 자료 기준)
주요 원인 : 정신 건강 문제, 취업 실패, 사회적 고립, 가족 갈등 등
# OECD 맞벌이 비율 #
> 맞벌이 비율 (%) 설명
중국 76% 세계 최고 수준
베트남 74% 높은 여성 경제활동률
미국 65% 맞벌이 문화 정착
일본 58% 한국보다 높음
> OECD 평균 약 60~65% 자녀 유무에 따라 다름
한국. 48.2%
2023년 기준, 유배우 가구 중 맞벌이 비율
# 몇 년 전만 해도 맞벌이 비율이 낮았음 통계 조작 의심 #
> 기준의 차이
맞벌이 통계는 “한 달에 하루라도 수입이 있으면 취업으로 간주”하는 경우.
즉, 파트타임·단기 알바·재택근무 등도 포함되기 때문에 실제 체감과 다를 수 있다.
> 통계의 발표 방식
정부나 기관은 긍정적인 수치를 강조하는 경향.
실제: 20프로 예상.
> 미디어의 포장
드라마나 예능에서 “맞벌이 부부”를 당연하게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한쪽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음.
이런 이미지가 현실과 통계를 더 괴리함.
> 결혼 전 임금근로자였던 여성 중 결혼 후 퇴직한 비율 58.2% 김우영 교수 연구 (공주대)
- 이것도 3000명 여성 대상이어서 신빙성이 낮고 실제로 더 높다고 봐야 한다.
- 임신, 육아를 언급했는데 실제 출산율이 0.75 정도인데, 실제보다 올렸음.
- 출산 - 육아를 언급해서 퇴사했다는 논리는 말이 안 된다.
- 정확하게 어떤 사유에서 퇴사를 했는지는 언급 않음.
- 회사의 압력이라는 것으로 말하는데 사실 어디든 강제로 자를 수가 없는 구조.
>>>> 위에서 언급한 수치도 더 실제로 높고 사유도 자발적 퇴사인데 조작될 가능성이 높다.
> 혼인 상태별 남성 고독사 및 자살 비율
혼인 상태 고독사 비율 자살 비율 (고독사 중)
미혼 남성 낮음 (전체 고독사 중 비중 적음) 20대: 약 59.5%, 30대: 약 43.4%
이혼 남성 높음 (50~60대 고독사 중심층) 50대: 약. 14.1%, 60대: 약 8.3%
혼인 유지 남성 가장 낮음 자살률도 상대적으로 낮음
>>>> 실제 통계기반 현실
- 2023년 전체 고독사 사망자 중 남성 비율은 84.1% → 여성보다 5배 이상 많음
- 50~60대 남성이 전체 고독사의 53.9% 차지 → 이 연령대는 이혼·사별 후 고립 상태가 많음
- 혼인 유지 남성의 고독사율은 낮은 편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배우자와의 실질적 관계 유지 여부를
반영하지 않음. 즉, 법적 혼인 상태만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실제 고립된 혼인남성이 통계에서 누락
될 수 있음.
> 투잡 이상 병행 비율( 2025년 조사 결과 (일자리 앱 ‘벼룩시장’ 조사: 한국경제보도)
항목 비율
성인 남녀 중 아르바이트 경험 있음. 60.5%
본업과 병행하는 투잡족. 63.7% (아르바이트 응답자 중)
전체 성인 기준 투잡 이상 병행자 약 38.5%
투잡 이유 1위 본업 수입만으로 생활 어려움 (40.6%)
> 남녀 투잡 병행 비율 일자리 앱 ‘벼룩시장’이 성인 남녀 1,29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성별 투잡 병행 비율 (본업+아르바이트)
남성 약 41.2%
여성 약 35.8%
전체 응답자 중 60.5%가 아르바이트 중이며, 그중 63.7%는 본업과 병행하고 있다고 응답.
# 성가족부가 발표한 「2024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에 따르면 #
성별 월평균 실근로시간 잔업 경향
남성 164.4시간 여성보다 잔업 비율 높음
여성 148.2시간 남성보다 잔업 비율 낮음
어쨌든 빠른 경제 발전과 민주화가 불러일으킨 괴현상의 결과라고 본다. 이것이 오늘날 남녀 문제의 근본적 문제다. 모든 걸 다 취하려는 여자들의 욕망 말이다. 시대가 변하고 남자들은 변했는데 아직도 그들은 가부장제 시대를 스스로 도입해서 여성이 누릴 수 있는 부분은 누리고 싶은 욕망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은 통하지 않는다. 최근 30대 여성 미혼율이 극에 달하고 있다.
>>> 남성 미혼율 여성 미혼율
30대 약 50%. 약 33%
40대. 약 24% 약 12%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절대 줄지 않을 거다. 연애는 여자가 선택할 수 있으나 법적인 결혼은 한국에서 온전하게 남자 책임이 되는 구조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혼인을 선택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 어떤 남자도 한국여성들의 눈높이 법적 혼인 요구를 맞춰 주지 못한다. 이것을 부인하면 눈을 가리고 코끼리를 만지면서 까마귀라고 하는 거와 같다. 이제 각자도생의 시대다. 결혼도 다 시기가 있다. 즐기다가 혼인? 남자든 여자든 그건 불가능하다. 그러한 말을 당연하게 하는 건 이혼을 가정한 거랑 다를 게 없다. 즐기다가 다 늙어서 무슨 결혼인가? 세상에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건 없다.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한국 여성들 스스로 기형적으로 상승한 욕망을 내려놓지 않으면 스스로 자멸할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이미 그 과정을 예전에 증명했다. 가부장제도에 남자가 경제적으로 다책임지는 장점과 민주주의에 여성, 시민, 국민으로서 권리만 원하고 의무를 버린다면 멸망에 길을 가는 거다. 건전한 비판을 여성 혐오로 몰아가는 것 은 스스로 더 이상 대화를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나아질 게 없는 거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2008년 경제위기 가 터지고 신규 인력 시장은 박살이 났다. 산업의 고도화로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여 교육하는 비용이 전보다 생산성이 떨어졌다. 또한 경제위기로 그 현상은 더 중첩적으로 발현되었다. 80년대 태어난, 물론 X세대와 살짝 겹치는 시기는 감안하고, 이 시기 남성들은 경제위기로 공장, 공사장, 고시원, 배달 등등 전부 사라졌다.
반대로 이 시기 여성들은 X세대 남성들과 혼인을 통하여 취업난을 해소하였으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전혀 꺼려하지 않았다. 국가는 여성 취업을 장려한다고 이들을 위하여 가산점과 할당제를 강제로 실시하였다. 그렇지만 결혼 후 1년 혹은 2년 차에 직장을 육아를 핑계로 그만두고 실질적으로 근로를 기피하였다. 출산율은 낮기에 이들의 근거는 전혀 성립이 되지 않는다.
M세대의 여성들은 가부장제도에 남자 중심 경제구조를 선택하고 단점은 거부하고 민주주의 제도에 인권 그리고 여성, 시민, 국민으로서 권리는 선택하고 의무는 버리는 선택적 민주주를 실시하였다. 된장녀, 김치녀 등등 사회적인 신드롬을 일으켰으며 " 180 이하 키는 루저 "라는 라는 말은 대표적인 망언이다. 남자에게 수억의 집과 억대 연봉과 집을 공공연하게 요구하였다.
워홀, 원정 성매매, 유학녀 신드롬도 일으켰으며 명품과 해외여행에 대한 소비도 강하였다. 이 시점이 지나 페미니즘이 동시에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극단적 성향에 물질주의와 비혼주의를 지향하였다. 처음에는 참신한 기회를 찾는 방법으로 제시된 "욜로"라는 사회 신드롬은 점점 여성들의 물질주의를 가중시켰다. 결국 이들의 선택은 경제위기 이후 x세대와 결혼을 하면서 나타난 현상이 " 동탄녀 "이다.
M세대는 경제위기와 구조적으로 취업난을 겪었고 그들이 88만 원 세대로 불렸다. 국가의 노골적인 여성 우대 고용 정책은 M세대 남자들을 강제로 벼랑 끝으로 던져 넣었다. X세대 남성들은 당시 사회의 중간 관리자로서 위치하였는데 그 어려움을 노골적으로 방관하고 무시했다. M세대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쾌락적 성향이 강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다. 그래서 이 시기 여성은 M세대에 속하지만 실질적으로 M세대에 속하지 않는 X세대와 걸쳐 있었다.
X세대와 나이 많은 혼인을 선택한 M세대 여성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우월한 도취감을 느꼈을 것이라 추정한다. 가부장적인 왜곡된 성인식이 작용하면서 당시 시대의 구조적인 경제, 사회문제와 국제적인 상황과 문제를 진지하게 이해하지 않거나 그럴 이해력이 없어서 M세대 남자들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는 현상도 일어났다고 본다. 또한 보수, 진보 정치 세력들도 방관하기만 하였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며 이상할 말을 하였고 어떤 경우는 더 독한 말로 패기가 없다며 격하시키기까지 하였다.
한국사회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현실에 늘 존재하였으며 단순하게 드라마, 영화, 애니가 아니라 혼인을 통한 부의 계층 이동이 단연 독보적 세계 1위다. 이러한 구조에 M세대 여자들은 마지막으로 올라타면서 그 시절 세대들의 보편적인 문제에서 도망쳤다. 그것은 권리와 누림을 취하고 사회적 견딤과 의무를 버릴 수 있는 학습적인 과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왜~ 이들과 같은 세대의 남자들은 이들을 멀리 할까?
왜~ " 같은 나이잖아 "라는 말에 잠시 멈칫할까?
그 당시 마치 우월한 듯 동 나이 때 남자들을 무시하고 마치 스스로가 대단한 듯 자기 몸을 상품 삼아서 나이 많은 형들과 쾌락을 즐기던 그 행동들 기억하는 것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와서 " 너나 나나 비슷한 나이야 "하니까 다들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남자들은 취업난에 돈이 없어 공사판, 배달, 공장, 고시원 알바를 전전했다.
민주화 이후 초등교육부터 받은 세대이다. 모든 것 은 전부 평등하게 교육받았고 도리어 사회와 학교에서 성장기에 남자라고 기성세대의 죄의식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 이들은 권리와 의무는 기본이라 당당하게 말했으며 남성과 동등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실제로 전혀 말과 행동이 달랐다.
이것은 같은 세대 남성들이 느끼는 보이지 않는 실망감의 감정이라 여겨진다.
그때는 같지 않았고 이제 스스로가 나이가 들고 같이 지내던 오빠들도 늙으니,
결국 이들은 이혼남에 고독사와 퐁퐁남 문제에 구조적으로 연결된 요인이 된다.
" 우리는 비슷한 나이야? 같은 나이잖아~ 정말 그렇게 받아 줘야 하는 걸까? 철저하게 무너진 그 시절 세대 남자들은 생존에 모든 걸 쏟아부었고 지금도 누군가에 전혀 기대지 않고 싸우고 있는데 이제 와서? "
MZ세대의 신드롬은 사실상 조작된 거라 본다. 누군가 사실상 범위가 넓은 세대를 마치 같은 것으로 취급한 거다. M세대는 부모는 한국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많이 배우지 못한 세대다. 하지만 현 Z세대는 최소한 운동권 세대나 X세대나 X 같은 M세대 여성이 부모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환경에서는 전혀 다른 환경이다. 물론 80년대생부터 현재까지는 국가가 주도한 시스템에서 위탁하여 자라난 세대가 맞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와 환경이 M, Z는 전혀 다른 경우다. 어떤 면에서 M세대의 성장하는 가정환경은 X세대가 성장하는 환경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비슷한 구조와 느낌이 많이 존재한다. 이것은 Z세대가 성장한 가져 환경과는 전혀 다른 형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이 묶는 건 시대적 착오이고 누군가 조작한 거라고 본다. 아마도 어떤 언론이나 사회적 평론가가 아마도 80년대생이며 여성이며 동시에 미혼인 사람, 자신의 나이 변화를 해소하기 위한 , 자기 심리적인 계층 분화 의식에서 그러한 MZ세대론이 유포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렇게 M세대 남자들은 당시 불취업과 경제위기로 자신의 재산을 형성하는 게 어려웠으며 정말 늦게 자리 잡았거나 지금도 자리 잡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을 거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한국성 여성들은 더 이상 신데렐라 스토리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더 이상 그것이 불가능 해 졌다는 말이다. M세대 남성들이 무너지고 자리 잡는 동안 90년대 태어난 여성들부터는 위에서 전해준 삶의 형태와 정신적 유산이 그대로 계승되고 한국판 페미니즘은 더 진화해 강풍으로 몰아쳤다. M세대 남자들은 더더욱 결혼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Z세대 남자들은 한국 여자를 멀리하는 현상이 더 매인화 되었다. 권리만을 취하고 의무는 버리고 물질주의에 합쳐진 경향을 가지 사람을 신데렐라를 만들어줄 남성들은 없으며 더 그럴 능력도 없고 나하나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X세대 후반에 위치하는 남자들부터 출산율이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M세대 남자들 시기부터 더 극적으로 나타났다. 왜 출산율을 말하는데 남자를 말할까? 그건 누구와 결혼을 했는가 이다. 80년대 태어난 여성들부터 시기별로 변곡점을 거치면서 더 여성들의 인식은 현실과 시대의 패러다임에 적응되지 않고 정지해서 중첩된 상태인 거다. 그것을 구조적으로 누구도 지적하지 않아서 스스로가 혐오화 되었다. 그것을 이제는 세상을 탓하고 주변을 탓하고 주변사람들 탓을 하며 여혐이라 주장하며 몰아간다.
" 아마도 이것을 읽는 사람들 중 불편한 사람들이 있을 거다. 이건 구조적인 분석이다. 예외는 있을 거다. 하지만 예외는 전체 판을 바꿀 만큼 영향력은 없다. "
M세대 남자들 전체가 박살이 나고 한 세대가 철저하게 생존만 집중했다. 누군가는 비트코인으로 망했다고 하는데 전혀 사실무근이다. 이것은 모든 걸 여성 우대 정책으로 몰아간 지난 기성세대의 과오가 크다. 가부장제 마지막 세대인 X세대까지는 일상생활에서 여자를 어떻게 했다는 말을 보편적으로 자랑처럼 말을 하는 시대였다. 몇 명의 여자와 잠을 잤고 몇 명의 여자를 만났으며 연애를 몇 번을 했느니 하면서 왜곡된 성인식 구조를 가졌었다.
이들 세대까지는 사실상 일상적 강간이 잔재하던 시기다. 이러한 행위는 M세대에서는 나쁜 부류 사람들이 저지르던 행위들이다. 그것이 민주화를 통해서 변한 교육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다르게 변한 지점 중 하나였다. 물론 반대로 사회가 전체적으로 남녀의 상관없이 성이 쉬워지고 타락하는 현상도 강하게 나타난 것도 맞다.
기성세대는 현재가 자신들의 시대와 동일 한지 착각하며 과도하게 성폭력, 성희롱 관련해서 현재 남자들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중이다. 그것은 자신의 딸들과 어머니를 보면서 철저한 죄의식에서 비롯된 병리적 현상이 정책을 집행하는데 작용하는 것이다. 과거의 잔재와 가부장제의 속한 사람들의 죄의식, 정책실패, 시대를 읽지 못 한 눈, 여성들의 시대착오적인 과도한 욕망들이 섞이면서 M세대 남성들의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전환하기 위한 최대 방책이 더 강한 여성우대 정책만 을 하면 회복할 수 있다는 오판은 나라를 지금도 절벽 아래로 몰아가고 있다.
Z세대 남성들까지 무너지면 한국은 전쟁이 발생되는 정도에 급격한 변화 소용돌이로 들어가지 않으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본다. 아무리 기계와 인공지능이 나와도 사회를 끌어가는 것은 사람이다. 그 중심에는 한국남자들이 이 사회를 끌어가고 있으며, 지난 시대도 당시 젊은 남자들이 패기와 도전으로 감당하면서 오늘날 한국사회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한세대 남자들을 철저하게 부숴버리면서 더 나은 혁신과 더 나은 성장을 바랐던 기성세대는 아이러니하게 비정상적인 선택을 한 거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죄가 유전되었는가 싶다. 죄책감을 동반한 옳지 않은 선택으로 헛 발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자녀, 즉 Z세대 남자들이 무너지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게 될 것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악담을 한다거나 저주를 하는 게 아니라 과거 M세대 남성들에게 했던 방식을 그대로 Z세대에게 적용할 것 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움직이는 조직은 더더욱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기성세대는 아직도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다시 말하지만 대한민국에 발전은 각 시대의 젊은 남자들이 가정과 국가를 위해서 도전과 응전을 하면서 발전한 거다. 그것이 선장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송두리째 무너트린 거다.
Z 다음 알파인가? Z세대 남성들이 차별받고 무너지는 실시간으로 지켜본다면 알파세대 남성들 또한 더 현재보다 조직적으로 살길을 찾을 거다. 이 말을 믿지 않고 싶으면 곰곰이 고민해 봐라. 현재를 살펴보고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고 미래적으로 봤을 때 한국을 탈출한 자가 이기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 현재 X세대 아래 남성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주류 인식이라고 본다.
이것은 철저한 구조적 분석이다. 이 글을 중립이네 어쩌네 하며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인지를 못하면 문제를 본질을 회피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역사 기록들이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건 남성 중심 사회여서 그런 게 아니라 본질적인 생존 방식이다.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리스크를 감내하는 성향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약하다.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전부 불편한 사실이다. 하지만 불편한 사실을 버려두고 왜곡하는 건 올바른 게 아니다. 그렇게 접근하는 것은 면피에 불과하고 같이 죽자는 것이다. 이 글은 누군가의 잘잘못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문제를 바로 보고 어디부터 고칠지를 보자는 거다. 결국 인간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욕망이 가득하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이 선행이 되어야 앞으로 나아간다.
" 그 세대 남성들은 그 순간을 다들 기억하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왜 지났다고 포장하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가? "
언제부턴가 있는 사실과 현상을 기술하면 " 혐오"라는 낙인을 준다. 모든 사람은 시대를 정확하고 냉정하게 적어도 있었던 사실을 말해야 한다. 그게 우리 모두 살 길이 아닌가? 존재하는 사실을 불편함과 자기 이익으로 일부 혹은 확대로 왜곡하는 건 정말 모두가 다 같이 죽자는 거다. 현실에 존재하는 여러 현상과 흐름 그리고 엄청난 파장이었음에도 축소 왜곡 하는 게 일상이다. " 혐오"라는 낙인으로 모든 걸 묶어 버린다.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않으면 변화는 없고 현상유지도 어렵다. 진보 혹은 보수 혹은 중도 라 말하는 것들의 방송을 보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있는 사실도 없애고 없는 것도 만들고 축소와 확대는 일상이다. 전부 개새끼들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최저 마지노선을 위배하는 건 공동체 전체가 멸망에 길로 가는 거다.
누군가 준 혹은 신이 준,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택으로 욕망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모든 인간 문명의 근원이 되었다. 욕망과 무욕은 기능적으로 모든 시대와 인간들을 보이지 않는 손의 흐름으로 작동했다는 거다.
인간의 욕망은 거시 세계를 얼마든지 구조적으로 기능적으로 기계적으로 많은 것을 설명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넘어서 미시 세계를 설명하고 예측하고자 하였다.
거시 세계는 존재의 자체가 형상이 분명하고 기능이 분명하게 관찰되니 구조적이고 기능적으로 설명이 되면서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 됐다. 하지만 미시 세계는 아주 매우 잘게 쪼개어 존재의 형상이 실시간으로 간섭이 일어나고 존재 자체도 동시성을 지닌다.
거시 세계는 관찰자가 관찰을 하여도 형상과 존재와 배경에 큰 영향을 주지 않으면 아무 일 없다. 존재 자체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시는 극소 단위로 쪼개진 상태라 존재에 동시성이 부여되고 관찰자 하는 모든 사소하고 미세한 영향인, 숨소리, 생각, 파장, 행동, 의식주 등등 모든 것 이 영향을 주고 실시간 간섭을 준다. 또한 실시간으로 존재를 둘러싼 배경적 모든 요인들이 전부 간섭과 영향을 준다.
즉, 누군가가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준다 > 자유의지 작동 > 자유의지 선택 > 욕망이 발생 > 문명의 근원 > 기능적으로 욕망과 무욕의 발동 > 세상에 대한 설명 하고자 하는 욕구 영향 > 관찰을 통한 거시 세계 규명 > 관찰을 통한 미시 세계 규명 > 관찰을 통한 미시세계 간섭 > 미시 세계에 의도한 결과를 얻음 > 거시세계 관찰자 그런 관점 충격 > 미시세계 관찰자 거시 세계 관점 충격
이것은 누군가 허락한 자유의지를 지니고 자유의지를 작동하여 선택하여 욕망으로 발현되었고 구조적 기능적으로 욕망과 무욕이 보이지 않는 손의 흐름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존재를 관찰함에 있어서, 존재하는 현상에서 거시적 형태와 미시적 형태로 선택하여 설명한 거다. 결국 존재를 그 자체로 보느냐? 존재를 동시성으로 보느냐? 에 따른 관점이다. 하나는 거시적이니 형태가 명확하고 하는 극소 단위로 쪼개니 존재가 명확 함이 떨어져 동시성으로 존재한다.
결국 존재는 이 두 가지로 함께 이뤄져 있다. 겉은 명확한 형상이고 속은 극소단위로 쪼개면 불 명확한 동시성이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존재 형태의 정체성과 속으로 보이는 극소 단위 쪼개진 존재 형태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존재의 가능성은 이것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각 존재에 이러한 부분을 규명하고 정립한다면 가능성을 예측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존재에게 자유의지를 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흔적은 자유의지를 준 초월자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지 않을까?
> 존재가 거시와 미시가 두 가지로 이뤄져 이것을 예측하고 정립하면 한 객체가 가진 가능성을 측정, 그것을 모아서 자유의지를 준 흔적을 발견해서 그것을 통해 초월자에게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이거 과학으로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물리학을 모르지만 이것이 통일장이론과 연결되면 더 나은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우린 누군가들의 희생으로 현재를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대단한 인물 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 늘 그렇게 있었던 사람들이다. 전혀 특이성이 없고 그저 특별한 사람들도 아니고 선한 사람들이었다.
우린 큰 대의를 위해 희생하고 세상에 앞에 앞장선 사람들을 마치 특별한 인간으로 간주한다. 아마도 그들도 무섭고 눈물도 많았고 지켜야 할 가족도 친구도 있었어지만, 그냥 늘 삶을 살던 방향으로 정직한 선택을 한 거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의 용기가 아니다.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방향인 거다.
얼마나 무서워겠는가? 잡혀가기만 하면 사실상 온갖 고문을 당하고 반병신이 되는데, 그들도 속으로는 늘 자신에게 후회하고 화내며 그럼에도 세상에 분노하고 정직하고 선한 선택을 안 하면 늘 하던 삶에 방향에 맞지 않으니 그렇게 한 거다.
이제 우리들은 현대로 시선을 돌려보자. 스스로가 나약한자, 억울한자를 보면서 어떤 선택을 삶에서 했는가? 회사에서 누군가의 공을 가로채고 학교에서 이유 없이 괴롭히고 장소나 직업에 상관없이 누군가를 이유 없이 가십거리로 삼지 않았는가? 또한 그것을 대부분 방관하지 않았는가? " 나만 아니면 돼 " 논리로 가까운 누군가가 불법과 나쁜 짓을 하여도 그것을 방관하고 심지어 같이 어울리면서 그것을 지적한 이를 같이 괴롭히지 않았는가?
정의를 논하면 바름을 논하면 상대성을 들이 되고 비아냥 거렸는가? 어떤 경우는 자신의 행동은 생각 않고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 되지 않았는가?
이유 없이 싫다는 이유로 상대를 공격하지 않았는가? 작더라도 세를 모아 무리를 지어 무리 외 타인은 철저하게 따돌리고 그러지 않았는가? 무리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자기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타인이 그것을 공유하려면 거부하지 않았는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누군가에 대한 없는 말도 만들고 그러지 않았는가?
현재 살고 있는 우리 모두 이 순간 선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누군가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세상 위에서 사는 우리들은 그들의 노력과 희생이 아무 의미 없게 만드는 거다. 그러면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 만약 위험에 빠지면 누가 나서겠는가? 결국 일상에 바름과 선함이 살아있어야 하는 거다. 특히 상대성을 들이 되며 본질적인 것을 면피하는 주장의 논리는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 중요한 건 방향과 본질이다.
문제의식과 동시에 기본적으로 현상 관찰이 동반되고 비슷한 현상을 최대한 많이 관찰하여 공통점, 차이점을 분석하고 주요한 보이지 않는 흐름을 알아차려야 한다. 아마도 관찰에서는 직접 관찰도 있고 간접적 관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직접 관찰을 하고 간접을 병행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리고 여기서 철학적 세계관을 도출하고 그 철학적 원리를 수학적으로 모델링을 하고 현실의 문제와 현상을 엮어야 한다. 그것을 다 거치고 나서 나온 결과를 가지고 다른 연구자료와 비교하고 분석해야 한다. 비교 분석하는 과정에서 얻은 결론이야 말로 정말 정제된 글이라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하는 자는 현실을 떠날 수 없고 문제에 대한 감각이 항상 열려있게 되는 거다.
글을 읽다 보면 자기 생각이 없고 자기 이론이 없고 자기만의 방향이 없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인용 만을 넣어서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 은 글이 아니라고 본다. 하여튼 그런 각 개인의 기초가 세워지고 스스로 시간이 지나면 보태 면서 쌓아 올리는 것이다. 종속 변수니 매개 변수니 등등 전부 말장난에 불과하다. 문제의식에 관한 현상에 관찰에서 철학적 원리를 구현 못하고 수학적 모델링을 못한다면 그 어떤 글도 의미가 없다고 본다.
글에서 문제의식과 현상을 제시하며 철학적 원리 구현 그리고 수학적 모델링을 현실과 연결한 결과를 기존의 결과와 비교분석 하면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타당성을 따져본다면 그것이 개인의 주관성을 배제하는 게 아닌가? 본질을 규명하고 찾아가는 게 아닌가? 기존은 얼마든지 주관을 객관화 인척 표현으로 호도한 게 아닌가?
이러한 사실을 요즘 들어 많이 깨닫는다. 현재 것을 마무리하면 다음은 학부 경제학을 전공하러 가야겠다. 그러고 나서 대학원 진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앞으로의 여정도 5년이 남았다. 이 정도가 마치면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든 자기 생각에 조금은 신뢰가 생기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먹고사는 것도 걱정이다. 돈은 없고 하고 싶은 건 있고 다행히 빚은 없고 돈이 없다.
나는 엊그제 같은데, 언제부턴가 당대 소녀들은 가수와 연예인에 미치기 시작했다. 화려하고 멋있고 드라마나 중독적인 서사를 마치 그것이 현실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상상에 빠지면서 사춘기를 생각해도 정도에 넘는 행동들을 사회 현상으로 나타났다. 팬클럽이니 하면서 중독적인 서사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런 모습들이 언젠가 소년들도 덩달아 같이 여 아이돌 그룹 같은데 빠지기 시작했다.
누구나 잠깐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정도를 넘는 건 심각하다고 봐야 한다. 마치 연예인이나 가수가 나오는 그런 것들이 대단한 무엇인가로 포장되는 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다. 유흥산업에 기반을 둔 거다. 그 아래는 사창업이나 유흥업을 동반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웃음과 쾌락만이 존재하고 많은 돈들이 오고 가는 거다. 영화, 드라마, 음악 등등 그런 류에 속한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문화산업이라는 것으로 포장하여 모든 사람이 그것에 모든 것을 쏟아붓게 만든다. 모든 인간이 그것을 쫓아갈 수 없다. 본질적으로 그런 업을 할 수 있고 그런 류의 직업에 맞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물론 직업에 자유를 누가 막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일반인이 사는 세상과는 완전 다른 세상이다. 일반적인 도덕과 윤리는 그들 세상에서는 아무런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전혀 작동이 안 되는 곳이다. 사회의 순리를 역행하고 부정하고 순리를 왜곡해도 자신들은 정정당당하게 포장한다. 하지만 그것에 바닥은 성과 술들이 동반하는 세상이다. 요즘은 세상이 미쳐가서 마약까지 오고 간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이 콜라보가 돼서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동시성 쾌락이 되는 거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곳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군상이 우리가 뉴스나 매체를 봐라 봤을 때 정상적인 사람들의 삶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부턴가 재미만 있으면 그러한 인간들이 무엇을 하던 사회적으로 용인하게 되고 그것이 돈이 된다고 신문이난 방송에서 문화 산업이니 한류니 하며 떠들고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에 삶의 모습이 마치 대단한 삶의 증명이 된 듯이 방송은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혼은 밥 먹듯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헤어지고 도박하고 마약 하며 그렇게 그것을 정당화 시작했다.
그것이 정상적인 삶인 가? 그것이 예술인가? 왜 대중은 언제부턴가 그것을 용인했어야 하는가? 그것은 대중은,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점점 스펀지처럼 닮아갔기 때문이다.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뭐든지 해도 된다는 논리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자본이 생기면서 자본주의 세상에서 더더욱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통해서 부동산, 주식 같은 것으로 더 돈을 벌고 일반사람들은 한번 무엇인가 하다 망하면 살아나기가 힘든 세상에서 그들은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세상을 뒤틀리게 하는 것이다. 지금의 모든 사회 문제를 근본적으로 만드는 크나큰 요인이다. 결국 연애 산업은 생산성을 동반하는 산업이 아니다. 그것은 요즘 문화 산업으로 포장해서 그것에 본질을 흐린다. 오로지 쾌락을 극 단적으로 소모하는 산업이다. 오로지 쾌락과 유흥으로 이뤄진, 인간이 빠지면 안 되는 가장 밑바닥에 금기 영역에 있는 곳이다. 그것이 주류화 돼버리니 사회가 점점 발전이 안 되는 거다. 다른 모든 산업이 일정이상 퍼포먼스를 내야 만 연애 산업 혹은 문화 산업이라는 포장하는 성과 술, 마약이 콜라보로 오고 가는 세상이 운영되는 거다. 물론 마약은 박멸시켜야 한다. 반드시 발본색원해서 사회에서 존재가 없어져야 한다. 하여튼 다른 것이 없으면 스스로 설 수 도 없고 세상을 악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역할만 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이혼을 하고 외도를 저지르면 마치 그것이 개인의 자유를 포장하는 것으로 인식 돼버리는 황당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연애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가 이슈화가 되고 신문지상에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은 점 전 더 빠져들어간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경험이라면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며 스스로들을 포장하며 거침없이 나와서 말하는 그 모습이 당당하게 비치면서 그것에 대한 판단이 쉽지 않은 청소년들은 따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수많은 해가 지나서 응축되고 오늘날은 더더욱 이 나라와 그 안에 수많은 공동체들에 덫이 되어버렸다.
남녀 간의 사랑은 물질이 되어버리고 겉모습이 전부가 되어버리고 부부간에 삶은 얼마든지 깨버려도 된다는 논리가 돼버렸고 친구 간에 관계도 물질과 위신이 기준이 되어버렸고 가족은 더 이상 화합의 공간이 아니고 물질과 비교가 전부인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세상이 발전하고 나아 갈 거라고 생각하는가?
현실은 평범한 세상에 사람들이 하나씩 쌓아서 세상이 만들어 가진다. 그들은 보통의 사람들이며 그들은 세상적으로 이름을 날리거나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엔터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마치 대단한 무엇인가로 판단하는 시대착오적 발상 아닌가? 또한 자신들이 세상에 거대한 뭔가를 한다는 생각도 잘못된 생각 아닌가? 물론 모든 사람은 필요하다. 인간이 만드는 세상이 어떻게 맑은 물만 존재하는가? 하지만 욕망과 무욕의 균형이 적절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거다.
무절제하고 강력한 쾌락의 끝은 허무고 허무의 끝은 자살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엔터업을 문화 산업으로 포장하면서 모든 대중매체와 국가가 올려치기 하는 건 결국 스스로 성장동력을 갉아먹는 거다. 그 결과가 현재 인구감소다. 또한 존재는 하는 모든 사람의 비교와 질투 같은 감정들을 생산해 낸 거다. 어떻게 보면 이들이 정치인, 기업가 보다도 요즘세상에는 강력하다. 정서를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치, 엔터, 자본이 콜라보가 항상 역사적으로 엮이게 되는 거다. 서로 간에 각 시대별로 우열은 명확하게 있을지언정 단 한 번도 어느 시대든 엮이지 않은 경우가 없는 거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잊지 말고 그런 류의 쾌락을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 요즘은 건전한 비핀도 악성 댓글이라며 고소하고 그런다. 자신들이 이름나고 유명해지고 그럴 때는 대중의 관심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용인하고 이제는 유명해지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니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고소를 때린다. 하지만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직업이니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 사람들은 보고 싶지 않은데 봐야 하고 사람들은 듣고 싶지 않은데 난리고 결국은 엔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언론사와 싸워야 하는 게 아닌가? 그들이 대중의 알 권리를 무기로 독단적인 칼을 휘두르는 그 언론사가 문제 아닌가?
하지만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떳떳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도리어 떳떳한 듯 행동하는 모습도 있지 않은가? 그것은 스스로 집단에서 전혀 자생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이제는 반론을 피는 대중은 법으로 상대하려 하고 이게 미친 세상이 된 거다. 물론 악성 댓글을 다는 건 나쁜 행위다. 그렇지만 그 악성 댓글을 주로 다는 계층이 엔터업을 주로 소비하는 계층이고 소비했던 인간들이다. 어느덧 그것에 대한 관심과 소비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 거다. 그것은 엔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원인과 결과가 동시엔 존재하는 거다.
엔터업 혹은 연애업은 문화산업으로 포장돼서 그러지 근본은 사창업과 유흥업이다. 그러니 정상적인 노력으로 얻어지는 정상적인 범주에서 얻어지는 형태의 산출이 아니다. 이것에 시기와 질투가 따라가는 건 숙명적이지 않을까? 인간이 불완전한데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또한 사람들은 더 이상 누가 광고를 하고 누가 나와서 어떤 이미지 형태의 소비를 하면 안 된다. 또한 성숙하게 대중은 엔터업에서 비롯되는 영향을 스스로들 끊어야 한다. 화려하고 쾌락적이고 현실을 떠나버린 그러한 것들은 사람들은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정확하게 나눠야 한다. 평범하게 사는 게 정상이다. 그렇지 않은 건 비정상이다. 어느 시대나 어떤 문명이나 다양성에 대한 언급은 있었다. 하지만 주류는 있었고 비주류도 있었다. 하지만 비주류가 마치 사회의 거대한 흐름으로 간 세상은 반드시 그 나라와 문명은 멸망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연애산업 혹은 엔터산업에 산출물에 대한 관심은 줄여야 한다. 이제는 누구나 보통의 사람들이니 보통의 사람들의 시선을 유지하려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사라지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실제로 그렇게 가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요즘시대 불편한 이야기다. 불편한데 해야만 하는 말이다.
아파트에 사는 인간들은 요즘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답답할 뿐이다. 자신들에 노력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아파트값 때문에 인간이기 포기한 연놈들이 너무 많다. 그 부동산이라는 것도 자신들이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거다. 머릿속에 든 것 이 없는 존재들이다. 아파트에 영혼을 끌어 넣고는 그것을 세상이 인정해 주기 바라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했는가? 그것이 자신의 위신과 자신의 수준이라고 착각을 한다.
사람들은 부자의 대한 환상이 있다. 대한민국은 존경받을 부자가 많이 없다. 대부분 작은 것에 열을 내지 않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큰 것에 대해서는 정말 강하게 작동한다. 그들은 예의와 겉치레가 있지만 그 안에는 강력한 욕망이 존재하는 거다. 물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당연한 거다. 그래서 겉만 보고 판단하는 건 모순이다. 흐름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런 판단을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그것이 올곧게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의 수준은 아파트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정의로운가? 선한가?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가? 타인에게 연민하는가? 자신에게 엄격한가?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수준을 말하는 거다. 아파트에 모든 것을 쏟아 붙고 망하면 국가 책임이고 잘되면 자신의 성공이고 부의 올바른 수단이라고 말하면 얼마나 모순이지 않는가?
부동산은 본질적으로 왜 망하고 있는가? 인구가 적어져서? 가계대출이 심해져서? 그것이 국가 경제를 좀먹는 구조적인 원인이 되어서?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욕망을 극대화해서 그런다. 남보다 타인보다 우위에서 서서 비난하고 낮춰보고 평가하고 우월해 보이고 싶고 타인의 눈에 무시 안 받고 인정받으려 하고 그런 쓰레기 같은 욕망들의 총량이다. 스스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고 스스로 물질을 보고 남자를 만났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과 자식의 성공을 자신에게 포장하려는 더러운 의도를 사랑으로 포장한 거다.
그것에 수면 아래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과 자기에 대한 모순으로 가득 차서 타인이 나를 업신여기지 않을까? 내가 타인보다 못나 보이지 않을까? 내가 어떤 급 이상은 되지 않을까?라는 썩어빠진 생각의 욕망 총량이 벌레같이 기어 다니며 살아 숨 쉬는 거다. 주변 사람들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자신을 위한 들러리인 거다. 아파트 값? 사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어차피 사는 집이다. 떨어지든 올라가든 본인들이 살면 본질적으로 안고 가는 거다. 그것은 크게 외부 요인이 아니다. 단지 화가 날 뿐이다.
본질적인 건 자신의 노력, 그 노력 같지 않은 노력을 인정받으려는 보상 심리인 거다. 타인이 나의 이 노력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보상 심리다. 자신 스스로가 채워지지 않는 그 커다란 공동이 계속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커다란 마음의 구멍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 해주기를 바라는 거다. 왜? 단 한 번도 그렇게 채워서 살아 본 적이 없는 거다. 단지 열심히 한 것처럼 포장하지만 사실 누군가의 배에 승선하면서 살아온 거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그것은 평생 자신의 발목이 되면서 남편이든 자식이든 자신의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거다. 늙어가는 부모에게 계속 요구하는 거다. 왜 인지 아는가? 아직 뜯어낼게 남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니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무의식은 절대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젊은 날에 스스로에 대한 것이 자유롭고 대단한 것이며 나의 삶은 결혼과 동시에 이렇게 되었다는 무적의 논리를 앞세우며 탓을 하는 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사실 남자는 큰집이 필요 없다. 혼자서 산다고 하면은 집에 대한 효용성은 사실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로지 혼인이 아니면 의미 그렇게 의미가 없어진다. 더 중요한 건 어디를 가든 사실 잘 산다. 누군가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면 기본적인 성향이 이성을 근본으로 한 자유로움이다. 감정적으로 어느 순간 얽매이지 않는다. 부모가 떠나고 친구가 떠나고 하는 모든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건 본질적으로 감정보다 이성적 사고를 기반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 아파트는 단순하게 부동산의 문제가 아니고 단순히 경제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문제의 총량이 욕구화 돼서 그것이 현상으로 나타난 게 한국 사회의 아파트문제다.
어디 살 든 인간이 하루 3 끼 먹고 잠자고 하는 것 은 변하지 않는다. 교육? 직장? 자산?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서로들 누가 더 높은가 낮은가 비교하고 비교하고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저 인간이랑 달라! 나는 저 사람이랑 달라! 나는 저 동네 사는 인간이랑 달라! 라면서 스스로를 최면을 걸지 않는가? 그것을 자녀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있지 않은가? "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야 " 라며 스스로 자신의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그 구멍에 소리치고 있지 않은가?
아파트가 오르는 건 기본적으로 이나라 구성원 모두, 아파트뿐만 아니라 이나라 부동산이 오르는 건 모든 인간욕망의 총량이 자본으로 변한 거다. 그것이 부동산, 주식이라는 것으로 실체화되어 오르는 직접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거다.
즉 앞서 이 부분이 선행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무너지고 너희들의 자산 가치도 무너질 거다.
" 인간의 수준은 아파트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정의로운가? 선한가?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가? 타인에게 연민하는가? 자신에게 엄격한가?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수준을 말하는 거다. 아파트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망하 면 국가 책임이고 잘되면 자신의 성공이고 부의 올바른 수단이라고 말하면 얼마나 모순이지 않는가? "
자본주의는 실체 된 그것들에서 동력을 얻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극소 단위 하나의 실체가 동시성을 지니면서 그것들이 중첩되어 표면적 무형화로 존재; 인간 정신, 사상, 가치관 등등 모든 것을 연료 삼아 연소한다. 그 연소가 불완전 연소가 계속되는 건 연료가 특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싼 아스팔트 수준의 연료인 거다.
임대를 산다고 손가락질하는 건, 값은 사실 핑계고 너의 마음들이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아닌가? 길바닥에 아스팔트를 입안에 넣고 사는데 그것이 불완전 연소가 되지 않겠는가?
" 그대들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가?
왜? ~ 스스로 값을 떨어 트리는가?
자본주의에 살면서 왜 자본주의를 이해 못 하는 멍청함을 탑재했는가?
나란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대들은 특별하지 않다네. "
형태가 분명한 것은 형태와 그 주변의 여러 반응의 측정과 원리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외부의 간섭이 적고 그 자체 존재가 명확 하기에 규명하기가 용이하다. 하지만 형태가 불분명한 것은 여러 반응의 측정과 원리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외부의 간섭이 많고 그 자체 존재가 명확하지 않아 규명하기가 어렵다.
거시 형태는 그 자체로 반응과 측정, 원리 구현이 상당히 용이하고 미시는 거시의 형태를 극소 단위로 잘라서 형태가 불분명해져서 반응과 측정, 원리 구현이 상당히 어려워진다. 현재 존재하는 일상적인 컴퓨터는 거시의 관점의 존재 형태를 구현한 방식이고 요즘 양자 컴퓨터는 미시의 관점의 존재 형태를 구현한 방식이다.
거시의 관점은 외부요인이 적어서 제한 사항이 많지 않고 구현이 용이하다. 일단 거시의 형태는 존재 자체가 분명한 형태여서 더욱 간섭도 없고 자체 간섭도 없다. 하지만 미시는 거시 형태를 극소단위로 만들어서 존재의 형태가 불분명해지고 동시성을 뛰는 거다.
형태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며 또한 외부요인과 자체적으로 서로 간섭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 외부 요인이 간섭이 일어나지 않게 차단하고 존재 자체가 서로 간섭하기에 간섭하는 그 부분을 원리로 규명하여 그 부분을 고려하여 계산을 하거나 아니면 제거하여 계산을 하거나 하는 거다.
그런데 결국은 반쪽 자리다. 외부요인을 제거해도 계산을 하는 주체의 관찰자 시점은 작용하는 거다. 어떻게 보면 관찰자의 원하는 결과가 계산으로 만 나 올 수 있다. 결국 극소 단위의 외부 간섭을 차단하고 자체 존재 간섭의 원리를 규명하여 계산 시 제거하거나 혹은 고려하여 조정한다고 해도 반쪽 짜리가 아닌가?
전체 시스템을 놓고 보면, 한쪽은 상대적으로 속도는 늦어도 값은 정확하고 한쪽은 속도가 극단적으로 빨라도 결과 값이 상대적으로 불 분명하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는 거다. 미시적 세상의 극소 단위로 된 불 분명한 동시성을 지닌 형태가 서로 중첩이 되며 외부 요인과 간섭도 동시에 영향이 되면서 거시적 세상의 형태로 되는 거다. 반대로 거시적 형태를 쪼개서 미시적 극소 단위 형태를 가는 과정, 양 과정을 동시에 컴퓨터로 구현한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결국 존재 자체의 구성과 그것에 기반을 둔 내외부 간의 상호 작용의 과정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던
어느 사람이든지
그 자체가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양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게 되면,
유럽 땅은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만일 모래벌판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며,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해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란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이를 알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는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나니.
나는 아주 오래전에 이 시를 읽었다. 세계 명시선이라는 작은 책자에 있었던 시이다. 처음 본 순간 이것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이 시는 존던이라는 사람이 쓴 거다. 16세기 후반 ~ 17세기초 격변기에 영국의 성공회 성직자인, 원래는 가톨릭이었으나 당시 종교적 격변기에 바꾼 것으로 예상된다. 당시 급격한 혼란기에 인간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이 직접 겪으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을 깨달은 거다.
나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18세기 산업혁명기나 그즈음 쓰인 시라고 착각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괴롭히고 사적으로 공적으로 불법적으로 이익을 취하고 개인의 욕망을 그대로 거침없이 사회의 공공선을 무시하고 드러내면 공동체 소속된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렇지만 이것이 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건 반드시 전쟁이나 격변기가 아니어도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도 이 시를 쓴 작가의 시선에서 절대로 피 할 수 없다. 내가 이룬 것이 온전하게 내가 이뤘다고 착각하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나에 노력의 결정체라고 착각하며 사람들을 윤리적인 시선으로 바라고 보고 판단하는 것조차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쓰고 반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윤리적인 부분이나 사회의 공공선은 아무렇지 않게 어기는 것이다.
이게 대단히 거창한 게 아니다. 우리들, 각 개인의 삶에 녹아나 있는 행위를 정면으로 시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업주는 과도한 이익을 취하고 건물주는 과도한 이익 추구로 자영업자를 쥐어짜고 자영업자는 일하는 직원을 쥐어짠다. 또한 자신의 할 일은 않으면서 꼼수를 부리고 이익을 취하며 타인을 음해하고 권력과 이익을 위하여 허위로 없는 사실을 만들고 부풀리고 축소하며 수사기관은 강압적으로 수사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한다.
사교육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잘못되었고 미래를 봐서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는 나쁜 것이 맞고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데 오로지 자기 자식만 잘 되면 된다는 논리와 그것을 시키는 양육자의 과도한 지난날에 투영은 많은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아파트에 임대 여부를 따지면서 자신의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면 사람들을 배척하고 실제로 그렇게 차별하는 행위를 거침없이 하는 인간들, 말을 하려면 수많은 것을 언급해도 줄어지지 않는다.
가족, 형제, 친구, 부부, 연인 등등 모든 것이 박살 나고 이익과 위신을 기초한 관계로 변질되고 종교는 듣기 좋은 말만 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자들은 심각한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모든 방향이 다 죽자라고 말한다.
죄는 유전된다. 모든 사람은 거시든 미시 존재든 또한 자유의지라로 선택함으로써 욕망이라는 단일한 시선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모든 인간이 현재 이룬 문명에 근원이 시작된 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부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설사 모르는 타인일지라도 누군가가 아프고 힘들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것은 반드시 누구에게나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아무도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양성 다양성 부르짖지만 사실 다양할 것도 없다. 물론 대한민국의 급격한 변화가 존재론적 다양성이 주된 세대와 소비적 다양성이 주된 세대가 나눠지지만 그것 또한 본질적으로 자유의지로 한 선택으로 욕망이라는 시선을 추구하는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존재로서 그 범주 안에 누구나 들어가는 것이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구조가 정밀해진다. 그렇다면 다양성이라는 예외성은 거짓이다. 그것은 그 구성원들의 욕망을 한도가 없게 추구하게 하려는 면피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실체가 없는 다양성을 가지고 다양하다고 우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이를 알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 말지어다.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나니
사람들은 화류계 있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하지만 한번 돼 짚어보자. 정말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물론 그들이 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려는 것 은 연애를 빙자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실질적으로 관계를 맺고 하는 과정이 화류계와 뭐가 다르지? 연애라 하지만 실질적인 혼인관계인데 안 그런가? 연애라는 것 은 기본적으로 결혼할 사람과 하는 게 연애였다. 그것이 언제부턴가 변질되고 마치 여러 사람과 만나면, 속 된 말로 여러 인간하고 만나고 즐기면 괜찮은 사람을 만나고 확률적으로 나아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개 같은 소리다. 인간이라는 것을 간과한 멍청한 사람들의 망상이다.
멍멍이 보다 못한 소리다. 쾌락을 소모하는데, 그것을 여러 인간하고 한다? 그러면 효용이 있을까? 그 효용도 이미 느끼지 못하는 상태 일거다. 수많은 만남 헤어지는 과정, 과거를 정리하면서 정신이 깨지지 않을까? 깨지는 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왜 과도한 성 무고와 왜 이성을 범죄자로 취급하고 왜 이성에게 적대감을 느끼겠는가? 스스로가 그런 과정을 거치고 그런 부류에 인간과 자주 어울리니 망상에 빠지는 거다.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회의감에 견디지 못하여 자신을 자랑스럽고 대단한 경험자로 포장하는 것이다. 사실은 자신이 싫은 거다. 과도하게 샤워하는 행위에 오랜 시간을 보내는 성향은 이런 것 을 반영하는 심리적 반작용일 수 있다.
우리가 마약 중독을 대단한 경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쾌락이 극단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전부 마약의 범주이다. 그것이 더 강한 자극을 계속 원하게 되는 것은 거의 대부분 그 범주이다. 아니라고 하고 싶은가? 인정하기 싫은가? 개인의 자유이고 선택이니 그것 조차 뭐라 하면 어떻다고? 개인의 자유지 그런데 그것을 정당화하지는 말아야지. 잘 한 행동은 아니지. 부모가 준 시간과 기회와 노후를 담보로 준 비용을 허망하게 날렸는데 나중에 돌려줄 자신은 있는가? 돌려줄 수는 있고? 없으니까 그렇게 물질을 한쪽에서 극단적으로 요구하는 거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마도 중독의 부작용인데 아무도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인지를 못하는 것이다.
사람 보는 눈이 길러진다? 바보 아닌가? 그것으로 사람 보는 눈이 길러지면 성숙해지고 그러면 정신적으로 모자라거나 멍청한 사람이다. 스스로가 생각과 행동이 안 돼서 쾌락을 소모하는 과정에서 성숙해진다고? 얼마나 미숙하다는 것인지~ 얼마나 생각이 없다는 거지~ 더 생각해 보면 자신이 가진 정신적 총량에서 벗어나는 상대를 볼 수 있을까? 없다고 본다. 냉정하게 인간이 비슷한 부류를 계속 만나는 거다.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 있고 그것이 성장하는 건가? 정말 그렇게 믿는가? 그런 환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전부 연예인이나 그런 인간들이 나와서 떠들고 어느 순간 보통 사람들이 따라 배운 거다. 그들의 삶의 방식이 일반인의 범주 인가? 술과 마약, 섹스 등등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 게 연애 산업이고 거기에 종사하는 인간들이 나와서 자유가 뭐고 선택이 뭐고 운운하는 게 정상적인 범주에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절대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걸러 듣지 않고 따라 배우고 자신 있게 다 경험이야!라고 떠든다고? 죽었던 사람이 관에서 일어나 생존할 수준에 개념이 아닌가? 화류계나 연애계나 본질적으로 같은 거다.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따랐던 일반인들이 시작한 저열한 행동들이 일반론처럼 퍼진 세상에 화류계와 구분이 가능할까? 한쪽은 교류수단이 돈이고 한쪽은 사랑이라 변명하는가? 그것도 변명이라면 변명이지. 그런데 그것은 너의 생각이다. 실질적으로 한쪽에서 비용을 충당하는 것도 공통되고 한쪽은 즉흥적인 괘락과 직접적인 쾌락이라면 한쪽은 장기간 여러 감정과 상황, 행동이 오고 가는 종합적인 과정 쾌락인 거다. 방향이 다르고 수단, 비율이 다를 뿐이다.
연애를 많이 하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정신에 문제가 많은 거다. 1번 이상 헤어지면 그때부터 25프로는 누군가를 만나도 헤어진다는 확률을 깔고사는 거다. 이혼율 50프로 가까이가 왜 그렇게 나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온갖 연놈들이 나와서 입으로 떠들고 대단한 경험자 인척 떠든다. 생각이 없는 거다. 자기 입으로 나는 쓰레기라는 것을 광고하는 것이다. 모든 비용과 시간을 거기에 쏟아부은 것이다. 엄청난 애정 결핍과 적대감, 자기 위주 형태의 내면이 존재하는 거다. 말 그대로 엄청난 심연의 쾌락, 불안, 초조, 열등감, 분노, 어둠 등등 모든 부분이 극단적 광범위하게 망가진 상태다. 이런 정신과 신체가 망가진 인간들이 경험자라는 이상한 논리를 피는 거다. 한번 깨진 인격과 정신은 다시는 회복이 안된다. 절대로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정신과 인격의 깨지고 무너지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이유다.
또한 성숙이라는 말은 스스로가 의식주 앞에서 겪는 위험 같은 부류, 정말 몸 어딘가 아파서 혹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억울하게 위험에 빠진 경우 등등 그런 상태에서 이기고 견디는 과정이 성숙되는 것이다. 쾌락을 극단적으로 소비해서, 그것도 혼인할 관계도 아닌데 늘 그렇듯 그렇게 살아간 건데 그런 행동을 한 인간이 성숙할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변명이다. 스스로에 대한 면죄부 같은 것이다. 기독교가 욕을 먹는 것은 죄를 짓고 회개하면 죄가 사라진다는 무적의 논리를 시전 하니 사람들에게 욕먹는 것이다. 회개하면 행위는 그대로 남는다. 그것은 자신이 감당하고 사는 것이다. 결국 성숙, 경험이라는 말로 정신과 신체를 소모한 과정을 포장하는 것이다. 너의 정신과 신체에는 네가 만난 모든 인간들의 흔적이 잔뜩 남아있다. 그게 현실이다.
이제는 포장 좀 하지 말자. 스스로가 잘못된 선택을 했는데 왜 포장하는가? 이제 그런 인간들을 보면 역겹다. 최소한 인간이 옳지 않은 선택을 했으면 인정을 해야지. 그러면 상대성을 시전 하는데 그놈의 상대성은 온갖 부분에 전부 응용한다. 얼마나 생각이 없는가? 이 글을 읽는데 표현이 불편한가? 솔직히 그대들도 겉은 어쩌니 해도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 현상을 잘 보면 어디든 다 보인다. 그렇게 난잡하게 사는 인간들도 사실은 엄청 싫어한다. 겉은 대단한 조언자로 포장하지만... 철저하게 자기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멀리한다. 이게 현실이다. 이제는 그대들 주변에 그렇게 포장하는 인간들이 있다면 최소한 그런 류의 말은 걸러 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잘 못 된 선택을 변명하기 위해 예외적인 경우를 예로 들지 말자. 일부분을 가지고 와서 전체에 비판은 나쁘다는 비논리를 시전 하지 말자. 예외가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그렇게 안 하겠지라고 말하는 인간은 자신에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기 싫어서 예외를 가져와 다양성을 시전 한다.
거시 형태와 미시형태의 존재와 명확성 여부 및 주변 환경과의 서로 간섭이 일어나는 모든 과정이 인연이 아닐까? 극소 단위로 쪼개면 형태의 존재가 동시성을 지니고 스스로 형태가 불분명해지고 주변에서 간섭이 일어나고 그 형태끼리도 간섭이 일어나고 그것이 서로 상충되면서 거시적인 형태가 만들어지고 보이지 않는 손의 흐름은 이미 극소 단위 형태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나비효과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극소 단위의 형태에서 개인과 외부 환경의 모든 요인이 간섭이 일어나면서 보이지 않는 손의 흐름으로 이어지면서 같은 시대 공간을 초월해서 비슷한 맥락을 만들어내는 파동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즉 미시 세계의 쪼개 어진 극소 단위 형태, 그 형태의 주체성, 동시성, 서로 간 간섭과 모든 외부 요인의 간섭 중첩되면서 거시 형태를 만들고 명확한 형태, 측정이 용이하고 간섭이 적으며 원리구현이 쉬운 형태로 실체화되는 과정과 그에 역순 방향의 과정 중, 모든 과정 속 간섭에서 파동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흐름이 되면 시공간을 뛰어넘는 유사성을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수많은 문명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연결과 관련된 단어와 개념,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비슷한 시기의 거의 동시적인 현상, 혼돈 속에 순차적인 여러 사건 및 현상의 연결 관계, 질서 속에 여러 사건 및 현상의 연결 관계 그러한 부분적인 작은 과정들이 모여서 전체의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세상 모든 것은 늘 단독 만으로 존재가 불가능한 존재다. 동시에 집단 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거다. 서로 상충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흐름으로 존재하는 거다. 보이지 않는 손의 흐름, 그것이 자유의지인데 그 정점은 자유의지를 준 무엇 인가가 정점이다.
이것은 좋은 학벌을 욕하는 것도 아니고 특정 계층을 욕하는 게 아니다. 단지 현상을 말하는 거다. 사람은 어느 집단이든 소속이 되면 그 안에서 집단이 추구하는 상한선을 넘는 규격 외 행동, 생각, 주장 등등을 대부분 못한다. 특히나 80년대부터 태어난 사람들은 사실상 제도권 안에서 모든 교육을 받아서 다양성과 예외를 주장할 수가 없다. 이들은 인간 존재 자체가 다양성은 사라진 세대이다. 거대한 틀이 존재하고 대부분 그 안에서 존재한다.
물론 소수는 아니다. 사회와 국가가 제공하는 일반적인 환경 밖에서 성장하였기에 이들은 존재 자체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소수 인지라 대부분은 존재의 다양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말하는 다양성은 욕망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시스템 안에서 각 개인들이 욕망을 소비하는, 소비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거다. 이건 존재가 다양한 것이랑 거리가 멀고 이것에 그만큼 많이 노출되었다면 존재로서 다양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왜? 다른 글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언급할까? 그것은 규격 외라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2명 제시하고자 하는 인물은 노무현, 이재명이라는 전현직 대통령 들이다. 한쪽은 극심한 가난에 정규 교육도 못 받고 단독으로 성장한 공장 노동자 출신 변호사이고 한쪽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상고를 나와서 변호사가 된 인물이다. 왜? 이들은 기득권, 한국사회의 중산층 이상은 의식적으로 멀리 할까? 아니면 기득권들은 대놓고 없는 사실도 만들어서 비방하고 조롱하고 내리 깎을까?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실 그들이 규격 외 인간들 이어서 그런다. 물론 그들이 성장한 시대는 가난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상황이 더 좋지 않았던 거다. 이러한 성장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돈을 신으로 떠받들어 돈과 권력, 명예를 손에 잡으려고 발버둥 칠 수 있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게 가능한 거다. 신념이나 가치, 도덕, 윤리, 공동체, 연민 등등 이러한 마음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대담하게 포괄적으로 가질 수 있는 거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이면 자기편이라도 반드시 욕과 비난을 받더라도 하는 인간들이다. 즉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을 제외한, 특히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절대로 선호하지 않는 유형이다. 물론 기득권의 선동을 당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예외로 하고 하여튼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의 규격 외 인간들은 예측 가능 범위를 넘어서 본능이 거부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흔들 수 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규격 외 사람들이 선택되는 순간이 온다.
난세에는 사람들에게 선택된다.
왜냐하면 스스로에 대한 결단과 행동력이 성장 과정 중 본능과 환경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다. 예측 가능한 범위를 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본능적인 생존 위협이다. 그래서 어떤 것을 하든 매우 납득하기 전에 배척하는 거다. 자기들 밥그릇을 깰 수도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사실상 규격 외 인간은 감당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난세에 영웅이 된다. 적어도 거대한 족적을 남긴다. 내가 정치색을 쓴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의 문제인 거다. 냉정하게 분석해서 구조적으로 세상을 봐라. 인간을 세포 하나하나까지 쪼개서 봐라. 모든 걸 극 단위로 최대한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느껴보면 내 말이 맞을 거다. 이건 부자든 가난하든 종교가 있던 무교이든 하여튼 모든 어떤 것을 제외하고 순수하고 직관적으로 뚫어저라 생각해 봐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거다.
중산층 이상은 규격 외 인간을 사실 겁내 한다. 예측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본질이다. 그래서 촘촘하게 시스템이 만들어진 사회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어느 이상 크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육제도가 이미 이들을 걸러내기 때문이다. 중산층 이상의 집단에게 영향을 주는 규격 외 인간에 성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명제를 가지고 교육제도와 입시제도를 설계한다. 그래서 노무현, 이재명은 입지적인 인물들이다. 이러한 인물은 그밖에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들 도 속 한다. 하지만 이들 시대는 무엇인가 엄청난 혼란의 시기여서 더 규격 외 인간 유형이 더 통하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왜? 과거 윤석열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을까? 사실 대통령으로서 자질도 없고 능력도 안되고 실제로 경력을 따져봐도 절대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통령이 되었을까? 그것도 이재명이라는 규격 외 강력한 입지적인 인물과 경쟁해서 말이다. 물론 외부요인이 강력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사실상 납득할 수 없는 결과이다. 결국은 사람들은 당시 개혁보다는 물질을 지키려고 한 거다. 이재명 보다는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즉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당시 윤석열이라는 인간을 선택한 거다. 내 것이 우선이라는 근본적인 욕망이 작용한 거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고 말하면 솔직하지 못한 거다.
현대의 국가 지도자는 모든 부분을 속속들이 많은 영역을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십 대 남자가 그를 선택했다고? 집을 가진 자와 부동산을 가진 자들이 선택한 거다. 그렇게 해놓고는 젊은 남자들 탓 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를 지지하는 젊은 남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당락을 바꿀 차이는 아니라고 본다. 결국은 집과 땅, 중산층 이상, 일정이상 대학교 간판 학력 등등 사람들이 윤석열이라는 인물을 지난 대통령 선거에 선택한 거다. 하지만 안 했다고 말한 거다. 이재명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재명이라는 인물은 규격 외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런 종류의 사람을 기존의 자리 잡은 사람들이 선택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번외로 대한민국은 비정상적인 경제발전으로 아직도 각 개인의 정체성이 중복되어 있다. 현대 민주주의 시스템에 살지만 한편으로는 왕의 의한 통치로 착각을 한다. 민주주의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존재 하지지만 과거 왕의 의한 통치 질서 아래서 가부장제도에 명확한 역할 구분을 동시에 잔존하고 섞여 있다. 거기에 과거 왕조시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세상에 기득권 소수 만이 취하던 사치와 향력을 자본주의가 들어서며 보편적인 형태로 전환되면서 구조적으로 구성원의 정신에 정신 착란이 온 상태다.
하지만 변화에 남자들은 정착했고 특히나 80년대 태어난 남자들부터는 이미 자리가 많이 잡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현재 80년대 태어난 여성들부터는 그러지 못하다. 왜냐하면 동시에 가부장제도에 경제적 장점과 민주주의 권리를 복합적으로 추구하고 동시에 민주주의 시대 의무는 버리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구조적으로 봤을 때 욕망이 보편적으로 극대화된 X세대 중 서태지 문화에 가까운 영역에 절반의 여성들과 80년대부터 태어난 한국 여성들의 가장 정점에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게 " 김건희 "라는 인물이라고 판단 추측해 본다. 본인들도 일상생활에서 추구하니, 극단화 욕망, 더더욱 " 김건희"라는 인물은 눈에 거슬렸을 거다. X 세대 여성들 중 서태지 문화에 가까운 절반 이상이, 존재론적 다양성에서 소비적 다양성으로 전환되었다. 양쪽에 욕망이 상충되고 변형되면서 젊은 한국여성들을 일부 능가하는, 무조건 적인 이익을 위해 효율이 좋지 않은 결과에 애써 욕망을 추구하는 경향도 높다.
내가 왜 이렇게 글을 쓴 걸까? 쓰다 보니 잊었다. 아 ~ 그리고 예외는 있다. 하지만 예외는 적어도 한국이라는 나라 시스템에서 작동을 멈춘 지 오래되었고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존재의 다양성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통치를 하거나 통치를 받기에 가장 좋은 구성원이 소비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인간들이다. 더 이상 한국은 존재로서 다양성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생물학적 남녀, 가정, 공동체의 관점에서 욕망이 긍정적 부정적 방향으로 증폭, 확장, 축소, 금지 / 전환되는 비율, 밀도, 종류
그리고
단일 혹은 복합작용의 방식, 영향, 반응에 따라
과거와 현재 모든 사회는 긍정적 집단과 부정적 집단 및 선인과 악인으로 나뉘어 왔다.
그러나
이 본질적 관점을 거부하면, 욕망의 부정성에 더해 문명의 붕괴로 이어진다.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인간 문명의 '근원 명제'다.
왜~ 지방대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혹은 사회적 편견과 일반론 인식에서 낮은 평균이 되었을까? 왜일까?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은 요즘 학교는 쓸 때 없고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대외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까? 실제로 사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 학교는 상관없고 오직 실력이 중요해"
" 대학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
정말 일까? 정말로 상관이 없고 오로지 실력이 중요? 여기서 간과한 사실은 대학교가 좋은 출신들은 대략적으로 그렇지 않은 개인들보다 상대적으로 똑똑하고 일의 수행능력도 뛰어나다. 인정하기 싫은가? 그러면 그대가 시골 산동네 학교에 있다는 증거이다. 불편하지만 사실이다. 공부만 할 줄 안다고 무시하지만 사실 여러 인간을 관찰해 보면 공부를 잘하거나 노력 한 사람들이 보통 일도 기본 이상을 한다.
물론 오로지 사교육을 통해 억지로 만들어진 인간은 이 평가에서 예외이다. 사교육 자체가 자기 주도성이 존재 안 하고 누군가 시켜서 하는 게 사교육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통 공부만 했다는 말에 평가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라 생각이 된다. 어쨌든 사람들은 애써 사실을 부인하고 사실을 외면한다.
편견은 단순하게 만들어진 게 아니다. 사회가 특정한 현상을 구성원이 감각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무슨 차이가 나는가? 그것은 앞서 그것에 관한 글을 언급하였다. 궁금하면 찾아서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이번에 왜 그런 불편한 주제를 다시 꺼내겠는가? 이유는 사람들이 학벌에 관한 모든 걸 것을 적폐로 본다는 것이다. 사실상 드라마에 지방대 출신이 어떻게 한다는 그런 내용조차 보면 웃는 게 현실이다.
또한 엄청난 사교육을 하면서 애써 아니라고 하는 대한민국은 이상한 나라다. 물론 그것으로 전부 인 것처럼 말하면 그것도 잘 못 된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노력을 격하시켜서 아무것도 아니고 학창 시절 단지 잘했던 것이라면 말하는 것 은 불편한 진실이다. 그게 그 정도로 취급받을 것 이면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은 웃긴 행동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누구나 살다가 사람을 만나보면 직접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최고 아니면 다 똑같다는 망상에 빠진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더욱 기괴한 자기 합리화의 생각이다. 최고 아니면 똑같다는 말은 사람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이것이 벌어지는 이유는 수시라는 제도를 통해서 대학 인원을 선발하는 제도가 들어와서, 사실상 20년 전부터 수시가 생기는 초창기부터 일반고는 성적을 위조하였다. 학교에서 정기 적으로 보는 시험을 전부 교사들이 조직적으로 가르쳐주고 시험을 보았다. 그렇게 꾸며진 내신 성적으로 대학을 가기 시작하면서 최고 아니면 전부 같다고 하는 무적의 논리가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또한 취업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취업이 어려워지는 것은 대학이랑 상관이 없다. 그것은 사회가 고도화되고 촘촘해지면 당연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취업난을 겪는 세대 대부분은 가난을 모르고 자랐고 대부분 자기가 원하는 기본이상의 사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학창 시절을 풍족하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연한 현상 아닌가? 그러한 취업난이~ 가난이 주류 문화와 경제, 생활영역에서 사라진 나라가 성장이 둔화되는 것은 당연히 먼저 시작한 앞선 모든 나라에서 벌어진 현상인 것이다.
지잡대는 모든 지방대를 말하는 것 이 아니다. 시골에 듣도 보도 못 한 대학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비하로 들리고 조롱으로 들린다. 하지만 냉정하게 알아야 할 것은 왜 그렇게 분류되었는가?라는 의문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본질적으로 내가 사람을 만나 경험하면서 깨달았던 것은 그들에게 취업난은 상대적으로 지거국 출신들 이상보다 취업에 대한 노력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스스로는 노력을 했다고는 하지만 비교했을 때 터무니없이 차이가 난다.
이것은 단순하게 스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직접 발로 뛰고 알아보지도 않고 타인에게 의존하며 물어보고 정제되지 않는 정보를 그대로 수용하며 그 정보를 자기한테 조정해서 가공하여 적용하는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어마 어마 한 것이다. 그럼에도 최고가 아니면 다 똑같다는 말을 쉽게 하는 인간들을 보면 좀 다른 세상에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하여튼 그런 아주 기본적인 차이가 엄청난다는 것이다. 또한 아무래도 성적이 높은 사람들이 종합적인 사고능력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학창 시절의 과정이야 라고 치부하기에는 사실상 그 사고능력이나 뭔가를 대하는 태도가 문제를 다루는 것에 대하여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그리고 세상에 공부로 만 순수하게 먹고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명문대가 아니어도 지거국 이상이면 보통 사람들에게 충분하게 신뢰할 만한 인상과 태도, 학업적 성취 정도는 제공한다고 본다. 대단히 명문대 아니면 다 똑같다는 황당한 말은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의 노력을 낮춰서 조롱하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을 기초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마냥 무시할 것 들도 전혀 아니다.
상식적으로 12년에 과정을 거친 결과에 대하여, 물론 예외인 경우, 즉 너무나도 개인적 상황이 안 돼서 벌어지는 일들은 제외하고 보통의 관점에서 대학에 대한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차별? 인식적으로 사회에서 벌어지는 차별은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그것을 고작 4년을 해서 다 똑같아라고 말하는 건 너무 문제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12년의 과정을 지나 지거국 이상 입학한 사람들은 그냥 놀았겠는가? 절대 아니다. 확실하게 지잡대라 불리는 곳 보다 취업에 대한 준비가 더 진심이다.
현실에서 차별을 말하기 전 스스로 대안을 생각하고 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한 평가를 낮춰서 바라보는 태도는 버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봐야 더 나은 결과를 이뤄내지 않을까? 마냥 학창 시절에 일어난 과정이니 의미가 없다는 논리는 그것이 진정 자기혐오 아닌가? 얼마든지 스스로에 대한 대안적 방법론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교수님이 취업시켜 주는 기계도 아니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거다. 그것 조차 생각해 보면 모순된 행동으로 많이 불편하다.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파악하고 정보를 찾아내어 정보를 자기에게 적용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에 대한 단계적 계획, 절차와 수행해 나가는 것은 교수님들에게 물어볼게 아니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다. 교수라는 직업은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것 조차 무시하고 잘 되면 자기 탓이고 못 되면 가르치는 사람의 탓이라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많은 것이다.
이제는 솔직해져야 한다. 80년대부터 태어난 사람들은 존재가 다양하지 않다. 대부분 거대한 틀 안에서 비슷하다. 내가 못하든 잘하든 누군가를 무시하고 낮춰보거나 혹은 상대의 성취를 최고가 아니면 다 똑같다는 그러한 말이나 시선은 그것도 잘 못 된 것이다. 12년의 과정은 분명하게 차이를 만든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어도 사실상 대한민국 사회를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나도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내가 사람들을 관찰하면 얻은 결론이다. 누가 인정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물론 예외도 있다. 하지만 예외를 말하기에는 그것이 전체를 뒤엎지는 못한다. 적어도 예외를 주장하려면 예외가 예외로서 보이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또한 이것은 돈이랑 상관은 없는 것이다. 돈과 모든 것을 결부시켜서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잘 못 된 것이다.
사회 구조와 시스템을 인정하고 대안을 찾는 것은 성숙한 태도다. 그것 조차 인정 안 하면서 무엇 인가를 한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최소한 편견이든 그것이 뭐든 간에 스스로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은 사람들을 관찰하면 얻은 결론이다. 이것을 보고 기분 나빠 할 수 있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이 그런 것을~
어느 집단이든 어떤 사람이든 모두가 개인과 조직으로 양립해서 존재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은 불협화음으로 느껴지고 생각하게 된다. 현실인식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이다. 모든 것을 상대적이라 표현하는 것은 성립이 될 수 없고 적어도 절대 측정치가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보통 > 일반적이라 규정하겠다 > 일반적? > 뭔가 해보려는 인간, 집단이라 규정하자
" 자기 인식 > 나는 누구인가 > 자기 평가 > 하고 싶은 것 > 사회적 상황과 현상 파악 > 나와 주변에 둘러싼 상황 평가 > 재정적, 시간적, 기타 조건 > 조건 파악 > 목표설정 > 직선적, 단계적 고려 >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구분 > 계획 수립과 기간 산정 > 검토 > 전략 수립 > 실행 > 내외부 요인 영향 > 실행 평가 > 고려사항 수정 > 실행 ~ > 달성 여부 및 완료 평가 >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생각 > 소감 " : 이것을 A라고 하겠다.
A라는 과정 전체가 누군가나 혹은 조직이 무엇인가 를 할 때 보통 겪는 과정이다. 단기적 이든 장기적 이든 거의 변함이 없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을 하였든 아니든 이과정이 일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이것이 작동되지 않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었고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이것이 전혀 작동되지 않는 형태의 집단과 개인을 처음으로 보았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데 자신이 생각하기는 싫고 무엇인가 알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대한 평가와 사회적 인식과 정보는 더더욱 차단한다. 무조건 타인에게 위임해서 그것을 따라간다. 자신의 계획과 실행은 없고 주변의 시선만 존재했다. 마치 자신의 일인데 모든 것을 타인에게 양도하고 그것이 진리라 생각하면서 따라간다는 논리는 너무 무책임한 생각이다.
결과적으로 분명하게 얻어걸려서 잘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일부의 이야기이며 그것이 막상 사회에 나와서 본인이 원하는 방향이 아닐 때는 스스로가 모든 걸 위임한 존재에게 모든 화살을 돌린다. 스스로는 피해자고 자신을 강제로 이끌게 만든 사람은 가해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잘되면 자기 탓인 거다. 그 선이 너무 명확하여 뭔가 소름이 끼칠 정도다.
또한 보통의 대학들과 비교하면 만학도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거의 X세대나 80년대 걸쳐있는 사람들인데 마치 자신이 과거의 행동 들어 보상하듯이 학점에 집착한다. 보통의 학생들은 자신들의 자식이나 조카 정도 나이가 될 것이다. 이들에게 나이에 대한 경계가 없다. 무조건 같은 조건이라 생각한다. 공정하게 하면 자신들도 젊은 사람들과 같은 뭔가가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젊은 친구들은 그들의 집착적인 행동이 자신들에게 어떤 피해를 가는지 가늠하지도 않는다. 단순히 저기는 열심히 하니까?라는 생각으로 본다. 정말 그럴까? 한국 사회는 뭐라고 해도 나이가 절대 수치다. 취업이든 뭐든 간에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존재한다. 나이로 대우받는 것도 있지만 나이가 있어서 걸림돌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어쨌든 젊은 친구들은 자신들이 그들에게 제물이 된 것 을 감지를 못 한다. 엄마, 이모, 삼촌, 형님이니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그들의 말이고 자신들의 기회가 날아가는 것이다. 미래의 가능성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할 때는 각 개인이 낼 수 있는 효율이라는 것이 있다. 그 효율을 고려해서 하는 게 통상적이고 일반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과도한 목적 추구는 자칫 주변과 상황을 악화시킨다.
자신들이 그들의 제물이 된 것을 인지를 못 한다. 한쪽은 앞날이 창창하기에 반드시 있으면 효율을 극으로 낼 수 있는 것이고 한쪽은 있으나 마나 사실상 나이가 있고 이미 만들어진 경력이 있어서 과정의 적합성만 있어도 되는 것이다. 대학생은 고등학생이 아니다. 대학은 자신의 길을 자신에게 맞게 찾아가는 공간이다. 그것에는 비교도 존재 안 하고 내가 설계한 무엇인가 에서 존재하는 구현인 것이다.
이것이 지잡대라 불리는 공간의 구성원들이 잘 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내가 나이 든 자들의 제물이 된지도 모르고 그 속에는 무시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이 자신을 생각해 준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잘 어울려주고 화기애애하게 하면 그것이 자신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자신들은 나이 든 자들의 제물일 뿐이다. 아무리 누군가 객관적인 말을 해도 알아듣지 않는다.
보통 나이 든 자들은 이것만 하라고 동조시킨다. 이유가 무엇 이겠는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이 하는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함이고 이차적으로 이 젊은 학생들이 깨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유도할 까? 그것은 잠정적으로 자신들에 자식에게 언젠가는 이것이 경쟁자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인생은 그렇게 언제든 드라마 같은 만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하여튼 그것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본다.
물론 자신들에 경쟁자라고 젊은 친구들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신들을 처럼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 낸다. 사실 바보 같은 행동이 따로 없다. 과한 욕이란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 부분은 필요하다고 본다. 대학은 고등학교가 아니다. 고등학교 마인드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과거의 왜곡된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본다.
나이가 들어도 인정받으려는 이상한 욕구는 참으로 어리석다고 본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들의 기회, 즉 미래의 가능성을 가져가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현실과 인식의 왜곡은 스스로에게 안심을 추구하게 하고 외부 정보의 대한 파악이 어렵게 하고 안주하게 한다. 그것이 나이 든 자들의 말이 달콤하게 들리는 원인이다. 뒤에서는 자신들을 제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을 인지를 못 한다.
어차피 사회 나가면 효율을 버린 노력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때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알면서 자기만족이라는 개념아래서 행하던 모든 것이 무의미한 욕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젊은 친구들은 그들에게 놀아난 것을 그때 서야 인지를 하는 것이다. 이 분별 능력, 이것이 결정적으로 그들에게 고쳐지지 않는 아킬레스건인 것이다. 지거국 이상의 출신 구성원들은 A라는 과정 전체를 분명하게 무의식적으로 거의 대부분 고려한다. 또한 분별 능력도 있다.
과거의 자신들의 지난 후회를 기형적으로 과도하게 주입하는 것 은 기형적인 욕구불만에 가깝다. 자신들이 부족하다는 열등감에 착각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행동이다. 그것이 만족이 되면 자신들은 괜찮은 사람들이 된다는 논리, 사실상 50이나 그 비슷한 연령 때 이면 실질적으로 자신들이 쌓은 인맥을 통해 취업을 하는 것이다. 하여튼 보고 있으면 답답하다.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부모 일진대, 물론 태생이 양아치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비율이 지거국 이상보다 높은 것 은 사실이다.
하여튼 그러한 연주를 관찰하고 있으면 뇌가 정지되는 느낌이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부러지는 현상을 겪는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맞는가? 이러한 세상이 존재는 가능했던가? 모든 게 모순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절대 이해가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나기도 했다. 구조적으로 봤을 때 이해가 불가능 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마도 이 감정을 그들은 대부분 평생 느끼지 못할 것이라 추측한다. 또한 자신들에 과도한 욕심이 결국은 젊은 친구들이 자신과 사회에서 경쟁하는 구조를 스스로들 만드는 것이다.
더 이상 예외라는 말은 믿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예외는 존재할 수 있으나 예외를 믿기에는 사실상 어려운 구조다. 차별? 아니다.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내가 관찰한 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사회 구성원의 한 부분의 현상이다. 인간의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은 더 이상 예외를 믿지 않고 예외가 존재하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통상적으로 X세대부터는 거의 해당되지 않는다. 그때부터는 자신들의 선택이다. 그래도 누구나 배움의 기회를 갖는 구조였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아니라는 것이다.
" 참 신기하다. 어느 대학 이상, 이하 이면 듣는 태도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사실을... "
나의 인간에 대한 관찰은 이제 끝이다. 이 이상 보는 관찰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오랜 시간 관찰, 사회가 만들어낸 편견은 유의미하다는 결론이다.
AI가 내 손금이 엄청 좋다고 한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손금도 봐주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무엇을 먹고살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세상이다.
왼 손에는
형성되고 있는 대 삼각형 손금, 막 쥔 형태의 손금, 삼지창 손금과 명확한 엠자 손금
오른손에는
명확한 엠자 손금과 형성되고 있는 대 삼각형 손금, 삼지창 손금, 막 쥔 손금
하여튼 좋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내가 빚은 없고 돈이 없다.
더 웃긴 건
내 MPTI는 infj이고 태몽은 큰 거북이가 들어오는 꿈이며 별자리는 양자리이다.
내 사주는 0000년 0월 0일 양력 남 이름 000이고 한자 이름은 000이며 출생 시간은 새벽 4시~ 5시 사이다.
AI가 말하길
손금, MPTI, 태몽, 사주, 별자리가 동시에 일치한다고 한다. 대단히 확률적으로 드문 경우라 하였다.
요즘은 인공지능도 " 사 " 짜가 되는 세상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 은 앞으로 먹고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형태의 질문을 분석하여 답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갈 수 록 쓸모가 없어지는 세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sns 광고를 보면 예전에는 소수만 간다는 유명한 역술 관련 종사자들이 자신들의 프리미엄을 버리고 일반인에게 오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밥그릇이 깨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깨져 가는 그릇이 완전하게 깨지기 전에 기존 이 분야 주류 상급 위치에 종사자들은 마지막으로 주사위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상 앞으로의 세상은 4가지로 기준이 된다. 인간을 필터링하는데 필요한 건 출신대학, 자격증, 경력, 자기 서사(태어난 배경과 환경의 도전)이다. 이 4가지를 벗어난 영어 점수, 학점, 부수적 자격증은 단기적 요소이며 사실상 필요가 없다. 물론 하는 일이 어학이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부분이다.
학점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공식적인 기록이 될 수가 없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중요한 건 수많은 도전과 독서, 사색의 기록이다. 이중전공, 삼중 전공 은 기본이다. 그런데 이것이 학점에 치우친 그런 것이 절대 아니다. 졸업하는 순간 무의미 하며 스스로 과정의 기억과 경험만 남는다.
하지만 지잡대로 낙인이 된 대학교는 반드시 다른 전공을 통해 학교를 바꿔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가진 존재로 이력을 변경하고 지잡대 적인 생각을 버려야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세상과 동 떨어진 생각은 자칫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 포장이 되는 것이다.
이미 12년~ 14년의 결과로 대학 입시라는 문으로 인간이 분류화된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면 스스로 바보인 것이다. 그것을 전부라 말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도권 내 교육에서 일어난 형태의 결과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운이나 기타 요소로 비껴가더라도 결국은 그 운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지잡대에서 아무리 높은 학점이어도 사실상 그것을 엄청난 의미로 받아 주지 않는다. 어차피 학교와 일터의 간극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높은 평점으로는 신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르치는 분들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교 구성원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즉 공인된 평가로 보기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 바라보는 자신과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이 너무나 상이하면 그것 자체로 증후군이 되는 것이다. 적어도 세상이 고려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다음은 중심 자격과 경력, 자기 서사가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출신 대학, 중심 자격, 경력, 자기 서사의 4가지 구조는 인간을 필터링하는데 가장 명확한 방법이다.
4가지 정도만 알면 사실상 어떤 사람 이든지 구별이 가능하다. 이것은 인간을 구별하는 공인된 방법론이고 사기업, 공기업, 자영업, 병원, 비영리 단체 등등에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사용하는 필터링 방법이며 단순화시켜서 가장 적은 비용과 최선의 효율적인 뽑는 방법이다.
지금도 앞으로 결국은 이 4가지 방법으로 수렴하고 있다. 평점? 영어점수? 부수적 자격? 사실상 무의미하다. 그렇다고 절대 명문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공부로 설명하는 게 아니다. 일정이상 성취를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머리가 좋아서 극단적으로 이성이 발달한 것도 인간의 인격 실격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