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잘 놀다 갑니다 도서 리뷰
개인적으로 여행 브이로그는 좀처럼 보지 않는다. 유일하게 열심히 봤던 시기가 코로나19가 터지고 여행이라는 게 언제쯤 다시 갈 수 있는 것인지 회의적이었던 때였다. 그 때가 아니고서야 여행 브이로그는 영 손이 안 간다. 가장 큰 이유는 도파민에 절여져 있는 뇌로 일반적으로 긴 호흡을 자랑하는 여행 브이로그를 견딜 수 없다는 점이다. 두 번쨰로는 다시 시간과 돈만 있다면 언제든 어디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세상이 다시 찾아왔기 때문이다. 흠 여행 볼 봐엔 직접 가고 말지라는 무책임한 생각과 영상을 보다 보면 필히 여행 가고 싶어질 텐데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할 지갑사정을 잘 알고 있는 점도 한 몫 한다.
하지만 여행 에세이는 좋아한다. 아무래도 여행 에세이는 관광 정보 가득한 '여행!!'보다는 여행에 대한 작가의 '관점!!'에 더욱 초점을 둔 매체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독서를 끊었던 내가 다시 책을 읽게 된 계기도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였다. 직접 보고 느낀 경험뿐만 아니라 여행에서 파생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늘도 잘 놀다 갑니다'라는 책도 기대가 컸다. 사실 이 책의 저자가 운영하고 있는 소풍족이라는 유튜브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한편으로 어느 정도 팬덤 규모가 큰 유튜브인 만큼 구독자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여행 이야기이면 어쩌지 쫄았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이 책은 김은영 작가의 5주 간의 유럽 여행을 시작으로 몽골, 런던, 대만 등 다양한 국가를 여행했던 썰들로 가득 차 있다. 가족들과 떠난 작가의 사적인 여행 이야기도 있고 5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소풍족 여행 유튜브 채널의 파트너 박서우 씨와의 여행 이야기들도 있다. 여행 스펙트럼이 다양해 목차를 보고 끌리는 여행지부터 독서를 시작해도 전혀 문제 없는 책이다. 모든 여행 가운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저자의 뛰어난 회복 탄력성이다.
인종차별이 많은 유럽, 선의 뒤에는 꼭 호객이 따라 붙는 인도 등 삐뚤게 본다면 한 없이 삐뚤 수 있는 상황에도 웃고 털어내버리는 강철 멘탈을 지녔다. 엄밀히 말하면 완벽한 멘탈은 아니다. 3명이서 여행을 갔을 때 한 명이 소외되면 느껴지는 꾸깃함을 절대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한 마디로 잘 삐진다는 이야기다. 홀수 여행에서 느끼는 꽁기한 감정이 너무 자세하게 서술돼 이써 동족 혐오가 살짝 올라왔다. 사실 나는 서운하면서도 쿨한 척 그냥 넘어가는 성격이라 찌질한 상태를 숨기지 않는 저자의 모습이 오히려 부러웠다. 이처럼 이 책은 여행이 주는 환상만을 다루지 않는다. 1만보로 측정될 만큼 덜덜 떨리던 몽골의 이동 모습, 분명 흥정을 끝내 놓고 1인당 가격이었다고 말을 바꾸는 기사와 더 싸울 체력도 없어 그냥 넘어가는 모습 등 현실적인 시행착오가 계속된다.
솔직함은 알 수 없는 끌림을 부른다. 괜히 응원하게 된다. 이미 다 끝나 버린 여행이지만 고장난 에어컨, 미쳐버린 온도를 견딘 저자의 여행에 한 줄기 빛이 내려지길 속으로 응원하면서 책을 읽었다. '노을이 예뻐 보였을 때, 노을이 노을로 보였을 때, 비로소 여행이 여행이 되었다'라는 대목을 읽었을 때는 스무살 때 엄마와 다녀왔던 유럽 패키지 여행을 떠올렸다. 체코에서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구경하고 프라하에서 자물쇠 걸린 다리에서 야경과 함께 했을 때,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세상보다 훨씬 더 크고 멋진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설렜다. 저자가 노을을 보며 느낀 감정이 내가 유럽 여행에서 마주한 벅참과 비슷할까 추측하며 읽었다.
서툴면 서툰 대로 있는 그대로 여행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최근에 다녀 온 홍콩 여행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난생 처음 내가 a부터 z까지 준비해야 하는 해외 여행이었다. 원체 즉흥적이고 일정 변동에 타격이 있는 타입이 아니라 가기 전에는 큰 걱정이 없었다. 뭐 될 대로 되겠지. 나 또한 저자 만큼이나 쉽지 않는 여행 속에서 정신승리급으로 감사할 점을 찾는데 자신이 있는 사림이었기에. 하지만 복병이 있었으니..나는 엄~청난 길치이자 방향치라는 것이다. 지도앱을 봐도 길을 잘 못찾는다. 한국에선 언어가 통하니 간판 이름을 대조하거나 gps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살아남았다. 홍콩은 달랐다. 일단 구글맵 gps가 생각보다 정교하지 않았고, 간판도 구별이 안 됐다. 동행인은 심각한 기계치로 모든 걸 나에게 위임한다는 태도로 길찾기를 도와주지 못했다. 그렇게 2박 3일의 짧은 여행에서 2번이나 울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다시는 해외로 자유여행 가지 않아야지.
10 중에 고생 9 즐거움 1이라면 뭣하러 여행가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은영 작가가 역경에도 여행이 선사하는 특별한 장면, 내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순간에 온 마음 다해 감사해 하고 만족스러워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지난 여행의 좋은 점을 떠올려봤다. 태풍이 겹쳐 계획한 모든 음식을 먹진 못했지만 먹었던 음식들은 대부분 맛있었고 가격도 저렴해서 좋았다. 트램을 타고 본 한참을 기다려 도착한 전망대는 왜 이렇게 사람이 몰리는지 단번에 이해되는 야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2만보 가까이 걷는 강행군이었지만 걸으면서 대화도 많이 할 수 있었고 마지막에 가서야 구글맵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기능을 깨우쳤다. 여행은 아쉬운 점에만 집중하기엔 수많은 매력을 지녔다. 이 당연한 진리를 오랜만에 깨우치게 만들어준 책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솔직한 여행기를 원한다면 이 책이 잘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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