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뽀와 부메랑
1학년때 학사경고를 두 번 받았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춘천행 스쿨버스 대신 지하철을 타고 서울 종로에 있는 디자인아트학원을 다녔다. 일러스트레이터, 포토샵, 3D MAX 같은 디자인 프로그램을 배웠다. 그 기술로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롯데리아 같은 프랜차이즈 시급이 1600~1800원 하던 시절에 내 시급은 무려 만원이었다!
당연히 엄마는 내가 학교를 다니는 줄 알고 용돈을 줬고, 그 용돈으로 학원을 다니면서 나 자신에게 투자해서 더 큰돈을 벌고 있었다. 월급이 200만 원 정도 받았으니 돈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여자친구 코트도 사주고 시계도 사주며 돈을 흥청망청 썼다.
학교를 안 갔으니 줄줄이 F를 받아 학사 경고를 연속 2번 받았다. 엄마에게 성적표를 보여주진 않았다.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갔다 온 후 2학년 1학기로 복학을 했다. 3년이 지나 학교로 돌아오니 여자 동기들은 대부분 졸업을 하고 몇 명은 4학년으로 남아있었다. 그때만 해도 군복무기간이 2년 4개월로 3년 휴학을 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함께 복학한 동기들은 3년 후배 여자애들과 함께 수업을 같이 듣기 시작했다. 우리가 복학할 때 그 친구들의 동기 남자애들은 입대를 했고 그 빈자리를 우리가 채웠다.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함께 할 여후배들은 만 20세 성년도 안된 친구들도 있었다. 대부분 무난한 캐주얼 옷들을 즐겨 입는 지극히도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그 무리 중에 아주 예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포토그라피 수업시간에 서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 속 그 여자애는 유난히도 아리따웠다. 일반인들 사이에 껴있는 연예인처럼, 짱구만화에 등장한 순정만화의 여주인공처럼, 그 친구에게만 러블리 포토샵 필터를 킨 것처럼 빛났다.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머릿결, 깊고 사랑스러운 눈빛, 오똑한 코, 살구우윳빛 뽀얀 아가 피부, 앵두처럼 촉촉하게 반짝이는 입술, 배우 전지현 코에 있는 매력포인트 점까지! 아름다운 여자를 보니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른 자판기처럼 예쁘단 말이 자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애는 동갑내기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예쁜 동생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뒤늦게 군대를 가게 되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골대에 골키퍼가 사라지게 되었다.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예쁜 그 친구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디자인 프로그램을 잘 알았던 나는 선배로서 그 친구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가까워졌다. 다른 후배들도 디자인 프로그램을 모르는 애들이 많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 애의 남자친구의 빈자리를 채워가며 우린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함께 쇼핑을 하러 가고, 서울에 놀러 가기도 하고, 카페도 갔다. 그 친구에서 예쁜 속옷 선물을 주고 과제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었다. 마치 연인처럼 붙어 다녔다. 나도 그 친구도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린 여름의 늦은 밤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고요하고 어둑한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지나고 있었다. 좌우로 둥글둥글하게 조경된 화단들이 펼쳐져 있었고, 초여름 나뭇잎들이 우거지게 자라 있었다. 듬성듬성 서있는 가로등 불빛 조명이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나란히 걷던 우리는 서로의 팔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걷기 시작했다. 내 손등을 그 친구의 손에 갖다 댔다. 친구는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몇 초를 걸었다.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이면서 하나가 된 듯 연결된 짧은 순간이었다. 마치 원자를 하나씩 공유하고 결합하는 수소분자처럼, 그 몇 초 동안은 진공 속에 나와 그 애 둘 만이었다.
예술 대학이 가까워지자 그 친구는 나에게서 떨어져 걸었다. 그때 나는 그 애에게 남자친구와 관계를 묻지 않았기에 둘의 상태를 알 수 없었다. 남자친구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의 관계를 공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사귀듯 사귀지 않듯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시간, 그 친구와 캠퍼스의 인적이 드문 곳 계단에 단둘이 앉았다. 친구의 옆모습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 이마, 속눈썹, 코, 입술의 실루엣이 사랑스러웠다. 계단에 앉아 건너편의 차도에는 유성처럼 헤드라이트 불빛들이 지나가며 차선의 곡선을 따라 별똥별처럼 사라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뽀뽀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뽀뽀가 하고 싶어."
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문득, 그 친구가 키우는 강아지가 생각났다. 이름은 흰둥이. 흰둥이를 무척 좋아했는데, 심지어 흰둥이와 뽀뽀를 한다고 들었다. 그 생각이 드니 그 애와 뽀뽀하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 나는 강아지의 코, 입에 뽀뽀를 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사람이 동물과..... 그것도 입으로 말이다. 입은 놀라운 기관이다. 말하고, 먹고, 숨 쉬는 기능을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슈퍼 멀티 기관이란 말이다. 우리가 키스를 하는 이유도 인간에게 가장 예민한 감각기관이 혀이기 때문이다. 입술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나눠야 한다.
언젠가 그 애에게 물어본 적 있다.
"어떻게 강아지랑 뽀뽀를 해?"
"너무 좋고 귀여우니까 하지!"
당연하다는 듯,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대답을 했던 친구였다.
그날 로맨틱한 분위기는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한 듯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우린 평범한 현실세계로 돌아와 버렸다. 뽀뽀에 대한 욕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린 담소를 나누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면서 결심했다. 이 친구는 너무 나도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사귈 수는 없겠다고. 사귀면 뽀뽀도 해야 할 텐데, 강아지와 뽀뽀하는 사람과는 뽀뽀를 할 수 없으니, 이 친구와는 연인이 될 수 없겠다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우린 친구로 남게 되었다.
서로가 서서히 멀어지고, 그 친구는 몇 번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부잣집 딸내미라서 부잣집 아들내미를 만나 잘 살고 있다. 고급 외제차를 몰며 딸 셋을 낳아 잘 살고 있다. 가끔 연락을 하고 옛이야기를 하며 카톡 수다를 떨 때가 있다. 최근에는 기니피그를 키운다며 기니피그가 귀엽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기니피그와도 뽀뽀를 하는지 궁금하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기니피그와는 뽀뽀하지 않겠지. 기니피그는 돼지고 크기가 작을 테니까.
대학을 다니는 동안 캠퍼스 커플이 되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썸을 몇 번 탔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남자친구가 군대를 가거나 워킹홀리데이를 갔던 여자애들과 가까워지곤 했다. 바보처럼 남자친구의 빈자리를 내가 채워줬다.
그 애들의 남자친구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나라면 화가 머리끝까지 날 것 같다. 특히 예쁜 애의 남자친구는 나와도 친했던 후배 동생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사귀지는 않았지만 서로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들을 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남자친구는 군대에 있고, 내 앞에서는 누구보다 예쁜 천사 같은 여자애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내 마음은 꽃 밭에서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듯 가슴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었다.
하지난 인생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나의 불안하고 불편한 로맨스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남자친구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여자애와 가깝게 지냈었는데, 훗날 나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게 되었다. 그때 내 여자친구는 서울에 있었다. 기다린다던 여자친구의 마음이 변하면서 연락이 되지 않자, 내 온몸이 스마트폰 진동처럼 슬픔으로 떨렸다. 마음을 빨래 짜듯 힘겨웠던 시간들을 보냈다.
오늘의 주인공인 남자친구가 군대 간 예쁜 애와 가깝게 지낸 후 훗날 그 남자친구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났다. 바로 내가 오랫동안 사귀며 결혼을 이야기했던 여자친구가 내 후배와 결혼을 한 것이다. 심지어 나는 그들을 계속 봐야 했다. 결혼부터 자녀 출산까지 그들의 인생여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 가뜩이나 나는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인생의 좌절과 절망 속에서 오붓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서로를 사랑하는 그들을 모습을 볼 때 나는 더욱 초라해지고 비참했다.
여자친구가 예쁘니 군대에서 가뜩이나 불안했을 텐데 여자친구가 친한 형인 나와 가깝게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 후배의 마음이 어땠을까.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나를 향한 분노, 여자친구에 대한 서운함, 걱정, 두려움, 미움, 답답함으로 잠 못 들며 마음 아파했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아무리 예뻐도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는 가까이하지 않겠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서 솔직히 헤어지길 간절히 바라겠지만. 그래도 그 마음 꼭꼭 숨겨두겠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도록 둘의 사랑을 지켜봐 주고 응원해 주겠다.
내 인생의 상처를 통해서 내가 타인에게 줬던 상처를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받은 상처는 내가 타인에게 주었던 상처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듯했다. 오늘 내 삶이 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인간은 한 시 앞도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데이터를 보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사람들은 철이 든다. 철이 든다는 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는 말이 아닐까? 철이 드는 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절제하는 능력이다.
태풍 같은 천둥 같은 슬픔들과 땡볕 같은 힘든 시간들이 우리를 익게 만든다. 나의 철없고 부끄러운 스토리다. 잘 산다는 건 다른 사람 마음 아프지 않게 하는 삶이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삶이다. 그러면 그 행복이 나에게 더 큰 행복으로 돌아온다. 반대의 인생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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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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