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지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회의실에서 박선우 상무가 신입사원 김민지에게 물었다. 우리 회사는 작년부터 '님' 호칭을 도입했다. CEO부터 인턴까지 모두 '님'을 붙여 부른다.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서라고 했다.
김민지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음... 박선우님께서 말씀하신 방향이 맞는 것 같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복도에서 김민지를 만났다. "진짜 생각은 뭐야?" 물어보니 그제야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완전 다른 의견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상무님이잖아요. '님'이라고 불러도 여전히 상무님인데, 제가 뭘 안다고 의견을 내겠어요?"
바로 이게 '님' 문화의 현실이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실체
'님' 호칭은 표면적으로는 직급의 벽을 허물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위계와 권력이 여전히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다.
김민지님과 박선우님, 호칭은 평등해졌지만 두 사람이 가진 정보의 양과 질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박선우 상무가 가진 정보:
회사 전체 전략 방향
타 부서 진행 상황
경영진 논의 내용
예산 현황과 제약 조건
시장 동향과 경쟁사 분석
김민지 사원이 가진 정보:
자신의 업무 범위 내 현황
동료들과의 일상적 대화
공개된 사내 공지사항
이런 정보 비대칭성 앞에서 '님'이라는 호칭은 무력하다. 김민지의 의견은 '소중한 의견'이 아니라 '정보가 부족한 개인의 생각'으로 치부되기 쉽다. 결국 형식적인 호칭은 바뀌었을지언정,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소수에게 의사결정 권한이 집중되는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진정한 정보 민주주의는 단순한 '호칭의 변화'가 아니라 '정보 권한의 재분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님' 호칭 문화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이 지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많은 기업들이 단순히 호칭을 바꾸는 것만으로 수평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활발한 의견 교환이 일어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이는 마치 겉모습만 화려하게 포장해서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와 같다.
A회사의 경험담
지인이 다니는 스타트업 A회사는 설립 초기부터 '님' 호칭을 도입했다. 20명 남짓한 작은 회사였지만, 수평적 문화를 지향한다며 CEO도 '대표님'이 아닌 '○○님'으로 불렀다.
처음 몇 달은 좋았다고 한다. 직급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젊은 직원들의 아이디어가 바로 실행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회사가 50명, 100명으로 커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님이라고 부르긴 하는데, 실제로는 여전히 대표예요. 중요한 정보는 임원진들끼리만 공유하고, 우리는 결정된 것만 듣게 되더라고요. 호칭만 바뀌었지 본질은 똑같았어요."
B회사의 혼란
대기업 B회사는 '님' 호칭 도입 후 오히려 더 큰 혼란을 겪었다.
"부장님을 '○○님'이라고 부르라고 하는데, 속으로는 여전히 '부장님'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상하더라고요. 말은 '님'으로 하면서 행동은 예전 그대로. 이게 정말 수평적인 건가 싶었어요."
더 큰 문제는 진짜 소통해야 할 때 오히려 망설이게 된다는 점이었다. '님'으로 부르지만 마음속으로는 '팀장님'으로 여기는 이중적 태도 속에서, 정보의 투명성은 더욱 흐려지고 진정한 소통은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님' 문화는 새로운 형태의 혼란을 만들어냈다. 겉으로는 모두가 동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복잡한 이해관계와 위계가 얽혀 있다.
직원들은 이런 상황에서 혼란을 겪는다:
"님이라고 부르라고 하는데, 정말 자유롭게 의견 말해도 되는 건가?"
"반대 의견을 내면 '도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결국 결정권은 위에 있는데, 내 의견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이로 인해 직원들은 진정으로 소통해야 할 때 오히려 망설이게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건설적인 비판은 더욱 나오기 어려워진다.
정보 민주주의는 단순히 수평적 소통의 가능성을 여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모든 구성원이 의미 있는 정보를 공유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집단 지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든 정보를 무분별하게 공유할 경우, 기업의 핵심적인 영업 비밀과 중요 정보가 보호받지 못할 위험이 있다. 이는 조직의 생존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호칭의 변화가 아니라 정보 시스템의 근본적인 재설계다.
누가 어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가?
어떤 정보를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
중요한 정보는 어떻게 보호하면서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투명하게 전달할 것인가?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보 흐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마치며
'님' 문화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수평적 조직 문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짜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겉모습이 아닌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