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때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 메종&오브제를 보러 갔다. 비행기를 타고 14시간을 날아 프랑스 파리에 도착해 보니 거대한 개선문(Arc de Triomphe)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독립문의 모티브가 되었던 파리의 개선문은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는 목적답게 프랑스의 기상과 위용의 카리스마를 품고 있었다. 목조가 주를 이루는 우리나라의 건축물과 달리 석조들로 이루어진 파리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은 웅장하고 강한 이미지와 함께 아름다운 곡선들과 부드러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강한 내면과 부드러운 외면의 모습이 혁명적이면서 예술을 사랑하는 프랑스 국민성을 표현하는 듯 보였다.
숙소는 파리 서쪽에 위치한 라데팡스(La Defense)였다. 라데팡스는 전통적인 파리와는 대조적으로 현대 건축물과 고층빌딩이 많았다. 라데팡스의 중심에는 신개선문이라고 불리는 그랑드 아르슈(Grande Arche)라는 구조물이 있다. 개선문을 현대적 감각으로 미니멀하고 심플하게 재해석한 화이트 컬러의 거대한 직사각형 구조로, 라데팡스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개선문과 신 개선문은 일직선 상에 자리 잡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완전한 평행은 아니라고 한다. 개선문이 서있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라데팡스까지 이어지는 직선적인 도시계획을 역사적 축선(Axe historique)이라고 하는데 이 축선을 따라 중요한 랜드마크들이 배열되어 있다. 그랑드 아슈르는 전체적인 축을 따르면서도 약간의 각도 차이를 두고 있다. 이는 역사적인 승리와 제국주의 전통에 따르는 개선문과 다르게 현대적인 독창성을 표현하며 동시에 인권, 평화, 미래를 상징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미세한 각도의 차이에서 프랑스의 예술적 감각과 진취적인 사상이 느껴졌다.
'오~샹젤리제~' 노래의 주인공 샹젤리제 거리의 자로 잰 듯한 가로수는 어느새 우리나라에도 유행을 해서 직육면체의 가로수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도시 중앙에는 상승하는 라인이 만나 기린처럼 서있는 에펠탑(Eiffel Tower)이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189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세워졌다. 구스타프 에펠(Gustave Eiffle)이 설계한 이 철탑은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파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반대가 극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파리를 대표하는 조형물로 자리 잡았다.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 같다. 마법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 인생과 미래도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으니, 현재가 힘들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센 강이 흐르는 파리는 낭만적인 도시였다. 해가 지고 센 강을 따라 유람선을 타고 봤던 파리의 야경은 어딜 보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들, 파리를 밝히는 조명들이 클래식 악보의 그려진 음표처럼 독립적이면서 선율에 따라 연결되어 있었다. 파리를 예술의 도시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 몽마르트르 언덕을 못 가본 게 아직도 아쉽다. 다시 한번 프랑스를 갈 수 있다면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라가 파리의 석양을 바라보며 스케치를 하고 사진을 남기고 싶다.
프랑스의 정치, 문화, 예술사를 대표하는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을 갔다. 루브르는 원래 12세기 요새로 지어졌다. 이후 프랑수아 1세 때부터 왕궁으로 사용되었다가, 프랑스혁명 후 1793년 정식으로 공공 미술관으로 개관되었다. 현재 약 38만 점 이상의 소장품이 있고 하루에 다 돌아보기 힘들 만큼 방대한 전시물을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Best of Best, 전 세계 사람들을 루브르로 끌어모으는 초능력을 갖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작품, '모나리자(Mona Lisa)를 봤다. 관람객이 너무 많아 저 멀리 엽서크기만 한 크기로 보이는 그림 안에는 긴 머리에 통통한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신비로운 미소와 섬세한 표현의 붓터치는커녕 눈, 코, 입도 자세히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몽글한 무언가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루브르를 채우는 수만 점의 작품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모나리자'는 내 마음에 남아있다. 사진이 아닌 오리지널리티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컸던 것 같다. 멀리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이 정도인데 아무도 없는 미술관에서 '모나리자'와 독대를 했다면 어땠을까?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해가며 사람들을 밀치고 비집고 들어가서 한참 동안 가까이서 자세히 봤었어야 했는데 너무나도 아쉽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어떻게 그렸길래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을까? 1500년경 그려진 모나리자에는 특별한 특징들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신비한 미소'이다. 보는 각도와 관람자의 시선에 따라 미소가 달리 보이는데, 이를 다빈치가 개발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라고 한다. 색상과 형태를 부드럽게 섞는 기법으로, 표정이 흐릿하게 표현되어 감상자가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한다. 두 번째 특징은, '모나리자'의 눈의 시선이다. 어디서 보든 감상자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신비한 눈빛은 감사자와 교감을 느끼게 해 준다. 또 다른 특징은 '모나리자' 뒤에 있는 산과 강이 흐르는 풍경이다. 이 배경은 다빈치의 상상 속 자연이며 원근법을 활용해 뒷 배경을 더 멀리 보이도록 하였다. 다빈치가 사용한 원근법은 공기원근법(Atmospheric Perspective)으로 기존 원근법을 훨씬 더 정교하게 발전시켜 거리감을 극적으로 강화하였다.
예술대학을 나왔지만 예술가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왜 예술가들이 존경을 받는 걸까? 예술작품은 사랑받는 걸까? 예술가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는 것뿐인데....' 이런 궁금증이 들 때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오리지널리티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책 <미술관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나다>의 이호건 작가는 수백 년 동안 사랑받는 '모나리자'와 백 년 정도 사는 인간을 비교하며 참으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맞다고 했다. 그림과 회화, 조각뿐만 아니라 책과 글도 수 백년을 가는 것을 보면 나도 동의한다. 문득 내가 만들어내는 글쓰기와 디자인 작품들은 얼마나 갈지 궁금해진다. 인스턴트 같은 상품이 아닌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야겠다.
루브르를 보고 원래 오르세 역(Orsay Railway Station), 기차역이었던 독특한 건축 양식인 오르세 미술관(Mesee d'Orsay)에 갔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예술 작품이 전시된 오르세에는 모네(Monet), 르누아르(Renoir), 고흐(Van Gogh), 세잔(Cezanne) 같은 인상파와 후기인사파의 회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이 마음에 남아있다.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처럼 도시 전체가 예술 작품인 프랑스와 파리는 지금까지도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나라와 도시로 기억되고 있다.
프랑스에 가기 며칠 전 디자인 전문회사에서 입사 면접을 봤다. 대표님은 프랑스에 있는 대우전자 디자인센터장으로 20년을 일하셨던 분이셨다. 내가 메종오브제를 보러 파리를 간다고 하니 반가워하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면접에는 등산, 목욕, 저녁식사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우리를 '매드 포 갈릭'이라는 레스토랑에 데려갔었다. 지금은 '매드 포 갈릭'이 아웃백처럼 평범한 패밀리 레스토랑이지만 초창기만 해도 굉장히 럭셔리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었다. 서울 변두리에 살고 있던 강북사람이 강남의 고급음식점에 가볼 수 있어서 아주 설레었었다. 고품격의 식사를 하고 면접비가 들어있는 봉투를 받았다. 봉투를 열어보니 십만 원이 들어있었다. 면접비를 10만 원이나 주는 기업은 최근에도 없다. 우리가 깜짝 놀라니 대표님이 장난스럽게 웃으시면서 좋은 회사를 만들려고 한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프랑스에 오래 살다오시고 대기업 출신이셔서 그런가 남다른 경영철학이 느껴졌었다.
프랑스를 다녀오고 나는 그 회사에 입사를 했다. 회사를 다니면 여러 제품들을 디자인했다. 대표님과 함께 더운 여름 중국 광저우로 출장을 갔었다. 같은 버스 앞자리에 어떤 외국인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 외국인을 보고 대표님이 나에게 말했다.
"저 남자 100% 불란서 사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프랑스를 불란서로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유는 중국에서 프랑스를 법란서(佛蘭西)라고 불렀고, 일본의 영향을 받아 불란서(佛蘭西)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불란서제과, 불란서베이커리 이름을 한 빵집도 상당히 많았었다. 나이가 지긋하셨던 대표님도 프랑스를 불란서라고 부르셨다. 그렇다면 대표님은 어떻게 프랑스 사람인지 한 번에 알아봤을까? 외국인 남자는 흰색의 리넨 재질의 양복을 입고 있었고 날씬한 몸매였다. 금빛이 나는 머리 위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광저우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은 덥다고 웃통을 벗고 다녔는데 그 신사는 재킷까지 입고 있었으니 확실히 멋을 아는 멋쟁이 신사였다. 대표님은 곧바로 불어로 말을 걸었고 동양인이 불어로 말을 걸자 놀란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봉쥬르'처럼 치즈버터가 뚝뚝 떨어지는 억양으로 두 사람은 유창하게 대화를 나눴고 도착지에 버스가 멈추자 서로 갈길을 갔다.
대표님의 가족은 계속해서 프랑스에 살고 계셨고, 혼자 한국에 나와 디자인 회사를 차리셨었다. 가끔 프랑스에 살고 있던 가족들이 한국에 올 때면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프랑스에서 살았던 이야기들을 여러 번 들었다. 퇴사를 하고 연락을 하지 않지만 카톡에 대표님의 프로필을 보곤 하는데 지금은 프랑스에 살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두 번째 직장은 국민체육진흥공단이었다. 2년 계약직을 성공적으로 완료하고 무기계약직 신분을 획득했었다. 나는 공단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했었다. 공단에서는 투르드코리아라는 국내에서 가장 큰 사이클대회를 개최했었는데, 유럽 최대 사이클 대회 뚜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를 모티브로 한 것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TF팀이 만들어지면 부서에서 착출 되어 투르드코리아 조직위원회 디자이너로 홈페이지, 책자, 메달처럼 여러 디자인을 담당했었다. 뚜르 드 프랑스를 벤치마킹 했기에 프랑스 지도를 비롯한 대회의 관련 자료들을 여러 번 봤다. 1903년 프랑스에서 시작한 투르 드 프랑스는 매년 여름 21단계의 스테이지로 구성된 루트를 3주 동안 진행하는 자전거 경주다. 경주는 평지, 언덕, 산악처럼 다양한 코스에서 진행되며 마지막 날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결승선을 통과한다. 전 세계 수억 명이 시청하는 프랑스의 문화와 정체성을 대표하는 스포츠 이벤트다. 우리나라에는 생소한 뚜르 드 프랑스가 전 세계적인 인기가 있는 게 신기했다.
생각해 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딛기 직전 프랑스 땅을 밟았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20년을 살다 오신 사장님의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회사에 들어가서 프랑스 사이클 대회를 벤치마킹한 일을 했다. 나는 프랑스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을 상당히 좋아한다. 또한 제빵기능사를 따며 빵집을 차리려고 했던 나는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 출신의 교수님께 제과를 배웠다. 르 꼬르동 블루는 1895년 설립된 프랑스 파리에 본사를 두고 있는 세계적인 요리 교육기관이다. 프랑스 하면 또 빵부심이 남다른 나라가 아닌가? 돌이켜보니 대학 이후 내 인생에 무의식적으로 프랑스와 연결된 적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어는 '봉쥬르' 밖에 모르고 한 번밖에 가본 적 없는 프랑스가 문득 나에게 의미 있는 나라라고 느껴졌다. 오랫동안 스쳐 지나갔던 여자가 어느 순간 내 눈에 특별하게 느껴진 것처럼 프랑스가 특별하게 생각된다. 내 안에 있었지만 미처 몰랐던 파랑새 같은 프랑스를 더 깊이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