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nger to bright
살다 보면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을 만난다. 부모일 수 있고, 선생님일 수 있고, 직장 상사, 친구, 군대 선임, 모임에서 인사이드 아웃의 버럭이 처럼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을 본다. 그렇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을 보면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사람은 분노조절장애일까? 아니면 화를 잘 내는 사람일까? 둘을 어떻게 구별할까?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분노조절장애자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화를 내고 낼 수 있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화를 내는 사람이니 우리가 따뜻하게 이해하고 배려해 줄 수 있다.
반면 그냥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사람을 봐가면서 화를 내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분노를 조절해 가며 약강강약으로 화를 내는 JUST 화잘러 피플들이다. 인생을 살면서 JUST 화잘러들을 종종 만난다. 그들을 '무례한 화잘러'라고 부르겠다. 그들은 자신보다 약자라고 생각하면 무참히 짓밟는다. 활화산처럼 쌓아두었던 온갖 화를 피해자에게 쏟아붓는다. 그 대상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면 묘한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때론 화잘러의 피해자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일 때는 통쾌한 쾌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내가 피해자가 되면 그것만큼 화나는 일도 없다.
'내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이면 저렇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할까?'
평판도 있고 사회생활이 있고 해서 몇 번 참긴 하지만 나도 결국 폭발을 하곤 한다. 세 번 정도 참다가 쓰리아웃 체인지로 나도 화를 내거나 아니면 매너 있게 말을 하기도 하는데 좋은 결과를 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그런 인간이 매너 있는 말로 알아들을 만한 인격을 갖췄더라면 애초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례한 화잘러'처럼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간은 거리를 두고 상종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계속 만나야하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지지 않도록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마음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크리스천이기에 참아본다.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시고 저주가 아닌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기도하려고 마음을 먹어본다.
나는 특이하게도 '무례한 화잘러 여자'들이 인생에 종종 나타나 내 마음을 어렵게 한다. 주먹이 울지만 여자라서 그럴 수도 없고 나를 왜 만만해보는지 알 수 없다. '무례한 화잘러 여인'들을 만날 때 무척 당황스럽다.
대부분 남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거나 남자친구가 없는 나이 많은 솔로 여자들이었다. 히스테리인가? 일종의 정신병인가? 아니면 그런 상태가 되면 특정남자에게 '분노조절장애'가 되는 건가? 나로서는 '내가 키가 작고 평범해 보여서 그런가?' 아니면 '서울 사람이라 말을 부드럽게 해서 만만해 보이는 건가?' 아니면 나를 좋아했는데 내가 관심이 없어하니까 '화'가 난 건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무례한 화잘러 여자'에게 무시받지 않는 비결을 배우고 싶다. 방법을 아시는 분들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도 화가 많은 편이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무시받는다고 느껴지면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누군가 다른 사람한테는 예의 있게 말하고 나한테는 함부로 말하는 꼴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내 인생의 '무화여'들이 내 눈앞에서 그런 행태를 저지른다. 그럼 '화'가 무척 난다.
그런데 돌아보면 나도 그럴 때가 많았다. 사람 봐가면서 행동했었고, 나에게 도움이 되면 아첨하고 별로 필요 없다 싶으면 무시했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 같다.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를 해야 한다. 나도 말실수를 많이 하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언행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그런 일들이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다.
'화'를 낼게 아니라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실제로 겪으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참기가 어렵다.
이렇듯 우린 '화'를 내고 누군가의 '화'를 받고 '화'로 인해 '화'가 난다. 영화 어벤저스에서 타노스가 자신은 피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라고 했듯이 '화'도 우리 인생을 구성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렇다면 '화'를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다루고 타인의 '화'에 대해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과연 '화'가 나쁘기만 할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 13-16절에서 과격한 행동을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은 성전을 장사하는 장소로 만들지 말라고 하시며 '의로운 화'를 나타내셨는데 '화'를 내시면서도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셨다. 양과 소를 내쫓으시고 돈은 쏟으셨지만 비둘기 파는 사람에게는 말씀으로만 꾸짖으셨다. 쫓겨난 양과 소는 도로 찾고 쏟아진 돈은 다시 주울 수 있지만 비둘기가 날아가버리면 다시 찾을 수 없기에 그리 하신 것 같다. 피해를 주기 위한 '화'가 아닌 바른 가르침을 주시기 위한 '의로운 화'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의로운 화'를 표현하기도 하셨다. 십자가를 향해 가는 예수님을 꾸짖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다. 평화의 왕, 구원의 왕, 예수님은 그저 말랑말랑한 분이 아니셨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철저하게 지적하신다. 우리가 반드시 고쳐야 할 부분을 엄중하게 대하시는 예수님의 '의로운 화'가 표면적으로는 당혹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철저히 우리를 위한 '의로운 화' 다. 마치 의사가 눈물을 흘리는 환자의 고름을 철저히 짜내는 것처럼, 살을 찢고 불필요한 조직을 제거하고 봉합하는 수술처럼 예수님의 '의로운 화'는 우리를 회복시키는 사랑의 의분이다.
요즘 시대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제자들에게 불처럼 '화'를 내는 엄한 스승을 보기가 어렵다. 영화 '위플래시'에서 플래처 교수는 앤드류에게 이 시대에 가장 해로운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 GOOD JOB"이라고 했다. 플래처는 제자들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기 위해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했다. 그 방법으로 본인이 분노의 화신이 되었다. 완벽한 제자들로 만들기 위해 결코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불같은 '화'를 채찍 삼아 제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결국 그의 '화'로 본인도 '화'를 당해서 학교에 쫓겨난다. 물론 그의 방법에 부작용도 있었지만 분명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다시 말해 인생에서는 누군가의 '화'가 필요할 때도 있다. 특히 리더, 스승이 '화'가 그렇다. 그분들의 '화'는 구성원들이 경각심을 갖고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그래서 리더는 때로 '화'를 내야 한다. '화'는 바람 빠진 자전거 타이어처럼 느슨해지고 나른해져 있는 구성원의 군기를 빵빵하게 불어넣는 촉매제역할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버스 운전사는 가끔 평탄한 길에서도 운전을 험하게 한다고 한다. 버스를 너무 부드럽게 주행하면 승객들이 손잡이도 안 잡고 긴장을 안 해서 급브레이크처럼 갑자기 닥친 상황에 오히려 더 큰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일부러 핸들도 꺾고 차를 흔들어서 승객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바다에서 잡은 대구를 살아있는 상태로 육지까지 운반할 때, 도착할 때쯤이면 대구들이 물속에서 힘을 잃고 흐물흐물해져 신선도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수조 안에 매기를 함께 넣었더니 메기가 대구를 계속 쫓아다녀 긴장시키고 활발히 움직이게 해서 대구의 신선도가 유지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메기 효과다.
그런 버스 운전사의 의도된 거친 드라이빙이 승객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대구를 괴롭힌 메기가 오히려 대구의 신선도를 유지시켜 준 것처럼 리더의 '의도된 화'는 구성원을 죽이는 '화'가 아니라 살리는 '화'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에겐 '의도된 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공무원을 그만두면서 수첩에 적어두었던 내용이 있다. 공직에서 만난 무례한 사람들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그들로 인해 느꼈던 '화'를 잊지 않아야 한다. 절치부심의 마음가짐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또다시 밟히지 않으려면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을 했건만, 사람은 몸과 마음이 편해지면 고난의 시간은 금세 까먹게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역사 속에 분노, '화'를 잊지 않아 과거와 같은 '화'를 당하지 말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렇듯 우리에겐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할 화'들이 있다.
누구나 화가 난다. TV에 어떤 중년의 여인이 한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다니고 찬물로 뿌려도 괜찮다고 하는데 이유가 마음에 화병이 나서 그렇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마음에 화가 났으면 그럴까? '화'는 '불'이다. 마음의 '불'인 '화'가 몸도 뜨겁게 달 군 것이다. 불은 잘못 사용하면 온 집을 태워 버릴 수도 있지만 지혜롭게 사용하면 집을 따뜻하게 해 줄 수도 있다.
우린 세상에 '화'들을 살펴보았다. 분노조절장애자의 '화', 무례한 화잘러들의 '화', 내 안에 '화', 다른 사람들의 '화'가 위험한 불이 되어 나를 불태우며 자멸할 것인가? 아니면 내 안에 '화', 타인의 '화'를 연료 삼아 나의 인생의 에너지로 삼을 것인지는 우리 선택이다. 특별히 우리에게 필요한 '화'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의로운 화', 우리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스승과 리더들의 '의도된 화', 그리고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기억할 화'.
우리에게 주어지고 만들어지는 '화'를 다스려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뜨거운 에너지가 되길 바란다. 몸과 마음에 열정에 불이 붙는 연료가 되길 바란다. 그 에너지가 빛이 되어 화난 사람이 밝게 빛나는 환한 사람이 되길 기대해 본다.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야고보서 1:19-20]
19 My dear brothers and sisters, take note of this: Everyone should be quick to listen, slow to speak and slow to become angry,
20 because human anger does not produce the righteousness that God desires.
[James 1: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