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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교통 카드, 새로운 외국 친구

by 태리우스

금요일 오후 할 일이 많았다. 잃어버린 운전면허증을 재발급받으러 2호선 삼성역에 있는 강남면허시험장에 가야 했고, 또 다른 볼일을 보러 4호선 삼각지역에 가야 했고, 그다음에는 3호선 고속터미널역에 있는 센트럴시티터미널도 가야 했고, 4번째로 2호선 뚝섬역 출력소에 들렀다가 최종적으로 5호선 아차산역에 가야 했다. 타이트한 일정이었다. 군자역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게이트를 지나가는데, 바닥에 연노랑색 카드가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 교통카드를 찍고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발로 슥슥 밀어 구석 쪽으로 밀어 넣었다.


'청소하시는 분들이 처리해 주시겠지.'


7호선, 2호선을 지나 삼성역에 도착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직사각형 플라스틱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앞주머니, 뒷주머니를 몇 번이나 샅샅이 훑고 가방도 뒤져봤지만 없었다. 교통카드를 잃어버린 것이다. 특별히 오늘은 교통카드 쓸 일이 많아 환승 시간까지 계산해서 교통비를 최대한 아껴볼 계획이었다. 짜증이 밀려왔다.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오려다 욕은 마음속 튀르키예로 보내버렸다. 다행히 쌍욕은 나오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게이트를 나가버리려다 비상출입문에 달린 빨간색 원형 불빛의 은색 버튼을 눌러 역무원을 콜링 했다.


"네, 말씀하세요!"
"제가 군자역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왔는데, 잃어버린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면 그냥 가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러세요? 좌측 쭉 걸어오셔서 역무실로 들어오세요."
"아.... 네....."


'하..... 바빠 죽겠는데, 아.... C'


역무실에 들어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보증금 1,500원을 내란다. 나중에 교통카드를 찾으면 돌려주겠다는 종이쪽지를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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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 재발급을 받기 위해선 6개월 안에 찍은 인화용지 사진이 필요하다는 인터넷 정보를 본터라 삼성역에서 만 원 주고 즉석카메라 사진을 찍었다. 즉석 사진을 들고 있던 책에 책갈피처럼 꽂고 서둘러 강남면허시험장로 향했다. 번호표를 뽑고 내 차례가 됐다. 앉아있는 남자 직원이 나보다 높은 시선으로 인사를 했다. 즉석 사진과 함께 신분증을 내밀었다.


"사진 필요 없어요. 그냥 있는 사진으로 써도 돼요."
"6개월 안에 찍은 인화용지 사진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렇게 빡빡하게 안 해요."
"네? 아뇨, 저는 규정대로 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내년 적성검사 기간이라서 그때 새로 만드셔야 하는데, 이 사진을 쓰시면 그때 이 사진을 못 쓰셔도 괜찮으세요?"
"네, 저는 6개월 안에 찍은 사진으로 규정대로 할게요."


직원은 마지못해 내 사진을 받아 들었다. 아니! 규정대로 안 할 거면 왜 규정을 만들어놓은 건가? 몇 년 된 사진을 써도 된다고 규정을 만들던가? 규정대로 안 해도 된다는 직원과 규정대로 하겠다는 나, 서로 입장이 바뀐 상황이 묵은 된장처럼 푹푹한 기분이었다. 면허증을 재발급받고 시간을 보니 삼각지역 할 일은 포기하고 고속터미널 역으로 갔다. 교통카드를 잃어버렸으니 환승 계획은 무산되었고,

교통비 1,500원 추가!

고터에서 밥을 먹고 뚝섬역으로 가기 위해 다시 1회용 지하철 카드를 구매했다.

교통비 1,500원 추가!

뚝섬역에서 내려 몇 분 걸어 출력업체에 도착해 주문한 종이카드 800장을 수령했다.


'지하철을 타고 갈까? 버스를 타고 갈까?'


지갑에는 15,000원이 있었다. 지도를 보니 버스역이 더 가까웠다.


'버스비는 현금으로 내면 될 거야.'


7분 정도 걸어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의자 옆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가 분홍색 반바지를 입고 다리를 꼰 채로 종이봉투에 담긴 무언가를 분홍 토끼처럼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2012번 버스가 왔다. 버스에 올라타서 현금을 내려고 하니, 기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안 된다고 한다.


"안.... 안 돼요??"


엄숙한 얼굴로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한다. 요즘에 현금을 안 받는 버스가 많아졌는데, 이 버스도 그런 버스였던 것이다.


'하.....'


한숨을 내쉬며 버스에서 내렸다. 야금야금 과자류를 먹던 여자가 날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지하철 타고 갈걸....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서 지하철역까지 가려면 15분은 걸어가야 할 텐데..... 택시 탈까? 택시비 많이 나올 텐데.....'


교통카드를 잃어버려서 교통비도 많이 들고 다리도 아프고 힘들었다. 덜 익은 감을 한 입 깨문 것처럼 마음이 씁쓸하고 텁텁했다. 한숨과 함께 해가 물러나고 어둑어둑해졌다. 삼합을 담은 포장 용기가 반쯤 열린 듯 짜증의 구릿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아차산역에 가야 했기에 머리를 굴렸다.


'그래, 빌리자! 같은 버스 타는 사람한테 함께 찍어 달라 하고, 버스비는 입금해 주자!'


GOOD IDEA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세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그중에 내가 2012번 버스를 탈 때 같이 타려고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즉, 이 세 사람은 같은 버스를 안 타니 버스 태그 부탁을 못한다는 뜻이다. 누군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나와 운명을 함께할 누군가를!

잠시 몇 분 뒤,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어둠이 깔린 저녁 시간이라 의상의 컬러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파스텔톤 모자, 가방을 메고 청바지를 입은 안경 낀 아담한 20대 여성이었다. 얼굴이 한국 사람 같기도 하고, 중국 사람 같기도 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기에 그녀에게 사사삭 다가갔다. 먼저 국적을 정확히 알고 싶었다.


"한국 분이세요?"
"아? 아뇨! 미얀마 사람이에요."
"아! 미얀마요? 저 미얀마 가본 적 있어요."


교회에서 단기선교로 미얀마를 2번이나 가본 경험이 있었다. 한국에서 동남아시아인들 중에 미얀마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은데, 나도 무척 반가웠다.


"정말이요? 어디요?"
"저는 미얀마 양곤을 2번 갔었어요! 와! 반가워요!"


밍밍했던 여자와 내 얼굴이 정류장을 지나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타지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듯이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서로 매우 반갑게 느껴졌다. 한국말을 무척 잘한다고 칭찬하니 1년 6개월을 한국에 있었다고 한다. 열심히 한국말을 공부한 성실한 친구였던 것 같다. 그 친구는 명문대 연세대학교에서 바이오 생물 관련 자연계열 유학생이었고, 버스를 타고 세종대학교를 갈 계획이었다. 세종대학교에서 조금만 더 가면 군자역을 지나 아차산역이니 코스도 같았다.


"그런데..... 제가 교통카드를 잃어버렸어요. 같이 찍어주시면 입금해 드릴게요!"


그 학생은 쿨하게 웃으면서 그러겠다고 했고, 곧바로 2012번 버스가 와서 함께 버스에 올랐다.
나는 오징어 게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로봇처럼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초고속으로 스캔했다. 버스 왼쪽 뒤에서 두 번째 두 명 자리가 비어있었다. 함께 앉은 후 학생이 계좌번호를 찍어주고 입금을 하려고 하는데 잠시 고민을 하였다. 버스비 1,500원을 눌렀다가 지우고 고마운 마음 500원을 추가한 2,000원을 썼다가 다시 지우고 4,500원을 누르고 계좌 입금 버튼을 살포시 눌렀다. 4,500원 입금 내용을 보여주니 학생이 깜짝 놀라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1,500원은 교통비고 3,000원은 우리나라 유학생이시니까 시원한 커피 사 드세요. 감사합니다."


학생은 무척 고마워했다. 우린 최근 미얀마 군부 쿠데타 세력과 민주화 운동 세력 간의 정치 상황 얘기부터 학생의 미래 계획, 친구들 이야기, 가족, 오늘 저녁 계획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세종대학교에 왜 가세요?"
"친구가 세종대학교 어학당에 다녀요."
"네?! 내 친구도 세종대학교 어학당에 다니는데! 내 친구는 러시아 사람이에요! 내 친구랑 당신 친구가 서로 알겠네요!"


와! 세상 정말 좁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내 친구와 이 학생의 친구가 같은 세종대학교 어학당을 다닌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는데, 동남아 특유의 어려운 발음이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친구의 디테일한 개인정보를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더 물어보지는 못했다. 세종대학교 후문 쪽에 도착해서 우린 함께 내렸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교통카드를 잃어버리고 환승도 못 하고 교통비가 계속 추가될 때는 짜증 나사가 마음속을 계속 뚫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급기야 버스에서 현금 탑승이 거부당할 때는 뻑뻑해지는 나사산이 뭉그러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너무나도 반가운 미얀마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와인 뚜껑이 뻥하고 터지며 날아간 것처럼 짜증 나사도 은하계 저 멀리 날아갔다. 서로 연락처까지 주고받는 미얀마 친구를 만들게 되어서 신기하고 기뻤다. 미얀마 친구가 있다는 게 마치 미얀마가 제2의 고향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교통비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휴가를 내고 수십만 원을 들여서 비행기를 타고 두 번이나 미얀마에 갔었지만 미얀마 사람과 단둘이 버스를 타며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만 원도 안 들고 한국에서 미얀마 사람을 만나서 버스 드라이브와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으니 감사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음 날 카톡으로 서로 인사를 했다. 밝고 상냥하게 대화하는 걸 보니 마음씨가 착한 미얀마 친구 같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만나기로 했다. 이 친구의 한국 유학생활이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살다 보니 짜증이 기쁨과 감사로 변하는 신기한 경험을 한 날이었다. 우리 모두 짜증이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면 좋겠다!


21528887.jpg 미얀마 이네레(Inele) 호수에서 어부들이 전통적인 미얀마의 물고기잡이 방식인 "발로 노젓기"와 "원뿔형 덫"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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