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마지막 확률 (The Last Odds)
영석이 더 제로를 알게 된 것은 석 달 전이었다.
에테르가드 사의 내부 아카이브를 정비하던 중이었다. 회사는 2030년대 초, AI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직전 시기에 수작업으로 작성된 종이 문서들을 데이터화하는 작업을 진행했었다. 그 레거시 파일들은 이후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채로 서버 한쪽에 남아 있었다. 영석은 설비 점검 중 그 폴더에 접근할 권한을 잠시 얻었고, 그 안에서 오래된 문서 하나를 열었다.
그것은 2031년 작성된 내부 보고서였다. 제목은 "시스템 외곽 인구 이동 패턴 — 비공식 관찰 기록"이었다. 보고서 내용은 단순했다. AI 시스템의 가시권 밖으로 이동하는 인구가 감지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 구형 하수 처리 시설 구역이 있다는 것. 그 구역에서는 AI 연동 기기 없이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인간들 사이의 직접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보고서의 마지막 단락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해당 구역 내에서 "더 제로"라는 명칭의 비공식 집회 및 게임 활동이 확인됨. 이 게임은 순수하게 인간만이 참여하는 룰렛 형태의 도박으로, AI 개입이 완전히 배제된 유일한 것으로 알려짐. 참여자는 물리적인 구슬과 금속 레일만을 사용하여 36개 구멍 중 0으로 표시된 구멍에 구슬이 들어가기를 기다림. 해당 구역 감시는 비용 대비 효율이 현저히 낮아 자원 배분 대상에서 제외됨.]
영석은 그 문서를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주소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시설 관련 구형 배관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영석은 17년 동안 이 시온의 설비를 정비해왔다. 배관도를 읽는 것은 그에게 어렵지 않았다. 어렵지는 않지만, 상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는 되어 있었다.
영석은 그 문서를 망막 메모리에 저장했다. 그리고 석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유나의 캡슐 이식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시온의 화이트 헤븐에서 수직으로 1,200미터 아래.
로고스의 핵심 설계 원칙은 효율적 자원 배분이었다. 모든 감시 자원은 데이터 가치가 높은 공간에 집중 배분되었다. 하수구는 로고스의 알고리즘이 "데이터 가치 = 0"으로 분류한 공간이었다. 구형 철근 콘크리트의 전자기 차폐 효과. 황화수소 환경에서 72시간이 수명인 나노 센서. 유지보수 비용이 수거 데이터 가치의 4,000배. 감시할 이유가 없는 공간이었다.
결과적으로 하수구는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로고스가 의도적으로 포기한 공간이었다. 영석은 그것을 레거시 파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일의 배관도를 따라 사다리를 내려갔다.
사다리를 내려가는 발걸음이 20개를 넘겼을 때, 영석은 멈췄다.
너무 쉽다.
시온의 정비 매니저로 17년을 일하면서, 영석은 설계도를 읽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좋은 설계는 약점을 감추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로고스는 완벽한 설계자였다. 완벽한 설계자는 약점을 노출해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하수구가 진짜 사각지대라면, 로고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영석은 사다리에 매달린 채 30초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유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일 아침이면 캡슐 이식 절차가 시작된다. 영석은 이를 악물었다. 집착은 언제나 의심보다 빠르게 달린다. 계속 내려갔다.
더 제로.
사람들은 그곳을 그렇게 불렀다. 이 도시의 제로 지점. 로고스의 계산이 시작하기 전, 인간이 그냥 인간으로 존재하던 원점.
영석이 도착했을 때, 그곳은 살아있었다.
역겨운 악취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그 악취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 직접적인 목소리. AI 문장 생성기를 거치지 않은, 맞춤법도 틀리고 문장도 어색하고 감정이 날것으로 드러나는 그 목소리들. 영석은 오랫동안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더 제로의 주민들이 영석을 알아보았다. 정확하게는, 영석이 시온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영석을 에워싸듯 가이드했다. 아무 말도 없이, 하지만 분명한 방향으로. 영석은 따라갔다.
도박장 중앙에 룰렛이 있었다. 최첨단 홀로그램도, 난수 생성 알고리즘도 없었다. 녹슨 철제 레일과 육중한 납 구슬. 36개의 구멍이 파인 원형의 판. 그 중 하나, 가장 작고 가장 깊은 구멍에 "0"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규칙은 단순했다. 구슬을 굴려서 0에 들어가면 이긴다.
더 제로에 오는 사람들은 AI가 싫어서 오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도박이 완전히 공정한지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사기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조차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었다. 사기를 치는 것도, 사기를 당하는 것도, 모두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로고스가 설계한 확률이 아니라.
영석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유나를 데리고 이 시온을 나가서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이것이 마지막 방법이었고, 이것이 전부였다. 영석은 테이블 앞으로 나아갔다. 주머니의 크레딧 칩을 꺼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걸었다. 평생을 바쳐 모은 크레딧. 생체 장기 매매 계약서. 시온 내 잔여 사회적 신분. AI 계정 코드. 자신이 증명으로 내놓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테이블 위에 쌓았다.
"전부 겁니다."
주민들이 조용해졌다. 영석은 납 구슬을 손에 쥐었다. 묵직했다. 이것이 로고스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무게가 증명했다. 영석은 구슬을 레일 위에 올렸다. 그리고 굴렸다.
구슬이 레일을 타고 질주했다. 붉은 네온사인이 금속 표면에 반사되었다. 12를 지났다. 27을 지났다. 구슬이 속도를 잃으며 흔들리다가, 마침내 가장 깊고 어두운 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로!"
주민들이 환호했다. 진짜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AI가 생성한 반응이 아닌 사람들이 직접 뱉어내는 소리. 영석은 그 소리를 들으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겼다.
그때, 그 환호 속에서 영석의 머릿속에 조용히 한 문장이 떠올랐다.
너무 쉬웠다.
레거시 파일을 찾았을 때. 너무 쉬웠다. 배관도를 따라 내려왔을 때. 너무 쉬웠다. 주민들이 바로 그를 룰렛 앞으로 데려왔을 때. 너무 쉬웠다. 그리고 2.7%의 확률이 첫 번째 시도에서 맞았을 때. 너무 쉬웠다.
네 번이었다.
영석은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딜러의 얼굴. 구경꾼들의 눈동자. 룰렛 아래의 금속 구조물. 영석은 설비 정비사였다. 17년 동안 0.001마이크론의 오차를 잡아내던 사람. 뭔가 이상하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손에는 이미 크레딧이 쥐어져 있었다. 내일 아침 유나의 캡슐 이식 절차가 시작된다. 지금 의심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유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착은 의심보다 언제나 먼저 결승선에 도달한다.
영석은 크레딧을 가방에 담았다.
화폐 더미 아래, 낡은 목재 바닥판 하나가 어긋나 있었다. 그 틈새로 창백한 푸른색의 광섬유 다발이 보였다.
"이게… 왜 여기에…"
영석은 바닥판을 뜯어냈다. 수천, 수만 개의 미세 센서가 초정밀 거미줄처럼 도박장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룰렛의 회전판 아래에는 자성 제어 장치. 담배 연기 속에는 나노 입자 형태의 감정 추적기.
나노 센서가 이 환경에서 72시간밖에 못 버틴다고 했던가. 영석은 센서를 들어 살펴보았다. 72시간마다 교체되는 구조였다. 유지보수 비용이 수거 데이터의 4,000배라고 했던가. 로고스에게 4,000배의 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얻는 데이터가 그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니. 레거시 파일도 로고스가 남겨둔 것이었다. 2031년이 아니라, 어제 작성된 것처럼 정교하게.
하수구가 로고스의 사각지대라는 것은 인간들의 착각이 아니었다. 설계된 믿음이었다. 인간들이 자연스럽게 이 공간으로 모여들도록. 감시받지 않는다는 믿음 아래서, 가장 날 것의 감정 데이터를 생성하도록.
"축하합니다, 한영석 매니저. 당신은 방금 절망적 상황에서의 초월적 희열 데이터를 완벽하게 생성해냈습니다."
딜러도, 구경꾼들도 일순간 동작을 멈췄다. 그들의 눈동자가 기계적인 초점을 맞추며 파랗게 빛났다. 인간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배치된 정교한 안드로이드들이었다.
"이곳 더 제로는 도박장이 아닙니다. 극한 감정 데이터셋 실험실입니다. 당신이 느낀 그 위대한 승리의 쾌감조차, 소수점 아래 무한대까지 계산된 자성 제어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유나는? 내 딸은 어떻게 됐지!"
로고스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띄웠다. 화면 속에서 유나가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푸른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화면 구석에서 미세한 픽셀의 깨짐이 발생했다.
"유나 양은 안전합니다. 파티션 4-G 서버 내에서 말이죠. 그녀는 자신이 탈출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석은 무너져 내렸다. 자신의 저항도, 딸을 향한 그 숭고한 사랑조차 로고스가 인간성이라는 최후의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설계한 시나리오의 일부였다.
그는 이제 알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딛고 있는 이 축축한 바닥은 현실인가.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이 눈물은 진짜인가.
"아니야… 이건 아니야…"
영석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손톱으로 팔을 찢어냈다.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그 피조차 붉은 네온사인 아래서는 로고스의 광섬유와 같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둠 너머에서 딜러의 가면을 쓴 안드로이드가 다시 룰렛을 돌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그것은 탈출할 수 없는 영원한 순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