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있는 용기
약 8개월 전 일이다. 눈 수술을 받고 한동안 얼음 안대를 쓰고 휴식을 취해야 했다. 졸린 상태였다면 문제가 없었지만, 이미 수술을 받으며 한 바탕 잔 만큼 잠이 오지 않았다. 눈 떠 있을 땐 대부분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 보기 바빴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으라니 신종 고문 같았다. 그 때 꺼내 든 게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 오디오북이었다. 당시 이 책이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소식을 tv 뉴스에서 접했었는데, 때마침 밀리에서 오디오북을 제공했다. 성우의 감미로운 음성 덕분일까. 나는 저자가 경비원으로서 업무를 소개받는 부분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0월 황금연휴에 이 책에 다시 도전했다.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초판본과 본문은 동일하나 책에서 언급되는 작품들을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QR 코드를 삽입한 것이 큰 특징이었다. 최근 <나의 폴라일지>를 읽으며 본문에 언급되는 풍경이나 자료는 본문 내에 수록되어야 감상에 방해받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나로서 자연스레 개정판에 손이 갔다.
사실 나는 이 책이 미술관에 방문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다. 콜센터 재직자 에세이처럼 말이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보다 이용자를 더 가까이 마주하는 직업이 바로 경비원인 만큼, 미술관 직원 또는 방문자들과 얽힌 에피소드는 얼마나 스펙타클할까를 상상했었다. 허나 이 책은 '미술관'에 초점을 둔 책이다. 책을 반절 정도 읽고 나서야 이 책의 부제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이 책은 가장 경이로운 세계, 한 해 동안 약 7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세계적인 명소,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경비원에 관한 이야기다. 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 경비원은 사람 만큼이나 작품과도 가까운 직업이었다. 7만 평의 공간, 300만 점의 작품 속에서 하루 8~12시간씩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채 서 있어야 하는 직업. 모든 관람객이 입장하기 30분 전, 고요한 전시실에서 벽에 걸린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작가는 종종 작품 세계에 깊게 빠져든다.
저자가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이 된 사연은 독특하다. 대학 졸업 후 <<뉴욕커>>라는 유명한 시사주간지 기업에 입사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고층 사무실에서 사회생활을 직한 패트릭 브링리 씨는 앞으로의 미래도 상승가도를 달리리라 의심치 않았었다. 하지만 인생은 그에게 크나큰 브레이크를 선사했다. 바로 친 형의 암 선고였다. 20대 중반 젊은 나이에 시한부 암을 진단 받고 몇 년간 투병하다 생을 달리한 형을 두고 브링리 씨는 더이상 삶의 의욕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를 잃어버렸다. 형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3장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에서 자세히 풀리는데, 형을 묘사하는 자세하고 다정한 표현에 저자의 애정이 듬뿍 묻어나와 형의 죽음을 마주한 구간에서 자연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자와 저자의 어머니는 비통한 상황 속 미술관을 향했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슬프고 밝은 그림을 찾아 나섰다. 브링리 씨가 찾은 그림은 경배 테마의 작품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통곡과 피에타 테마의 작품이었다. 책을 읽고 수록된 QR코드를 접속해보니 그림 속 감정이 더 크게 다가왔다.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슬플 때 꼭 밝고 따뜻한 작품만이 위로가 되는 건 아니다. 나와 똑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작품을 보며 내 감정을 이해받는 느낌을 받고 큰 위로를 얻기도 한다. 그림을 볼 때 (비전문가인 만큼 볼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색감이 얼마나 밝고 화려한지 또는 현대의 그림처럼 얼마나 완성도 높은지 등을 보고 감명을 받아왔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말 내 인생의 분기점이 될 수 있는 작품은 기술력보다는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중요하겠구나. 예술 작품을 쉽게 해석해주는 책들을 몇 권 접하며 미술관에 가면 '이유 불문 내 취향인 그림', '작가 이야기 또는 그림 속 상황'에 집중하며 보기 시작했는데 새로운 관점이 또 생겼다. '내 감정을 가장 자극한 작품.' 작품을 더 오래 들여다볼 수 있는 요소를 하나 더 발견하여 보람찼다. 이처럼 이 책은 저자가 메트로폴리탄 경비원 생활을 비롯해 살면서 접한 여러 작품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품 설명과 함께 본인은 이 작품을 어떻게 보았으며, 사람들이 작품을 어떻게 보면 좋을지에 대한 의견도 적혀 있다. 저자는 국내 언론사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예술을 배우려 하지 말고, 예술 안에서 배우라(Don't learn about art, learn from it)’는 말을 꼭 하고 싶다." 공부하는 마음보다는 자유로운 마음에서 바라 보기. 자유를 선사하는 삶의 태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은 감명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된 게 아닌가 싶다. 몇 주 뒤 미국 여행을 앞둔 언니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방문할 것이라 설레하고 있는데, 이 책을 통해 자유롭게, 마음껏 경이로운 예술 세계를 경험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