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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의 완성

by 태리우스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에서 40만 원 정도 하는 청바지를 산 적이 있다. 짙푸른 청색에, 엉덩이 포켓에 브이자 자수가 독수리처럼 박혔있었는데 핏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모른다. 한 동안 유행했던 디젤이란 브랜드였다. 그 비싼 브랜드 바지를 하나 더 샀다. 이번에는 색깔이 옅은 하늘색 청바지였는데 마음에 쏙 들었다. 40만 원 바지가 비싸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생각해 보면 우린 상체에 걸치는 옷들은 비싼 값을 지불하는 반면 하체 를 보호하는 바지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정장, 겨울 코트, 패딩도 굉장히 비싸지만 큰맘 먹고 산다. 그런데 유독 하체에 입는 바지는 왜 큰맘 먹고 비싼 옷을 사지 않을까? 옷의 가격을 보고 싸구려라고 무시해서든 안되지만, 나는 주로 바지들을 싸구려로 많이 샀었다. 그랬던 내가 40만 원 청바지를 입어봤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2-3년 동안 대부분의 나날을 그 청바지들만 입었다. 얼마나 열심히 입었던지 튼튼하고 짱짱했던 청바지들은 여기저기 빵구가 헐고 닳아서 도저히 입을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버렸다.


언젠가 강남역 옷가게에 걸린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스타일의 완성은 다리다.'


정확히 '스타일의 완성은 바지'였는지, '스타일의 완성은 다리' 였는지 기억 안 나는데,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난 중저가 스파 브랜드의 저렴한 바지들을 입어보지도 않고 '그냥 대충 이 정도 사이즈 입으면 되겠네.' 하고 샀었다. 그래서 옷장에는 안 입는 게 아니라 못 입는 바지들이 많이 있다. 허리가 안 맞기 일쑤였고, 핏이 안 맞는 옷이 허다했다. 그런데 '스타일의 완성은 다리'라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가슴에 파장이 울려 퍼졌다. 그 말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백번 맞는 말이었다! 길거리든, 잡지든, 텔레비전이든 멋져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다리가 길었다. 탄탄한 근육과 기다란 다리는 청바지를 입든 츄리닝을 입든 반바지, 치마, 심지어 군복, 한복을 입든지 간에 멋져 보였던 것이다.



난 그것도 모르고, 진짜 멋은 다리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나는 다리가 짧고 배가 나왔다. 그리고 무릎도 아프다. 다리 운동도 잘 안 한다. 대학교 때 어떤 후배가 나를 멧돼지 같다고 한 적이 있다. 빈익빈 부익부처럼 나는 다리도 짧고 배도 나오고 저렴한 바지를 입고 다녔었다. 하체의 중요성을 모르고 살았고 무시하며 살았다. 바보처럼 말이다!


하체를 무시하는 나의 태도는 신발에도 나타난다. 다른 건 몰라도 신발은 좋은 걸 신으라고 한다. 왜냐면 옷이 안 맞는다고 몸이 아프거나 다치진 않지만 신발은 안 맞거나 불편하면 몸이 망가지고 아프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동화도 대충 산다. 아직도 내 발 사이즈를 정확히 모른다. 할인매장에 가서 발에도 잘 안 맞는 운동화를 사서 대충 신고 다니다가 버린다. 결론적으로 몸의 기둥이고 기본이며 스타일의 완성인 하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기본이 뭔지도 몰랐고 기본도 안되어 있는 인간이었다. 왜 이러고 살까? 근본 없는 사람처럼 살아갈까?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며칠 전에 슬리퍼를 신고 도서관 앞에 앉아있었다. 문득 명품구두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페라가모나, 구찌 같은 신발말이다.


명품 구두를 신고 다니면

첫째, 구두가 닳을까 봐 발발거리고 돌아다니지 못하니 행동거지가 얌전해질 테고. 으흠!

둘째, 함부로 뛰지도 못할 테니, 뛰어야 하는 상황 예를 들면 지각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시간관리도 잘할 테고. 오예!

셋째, 신발에 맞춰 옷도 단정히 입어서 젠틀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연출할 테고. 와우!

넷째, 헤어스타일도 단정하고, 얼굴도 잘 씻고 다닐 것이고. 예~!

다섯째, 자세도 바르게 되고, 태도도 매너 있는 남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푸쳐핸접!


명품 구두 하나로 행동, 시간관리, 분위기, 헤어스타일, 얼굴표정, 태도와 매너까지 완성할 수 있게 된다는 논리다. 도랑치고 가제 잡고 마당 쓸고 동전 줍고, 일석이조가 아니라 킹핀 하나 제대로 맞춰서 스트라이크 날리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100만 원짜리 신발하나로 하나로 사람의 인생까지 바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럴까? 실험해보고 싶지만 요즘 돈이 없다.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 남자가 주일날 교회에 신고 갈 신발 한쪽을 잃어버렸다. 아끼던 신발 한쪽이 없어져서 너무 화가 난 남자는 가족에게도 화를 내고 온갖 불평을 하면서 교회에 갔다. 교회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앞쪽에 앉아 기뻐하며 감사하는 모습으로 찬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끼던 신발이 없어졌서 짜증이 나 죽겠는데, 저 사람은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저렇게 기뻐하며 찬양을 할까?'


뒤에 앉아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남자를 지켜보고 있는데, 의자 밑에 나와 있어야 할 두 다리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다리 한쪽이 없는 장애인이었다. 신발 한쪽을 잃어버린 남자는 크게 뉘우치며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나는 신발 한쪽을 잃어버렸다고 짜증과 분통을 터트렸는데, 저 사람은 다리 하나가 없어도 저렇게 감사하며 기뻐하다니, 나 자신이 정말 부끄럽구나....'





'스타일의 완성은 다리다!'라는 말은 '모든 것의 완성은 기본에 충실한 것이다!'라는 말로 이해하고 싶다. 인생의 기본이 되는 것들은 뭘까? 내가 하는 일들의 기본은 뭘까? 튼튼한 다리, 직업의 실력, 인간 관계 같은 것들이 기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기본이 되는 건 나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 같다. 어떤 스타일의 옷을 입든 기뻐하고 감사하며 밝게 웃는 사람만큼 멋진 스타일의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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