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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Oct 18. 2024

존재와 실존

어떤 학생이 있다. 공부에도 관심이 없고 학교폭력에 고통받던 그 학생이 고3이 되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살면 대학은커녕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게 뻔해 보였다. 문득 자신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중 하나를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변호사가 되기로 결정하고 로스쿨에 가기 위해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후 법대에 입학했다. 법대를 졸업하고 로스쿨을 갔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드디어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가가 되어 학교폭력에 고통받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변호가가 되었다. 더 이상 그는 학교폭력 피해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로 실제적인 존재, 실존하게 되었다. 본질적으로는 학폭피해자이지만 실존적으로 변호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가능성을 살펴보자, 학폭 피해자로 살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고립형 은둔자가 되어 하루 종일 게임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는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들을 보았고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현실에서 실현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를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나간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Existence precedes essence”이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의 핵심은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건은 주체성이 없다. 어떤 물건도 의지를 갖고 본질을 넘어서 실존을 향해 미래를 만들 수 없다. 칼은 영원히 칼이며, 연필은 영원히 연필로 존재한다. 칼이 자신은 반지가 될 거라며 귀금속 세공기술을 배울 수 없다. 연필이 다이아몬드가 될 거라며 초고압, 초고온 장치를 개발할지 못한다.


주체성이 있는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처럼 자기가 원하는 자신을 창조한다. 한 인간이 있다면 그 인간이 반드시 되어야 하는 어떤 이미지가 있고, 그 이미지를 창조하여 실존하게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실존하도록 만드는 창조 능력이 있다.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는 행위는 죽기 전까지 계속된다. 인간은 고정된 본질로 태어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순간을 선택하고 그 선택들을 통해 스스로를 형성하고 창조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선택과 자기 창조의 부담을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 맹점이 있다. 인간이 주체성을 깨닫고 인생의 가능성을 선택하고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들판을 뛰어다니는 사슴이나, 바다를 헤엄칠 수 있는 돌고래가 아니다. 태어나서 수년동안 스스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우는 것 밖에 없다. 일찍 인생의 비전과 목적을 찾고 주체적으로 삶을 일궈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 생각 없이 타인들이 사는 대로 인생을 살아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월급을 받아야 하니까 회사를 가고, 결혼을 할 때가 됐으니까 결혼을 한다.


이처럼 주체성이 발현되는 시기가 상당히 늦을 뿐 만 아니라 개개인이 다르고 평생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대다수이다. 또한 주체성이라 하면 의지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듯 하지만 인간은 의지뿐만 아니라 감정, 지식으로 되어있다. 지정의를 통해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며, 인생을 만들고 자신을 창조해 나간다. 지정의를 삼각형으로 본다면 누군가는 지정의가 균형 있게 발달되어 정삼각형일 수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지식과 의지는 덜 발달되었고 감정만 유난히 높게 발달되어 이등변 삼각형모양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살아갈 때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인생의 가능성들의 결과를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선택하여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맞이한다. 주체적인 의지로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사람들은 소수이며 대부분의 사람은 감정, 지식, 무의식, 환경 같은 다른 여러 요소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주체성과 비주체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자신을 창조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창조되는 복합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또한 실존주의자들은 주체성과 함께 책임을 상당히 확장시킨다. 인간은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개인철학이 상당한 책임감을 인간에게 부여한다. 자신의 인생만 책임지라는 건 납득이 되지만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은 납득하기가 어렵지만 예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오늘 아침에 샤워를 하면서 따뜻한 물을 30리터 쓰고 가스비를 2천 원 썼다고 해보자. 개인으로만 보면 별거 아니지만 전 인류적으로 계산해 보면 놀라운 수치가 나온다. 60억 인구 중에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인구가 20억 명이라 해도, 600억 리터의 물과, 4경의 가스비를 쓴 것이다. 그럼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해수면이 올라가서 그로 인한 자연재해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피해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범인류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영화 컨테이젼에서 종이를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의 무분별한 벌목으로 자연을 훼손을 하는 바람에 팬데믹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박쥐가 원래 살고 있던 밀림에서 쫓겨난다. 박쥐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박쥐가 나무 위에서 과일을 먹는다. 박쥐가 먹던 과일이 바로 밑에 있는 돼지우리에 떨어지고 돼지는 바이러스가 묻어 있는 열매를 먹는다. 돼지는 도축되어 유명 호텔 주방에 납품된다. 바이러스로 오염된 돼지를 호텔 주방장은 칼질한다. 갑자기 VIP 손님이 찾아와 주방장과 사진촬영을 요청한다. 대충 손을 닦고 VIP와 손을 맞잡고 사진을 찍는다. 팬데믹 바이러스가 전 지구에 퍼지는 첫날이 되는 순간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처럼 한 인간이 벌목 서류에 사인을 함으로 전 세계 사람이 팬데믹에 고통받게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거시적으로 보기 힘들다. 그래서 나의 선택의 영향력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책임을 어느 정도로 봐야 하는가?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의 기준은 명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과거, 현재, 미래 인류 중 얼마만큼의 책임인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실존주의 철학은 인류에 대한 책임을 의미적으로 강조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주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심각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을 막고자 이타적인 공동체 의식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균형감을 갖도록 책임감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은 스스로 태어날 수 없고 스스로 죽을 수 없다. 인생의 생명은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린 모두 죽겠지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생명과 죽음을 우리가 주관할 수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완전하게 주체적일 수 없다.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할 수 도 없으며, 지구를 자전시킬 수 도 없고, 잠을 컨트롤할 수 도 없다.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실존적인 삶을 일정 부분 살아내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무수한 또 다른 가능성들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실존주의로 인생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유의지라고 표현할 있는 주체성과 창조능력, 인류를 생각하는 책임성에 대한 고찰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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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께서 생명과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을 주관하신다고 믿는다. 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책임에 대한 부분은 아직 이해를 못 한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그런데 왜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기독교에서 인간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토록 지옥에 간다. 100년 정도 살 수 있는 인간이 영원한 미래를 결정해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면 그에 비례한 훨씬 큰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완전하지 않은 인간에게 제한된 능력보다 더 큰 책임이 부여된다고 생각이 들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설 때를 생각해 본다.


"너는 죄인이냐, 의인이냐?"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완전한 죄인입니다."

"그럼, 너는 지옥에 가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저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저의 모든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예수님의 의를 저에게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인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에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 너는 그 믿음으로 천국 간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복음을 믿기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9절

In their hearts humans plan their course, but the LORD establishes their steps. Psalms 16:9, NIV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John 14:6, NIV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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