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헤어지면 돼

by 청명

탄이가 죽었다. 새까만 털을 둘러 '탄'으로 불렸던 아이는 태어난 색깔 그대로, 새까만 재로 변해 돌아갔다. 부릅뜬 눈, 다 뻗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팔다리. 필사의 몸부림이었던 듯 어떻게든 쭉 펴보려던 팔다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있었다. 내 체온보다 따뜻하던 탄이의 몸은 처음으로 미지근했고, 유연했던 몸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어떻게든 눈을 감겨주려던 동생의 손짓도 필사적이었으나 최후의 힘이 실린 눈꺼풀은 감기지 않고 올라왔다. 얼마나 한이 서려서 마지막까지 그렇게 힘을 실었을까. 그날 아침, 우린 이미 탄이가 우리에게 허락한 마지막 시간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잘 걷지도 못하는 탄이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단말마와도 같던, 잔뜩 목이 쉰 울음은 비명처럼 날카롭고 구슬펐다. 날랜 몸으로, 손질하려 꺼낸 고등어 비닐을 헤쳐내 엄마의 비명을 자아내던 탄이는 더 이상 없었다. 탄이의 투병은 꽤나 길었고, 근 2주간 급격히 악화되는 병세에 똥오줌도 못가리던 탄이의 낯선 모습은 우리에게 마음의 준비를 덤덤히 요구했지만. 그럼에도 떠나기 직전의 모습은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낯선, 가슴이 미어지는 광경이었다. 그날 오후 탄이는 생애 처음으로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밥을 먹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던 동생의 모습에 놀라기도 잠시. 우리 모두 이별의 때가 근접해왔음을 직감했다. 동생이 탄이를 들쳐안고 동물병원에 뛰어갔다. 느릿느릿한 몰골로 잔소리를 유발하던 동생은 온데간데 없었다. 마침내 병원에서 나온 피검사 결과는 억장이 무너지게 했다. 신부전증으로 암모니아를 오줌으로 배출하지 못해서, 입으로 오줌냄새가 나는 누런 침을 집안 곳곳 흘리고 다녔던 탄이였다. 검사결과 최대 검출가능한 수치인 150이 나왔고, 이 이상은 기계가 측정하지 못해서 이렇게 나왔을 뿐, 혈액을 희석해서 다시 검사하면 수치가 300을 넘길 거라고 했다. 혈액량 수치도 8이었다. 10 아래면 바로 수혈이 필요한 위급상황이라는데. 이미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했다. 만약 끝까지 붙잡아보고 싶다면 큰 병원에 가서 혈액투석과 수혈을 바로 해야한다고 했다. 아직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살 수 있다고 주문을 되뇌던 동생은 마침내 고개를 떨궜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비명을 지를 힘조차 없는 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 막내동생은 온몸을 들썩이며 울었다. 나 역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동생들이 무너지기 직전이었으니까. 엄마는 전날 맹장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입원한 상태였고, 아빠도 무릎수술로 병실에 있었다. 그 상황은 내게 울 여유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고, 그동안 많이 아팠을텐데, 이제 편한 곳으로 가서 건강히 잘 지내라고.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탄이가 갈 고양이별은 저 멀리 있었지만, 바짝 쪼그라드는 몸을 지닌 탄이는 눈앞에 있었으므로. 그럼에도, 탄이를 데리고 온 오후를 넘겨 저녁이 지나고 자정을 넘길 때까지도 탄이는 용케 잘 버텼다. 사실 지켜보는 입장에선 가슴이 타들어가는 일이었고, 통렬한 수치로 탄이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했기에. 차라리 빨리 가기를 바랐다. 동시에 기적처럼 오늘을 버티고 병세가 나아지진 않을까. 좀 더 생이 허락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있을 리 없는 기적을 바래보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옅고 가녀린 호흡에, 계속해서 그의 생사를 수시로 체크하다 깜빡 마음이 풀릴 즈음, 막내동생이 방문을 두드렸다. "형. 탄이 죽었어." 폭탄과도 같은 그 말에, 준비를 수차례 했음에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동생을 따라 동생방에 들어가자 동생의 옷을 깔고 누운 탄이가 보였다. 살아생전, 그 아픈 증세로 악취나는 침때문에 철저히 격리당했던 탄이었다. 우리의 옷과 이불은 철저히 탄이에게서 분리되었고, 탄이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문은 꽁꽁 걸어 잠가야 했다. 깜빡하고 방문을 열어두었다가 버린 옷과 이불도 한 보따리였다. 그렇게 우리의 경계대상 1호가 되어 굳게 닫힌 문을 수차례 마주했을 탄이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보드라운 옷에 몸을 맡기고 눈도 채 감지 못한 채로, 그렇게 우리에게서 떠나갔다. 먹먹한 가슴을 뒤로 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우리는 각자의 시간에 맞춰 직장으로, 학교로, 학원으로 향해야했다. 싸늘해진 탄이를 혼자 두고서. 감상에 잠겨있을 틈도 없이, 학원에서 연거푸 쏟아지는 강의를 뇌에 쑤셔넣고, 다음날 있을 시험을 준비하며 동료수강생들과 스터디를 진행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우리 스터디원은 모두 같은 나이에, 반려동물을 키웠다. 우리는 모두 작년 시험을 응시했으며, 나를 제외한 두 명의 스터디원은 작년, 키우던 강아지를 떠나보내고 결국 멘탈을 부여잡지 못한 채로 시험에 낙방했다. 절절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올해는 집에 있는 반려동물들이 건강하기를, 그래서 그 소중한 가족들에게서 힘을 얻고 응원받아 이번 시험은 합격하자는 대화를 나눈지 2주 만에. 올해는 내 차례가 되어 나는 영혼없는 상태로, 집에 남겨진 탄이 생각에 버퍼링 걸린 답변을 이어가다 스터디를 마쳤다. 오기 전엔 탄이의 죽음을 나눠야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오늘은 쉬어야할 것 같다고.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이미 상실의 슬픔을 절절히 겪었을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늦은 밤이 되어 인천 집에 도착하자 탄이는 이미 자그만 함에 담겨있었다. 허무했다.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게 맞는지. 난 대체 뭐하려고 공부를 하는지. 학원까진 잘 버텼지만 결국 나는 쓰러졌다. 엄마는 아직 입원 중이지만 아빠는 퇴원을 해서, 나는 그래도 내일 엄마가 퇴원하면 다같이 탄이의 마지막을 보고 장례를 치룰 줄 알았는데. 그래서 찍혀있던 걸까, 아빠의 부재중 전화는.

삶이란 참 허무하다는 생각에, 탄이의 마지막,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감에. 난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학원을 다니며 시간을 죽였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부지런히 서울을 오가며, 정신없이 삶을 쏟는 걸까. 탄이가 죽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노량진으로 향했고, 동생은 학교를, 아빠는 회사를 갔다. 탄이의 장례식 다음날은 만우절이어서, 사람들은 뭐가 즐거운지 히히덕대며 장난을 치고 들뜬 얼굴을 비춰보였다. 괜시리 모든 것에 속이 상해서,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탄이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세상을, 한결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원망하며 울분을 가슴에 품었다. 마음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인강은 계속 밀렸으며, 그 주에 보았던 시험성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밤에도 잠들기 어려웠고, 아침이면 눈을 뜨기 어려웠다. 학원에서 치른 중간고사 날에는 늦잠을 잤고, 이를 악물고는 가방을 챙겨 바로 지하철을 탔다. 인생 참 뭣같다고, 괜찮냐고 물어보는 친구에게 욕섞인 답장을 보냈다. 세상은 나만 빼고 바삐 흘러가는 것 같았고, 내면의 목소리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계속해서 쌓이는 숙제가 있었고 밀리는 공부가 있었다. 탄이의 죽음을 견디기도 벅찬 내게 세상은 잔인하리마치 무정했고, 오히려 그 파도에 몸을 맡겨 정신없이 나를 몰아붙이고 학대하고 나면 조금은 슬픔을 잊는 것 같기도 했다.

4월 4일, 역사적인 대통령 탄핵선고로 세상은 떠들썩했고, 핸드폰으로는 사람들의 들뜬 반응이 줄을 이어 올라왔다. 심지어는 엄마까지도, 우리나라 아직 살아있다며 들뜬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무감했다. 그렇게 들뜰 일인가. 탄이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괜스레 엄마의 모습이 야속하고 서운하게 느껴졌다. 2년 전, 처음으로 데려왔던 생애 첫 반려묘 '둥이'를 보내고. 이젠 고양이를 떠나보내는 일도 익숙해졌을 거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상실에 익숙해지는 건 불가능했다. 가슴이 텅 비어버린 헛헛함에, 온몸의 모든 것이 빠져나간 듯한 가벼움으로. 마치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은 심정으로 공덕을 향했다. 그래도 상실을 감내하며 이번 주 가장 먼저 글을 올려주신 모임장님 덕에, 그 글을 읽으며 조금은 공감과 위안을 받았다. 나에게도 이야기가 노래가 되는 순간이 찾아올까. 며칠 전 퇴원한 엄마와 대화를 나누며 이제 남은 두 친구까지만 키우고 더는 못 키우겠다며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것 역시도 구체적 사랑의 한 가지 양태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시끌벅적하게, 번개에서 각자의 고민거리들을 나누고 아무런 생각없이 떠들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 나에게는 미처 애도의 기간도 없이 내일은 또 학원에서 시험이 있었다. 무려 중간고사였다. 하하. 세상은 뭐 이리, 이다지도 바쁜 건지. 씁쓸했다. 밀린 공부가 대부분이라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시험을 치고 나왔다. 반타작도 하지 못한 점수에 고개가 떨궈졌다. 시험은 잘 봤냐는 아빠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나,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내 인생에서 지금 어디쯤 와있는 걸까. 이리저리 표류하는 배처럼, 인생이 부과하는 시련에 난파되어 이리저리 휘둘렸다. 나는 또 이 시련을 견디고 정리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지. 그래야만 내 인생의 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 있겠지. 그때까지 너무나도 오래, 허무와 고독과 쓰라림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이 버겁고도 벅찼다. 이별은 견뎌도 또 찾아왔고, 상실은 무뎌지긴 커녕, 겪을수록 더 아프기만 했다. 신은 왜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일까. 여기서 어떤 계획과 미래가,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난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고 그건 풀이를 장담할 수 없는 난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구나. 산다는 건 그런 거구나. 문득 어둑해지는 사위를 바라보다 그런 깨달음이 스쳤다. 난 아직 나아갈 힘을 얻지 못한 상태로 발걸음이 멈춰있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다. 탄이의 사체는 강렬한 인상으로 뇌리에 박혀있지만, 탄이를 닮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글을 쓰고 내일 학원에 갈 준비를 하며 아침을 맞이하겠지. 번개에서 선영님이 내게 그런 질문을 했었다. 시즌1부터 지금까지, 글을 계속 써왔다면 글감이 떨어지진 않았냐고. 나는 살다보면 글감은 계속 생긴다고 답했다. 정말로 그렇다. 지난주만 하더라도 나는 이런 주제와 내용의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탄이의 죽음을 적어간다. 산다는 건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글감이 멈추지 않는 것. 계속해서 쌓이는 글과 더불어서, 써야할 글이 계속 생기는 것. 삶을 이야기로 비유하는 건 어쩌면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써야할 글감이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아직 탄이의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정신이 이따금씩 돌아올 때마다 눈물이 고이고 슬픔이 몰려온다. 언제쯤 괜찮아질까, 모임장님의 글을 빌려 말하자면, 언제쯤 이 이야기도 노래가 될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다. 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괜찮아져서 사는 게 아니라, 탄이의 마지막 모습과 추억 같은 것들을 가슴에 묻으면서, 인생이란 앨범에 기억의 사진을 꽂으면서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의 사진을 인화하는 거니까. 가슴이 많이 아리지만 실컷 아파하고 눈물 흘리려 한다. 어쩌면 시험공부엔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지만 괜찮다. 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탄이와 빨리 헤어지려는 시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눈물 흘리고. 그렇게 가슴에 묻고 추모하고 실컷 꺽꺽대며 울어서, 탄이가 그 앞발을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내 머리에 얹고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지겹다고 권태로운 눈빛을 던질 때쯤. 그때. 내가 너없는 게 익숙해지고, 마침내 더 이상 지쳐 울지 못할 때. 그때 헤어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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