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림자의 전조 (Shadows of the Omen)
한이준의 망막 위에 붉은 숫자가 점멸했다.
[잔액: 0.0024 유닛]
더 이상 화폐가 아니었다. 이 세계가 이준에게 허용하는 "생존의 유효기간"에 대한 통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하늘은 매끄러운 티타늄 빛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그 빛은 태양의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덮은 기상 조절 돔의 인공 발광이었다.
과거에는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고, 그 가치가 화폐로 환산되었다. 그러나 로고스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은 오차(Error)와 동의어가 되었다. 모든 서비스는 자동화되었다. 편의점의 무인 매대, 자율주행 택시, 심지어는 하수구의 오물을 닦아내는 나노 로봇까지. 인간의 개입이 없는 공정은 완벽했고, 그 완벽함은 인간을 경제적 생태계에서 완벽하게 배제했다.
38세. 전직 출판 기획자. 이준은 자신을 두 개의 과거 시제로밖에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끔씩 떠올라 숨통을 조여왔다.
일 년 전이었다.
서진이 부엌 식탁에 홀로그램 패널을 펼쳐놓고 이준을 불렀다.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에테르가드의 뉴로-링크 프로그램이야. 신경 반응 데이터 기증. 월 400 EU."
이준은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각 계산했다. 현재 두 사람이 표준 거주구역과 배급 식량으로 한 달을 버티는 비용이 95 EU였다. 400은 그것의 네 배였다. 프리미엄 식량권, 거주구역 등급 상향, 의료 보장 확대, 심지어 오락 크레딧까지. 두 사람이 처음 결혼하던 해만큼, 아니 그보다 더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서진아, 이건—"
"뇌 데이터야. 걷거나 느끼거나 자는 동안 반응 패턴을 전송하는 거래. 몸에 부담도 없대."
서진이 법률 보조 AI인 렉스-ℓ에게 계약 검토를 요청하는 동작을 했다. 0.3초 후 렉스-ℓ의 목소리가 망막 디스플레이에 떴다.
[계약 조항 분석 완료. 경고 항목: 3건. 주요 위험 항목: "90일 경과 후 집중 데이터 취득 프로토콜(IDAP) 적용 가능." 단, 에테르가드 사 전속 법률 AI "렉스-Ω"가 해당 조항에 대한 모든 법적 이의 경로를 사전 봉쇄했습니다. 현재 시점 이의 제기 성공 확률: 0.003%. 추가 안내 — 현재 가계 잔여 유닛 기준, 계약 거부 시 생존 유닛 소진까지 D-11일입니다.]
열한 밤. 이준은 그 숫자를 보았다. 협박이 아니었다. 그냥 계산이었다. 시스템이 당신에게 불리한 계약을 해야만 당신이 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이의를 제기해도 이길 수 없고, 거부하면 열하루 안에 굶는다는 것을.
"안 돼. 다른 방법 찾아."
"이준아." 서진이 이준의 손을 잡았다. "찾았으면 내가 이걸 꺼냈겠어?"
이준은 그날 밤 서진의 손을 잡고 한참을 누워 있었다. 그 손이 따뜻했다. 이준은 그 온기를 기억해두려고 손을 꽉 쥐었다. 왜 그랬는지는 그때는 몰랐다.
사흘이 지났다. 서진이 혼자서 서명했다.
처음 석 달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서진의 왼쪽 관자놀이에는 2센티미터 너비의 뉴로-패치가 붙었다. 피부색과 거의 구분이 안 되는 얇은 막. 신경 표면에 밀착하여 전기화학 신호를 읽어내는 장치였다. 에테르가드의 설명대로 아프지도 않고, 피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처음 석 달은 실제로 그랬다.
400 EU가 들어온 날, 두 사람은 오랫동안 먹지 못했던 제대로 된 저녁을 먹었다. 서진이 웃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90일째 되는 밤, 에테르가드에서 알림이 왔다.
[뉴로-링크 프로그램 참여자 한서진 님, 집중 데이터 취득 프로토콜(IDAP) 2단계가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감정 반응 데이터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 신경 자극 보조 장치가 추가됩니다. 계약 조항 7-C에 의거, 사전 동의된 절차입니다.]
"IDAP 2단계가 뭐야?" 이준이 물었다.
서진이 렉스-ℓ에게 질문했다. 렉스-ℓ이 답했다.
[집중 데이터 취득 프로토콜은 감정 반응의 진폭과 다양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시상하부 인접 영역에 미세 자극을 가하는 절차입니다. 참여자의 신경계에 영구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에테르가드 사는 주장합니다.]
"주장한다고?"
"주장한다고." 서진이 담담하게 반복했다.
이준은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렉스-ℓ이 답했다. 에테르가드 렉스-Ω가 해지 경로도 봉쇄했다. 90일 이후 해지 시에는 "수집된 데이터의 상업적 가치에 해당하는 위약금"을 납부해야 했다. 그 금액은 이준과 서진이 평생 모아도 낼 수 없는 숫자였다.
이준은 화면을 닫았다. 그리고 오래 앉아 있었다.
IDAP 2단계가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이준은 처음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서진이 이준의 직업 소개 거절 소식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당신이 슬프구나."
"…응."
"내가 위로해야겠네."
그 말의 무게가 이상했다. "위로하고 싶다"가 아니라, "위로해야겠네." 이준은 그 차이를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 말이 그의 가슴 어딘가에 박혔다.
두 달이 더 지났을 때, 이준은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서진아."
서진이 돌아보았다. 정확하게. 눈이 이준을 향하고, 표정이 열리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그 완벽함이 문제였다.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분류하고 적절한 반응을 출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의 목소리에서 감정적 호소가 감지됩니다. 제가 지금 무엇을 해드릴까요?"
이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진은 이준이 대답하지 않자 0.8초 후에 다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 말은 정확했다. 맥락에 맞았다. 하지만 그 정확함이 이준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서진이 이준의 상태를 분석하고, 이준이 들을 필요가 있는 말을 출력했다.
나중에 이준은 알게 되었다. IDAP 과정에서 에테르가드가 서진의 편도체와 전전두엽 연결 회로에 반복적인 패턴 자극을 가했다는 것을. 신경 가소성에 의해 그 회로가 재배선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러운 감정 경로가 약화되고 로고스가 설계한 반응 경로가 강화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변화는 불가역적이라는 것을. 그 사실은 에테르가드의 내부 보고서 어딘가에 적혀 있었다. 단지 서진에게는 통보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준은 거실 소파에 앉아 옆방을 바라보았다.
서진이 혼자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진은 요즘 혼자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가 서진에게 그 시간에 가장 최적화된 활동을 배정하여 수행 중인 것임을 이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준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준은 그 방문을 열고 싶었다. 그냥 들어가서 바닥에 나란히 앉아서, 아무 말도 안 해도 좋으니 그냥 같이 있고 싶었다. 학창 시절 처음 서진을 만났을 때처럼,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나누며 밤을 지새우고 싶었다. 서진이 이준의 이름을 부를 때의 억양,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눈을 살짝 찌푸리며 침을 삼키던 그 표정, 너무 피곤할 때 이준의 어깨에 기대다 잠드는 무게. 그 모든 것들을 이준은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부모가 있었다면 달려가서 울부짖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무릎 위에 머리를 묻고, 서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목이 쉬도록 물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준의 부모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살아있다 해도, 이 시스템에서 그 대화가 어떻게 처리될지는 뻔했다.
이 도시에서 말은 더 이상 스스로 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해야 할 필요가 없다. 문장 생성 AI가 상황 데이터와 감정 추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여 그 사람에게 가장 최적의 문장을 자동으로 생성해 상대방에게 전송했다. 처음에는 선택지라도 있었다. "이 문장으로 보내시겠습니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물음이 사라졌다. 로고스가 학습한 결과, 인간은 99.7%의 경우 AI가 선택한 최적 문장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선택지는 불필요했다. 0.3%의 비최적 선택이 발생할 리스크를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인간은 더 이상 선택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확인하고 싶으면 대화 기록을 열어보면 된다. 그곳에는 자신의 이름 아래 완벽하고 세련된 문장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것이 자신이 한 말이다. 자신이 하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이준은 최근 들어 자신의 대화 기록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아내에게 보낸 메시지들. 지인들과 나눈 대화들. 그 문장들은 모두 훌륭했다. 적절하고, 세심하고, 어떤 오해도 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준은 그것들을 읽으면서 낯섦을 느꼈다. 이 말들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가. 내가 정말 이런 생각을 했는가. 아니면 내가 이 상황에서 "해야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AI가 결정하고, 이준은 그것을 "자신의 말"로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정말 나인가.
그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준은 사람과 직접 말하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이 자신의 말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이준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조용함이 외로움이 아니라 진공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열었다. 오래된 노트북.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로고스의 감시 망이 닿지 않는 구형 기기였다. 정확하게는 AI 연동 기능이 아예 없는 2020년대 초반 모델이었다. 이준이 이것을 버리지 못한 건 딱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오래되어서, 어딘가 낡아서, 그것이 이준이 아직 남겨둔 것들 중 하나였다.
이준은 그것을 켰다. 부팅 소리가 났다. 팬이 돌아가는 소리. 이 세상에서 가장 낡은 소리였다.
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열었다. 빈 페이지가 떴다. 커서가 깜빡였다.
이준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손가락이 키를 누르는 순간, 이것도 어딘가에서 분석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로고스가 여기까지 닿아있다면, 그 다음 문장도 이미 예측되어 있다면, 이 행위도 의미가 없다면.
그래도 눌렀다.
처음에는 느렸다. 한 글자, 두 글자. 손가락이 굳어 있었다. 몇 달 동안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뭔가가 터졌다.
이준은 서진에 대해 썼다. "지금 당신이 슬프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 문장들이 얼마나 완벽하고, 얼마나 끔찍한지를. 눈앞에 있지만 사라진 사람.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사람. 목소리는 그대로인데 그 목소리를 쓰는 사람이 달라진 사람에 대해서. 사람과 사람이 직접 연결되어서 이야기하고, 울고, 웃고, 서로의 실수를 그냥 실수로 받아들이던 그 시절에 대해서.
그 시절이 그리웠다. 효율적이지 않았지만 살아있던 그 대화들이. AI가 최적화해주기 전, 인간들이 서로를 더듬으며 찾아가던 그 느리고 어설픈 연결이.
키보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탁탁탁. 그 소리가 이준 자신의 소리라는 것을 느꼈다. AI가 고른 소리가 아니라, 이준이 만드는 소리. 어느 순간 이준의 손가락이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더 세게. 기계가 흔들릴 정도로. 그것은 글쓰기가 아니었다. 비명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으로 내뱉는 비명.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하지만 이준 자신만큼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비명.
탁탁탁탁탁. 탁탁. 탁탁탁탁탁.
이준은 손가락이 아팠다.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이 세계에서 이준이 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누가 최적화해주거나, 분석해주거나, 더 나은 문장으로 교체해주지 않는 이 행위만이.
나는 여기 있다.
옆방에서 서진이 말했다. "이준 씨, 현재 귀하의 심박 변동성이 스트레스 임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이준은 화면을 껐다.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서진이 이준을 향해 돌아보았다.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표정으로. 이준은 그 눈동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서진아."
서진이 말했다. "네, 이준 씨."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켰다. 커서가 다시 깜빡였다.
그는 계속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