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현장에서 배운 말의 무게, 침묵의 힘

by Eunhye Grace Lee

사회복지사는 말을 다루는 직업이다. 정보를 전달하고, 상담을 진행하고, 서비스를 조율하며, 수많은 상황 속에서 적절한 언어를 골라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오래 해올수록, ‘어떤 말을 할 것인가’보다 ‘언제 말하지 않을 것인가’가 더 중요한 순간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상대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싶었고, 내가 가진 지식으로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싶었고, 제도의 가능성을 최대한 알리고 싶었다. 나는 열심히 말했고, 진심을 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담자가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말씀이 틀리진 않은데, 지금은 그냥 아무말도 들리지 않고 어떤 좋은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말이 옳다고 해서, 그 말이 지금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사회복지사의 말은 항상 ‘정보’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그저, 누군가의 곁에 있어주는 존재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말의 무게는 타이밍에서 나온다. 정확한 말도 때를 놓치면 가볍고, 작은 말도 때에 맞으면 깊게 파고든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식이나 매뉴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감수성이다.


나는 일본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이 '감수성'을 특히 절실하게 배웠다. 외국인이라는 정체성, 언어의 경계, 문화의 간극. 그것들은 나로 하여금 말보다 먼저 ‘기류’를 읽는 법을 배우게 했다. 이용자의 목소리에 담긴 미세한 떨림, 의자에 앉는 자세, 눈을 피하거나 오래 마주보는 시선, 말과 말 사이의 뜸들이는 호흡.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이 지금 어떤 말을 필요로 하는지, 혹은 지금은 어떤 말도 원하지 않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였다.


어느 날, 상담 중 한 중년 남성이 눈물을 흘렸다. 자녀와의 단절,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오래 앓고 있는 만성 질환. 그는 처음에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마지막에는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나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습니다.”
“힘내세요.”
“다 잘될 겁니다.”

그 어떤 말도, 지금 이 자리에서는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 가까이에 조용히 휴지 한 장을 건넸다. 그 순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때로는 최고의 언어다. 그 침묵은 상대의 고통을 함께 감당하겠다는 메시지이며, 말로 쉽게 덮지 않겠다는 존중이기도 하다.


사회복지사의 말은 업무 도구이자, 관계의 촉매이며, 윤리의 거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이 말을 누구를 위해 하고 있는가?'

'지금 이 말은, 나의 안도를 위한 것인가, 상대의 치유를 위한 것인가?'

'내가 말을 멈출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사회는 말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보고하라, 설명하라, 설득하라, 납득시켜라. 그러나 진짜 복지는, 말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불필요한 말을 덜어내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그후로 나는 일할수록 말을 줄이게 되었다. 필요한 말만 골라 쓰고, 상대가 다 말할 때까지 기다리고, 나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상대의 기분이 정리될 때까지 조용히 있는 법을 배웠다.


이 침묵은 불안할 때도 많다.
“지금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걸까?”
“너무 무심하다고 느끼진 않을까?”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놀라운 순간들을 보았다. 상대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거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게 되는 장면들. 그 침묵은 ‘텅 빈 시간’이 아니라, 치유가 시작되는 공간이었다.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사회복지사의 언어는,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말은 사람을 살릴 수도, 상처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말보다 말 없는 존재가 더 큰 힘이 된다. 이 책을 읽는 당신도,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혹은 누군가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꼭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진심은 말의 수에 비례하지 않고, 신뢰는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들어주고, 잘 기다려주는 사람에게 생긴다. 그리고 어떤 순간엔,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깊은 말이 된다.


나는 여전히 말을 고르고 다듬는다. 그러나 더 이상 모든 것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필요한 만큼 말하고, 말하지 않아야 할 때, 말 대신 곁에 있어주고 싶다. 그런 사회복지사가, 진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에.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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