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채양난 레터 3호
※ 섭식장애 당사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채영과 진솔이 2주마다 '엄마의 몸'에 대해서 글을 씁니다.
※ 매우 개인적이고 지극히 사적인 생각이니 '그렇구나-'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읽어주세요.
남의 손을 구경하기를 좋아한다.
손에는 삶의 흔적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손 주름, 피부의 노화, 색깔, 굳은살, 상처.
삶이 스치고 간 자리엔 자국이 남는다.
손엔 그 자국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길고 매끄러운 손보다는 투박하고 거친 손을 좋아한다.
노점에서 떡볶이를 파는 상인의 손
시장 거리에서 나물을 파는 노인의 손
기름때 묻은 공업사의 손
물에 퉁퉁 불은 식당 주인의 손
지금의 취향으로 추측해 본 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손은 엄마의 손이 아닐까 싶다.
선후가 바뀐 걸까
내가 엄마의 손을 좋아했기에 거칠고 투박한 손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도.
엄마의 손은 투박하다.
촉감은 거칠고 색감은 어둡다.
두께감 있고 손바닥이 큰 편이다.
핸드크림이라든지 네일아트라든지, 치장에 관한 것이 전혀 지나가지 않은 손.
밭일이라든지 주방 일이라든지 겨울바람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실컷 놀다 간 손
그게, 엄마의 손이다.
엄마의 손을 닮고 싶었다.
예쁘장하기보다는
씩씩하고 용감한 손을 갖고 싶었다.
평탄한 삶보다는 굴곡진 인생이 잘 숙성된 사람,
그런 사람이 가질 법한 손은 바로 엄마의 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봉숭아 물을 들여도 그다지 예쁘지 않고
화려한 매니큐어도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생긴 그 자체로 믿음을 주는 손.
엄마의 손을 이렇게만 보는 것은 혹시 나의 욕심일까?
아, 어쩌면 나는 참으로 냉정한 딸일지도 모르겠다.
늙고 낡은 엄마의 손을 봐도 눈물이 나지 않으니 말이다.
그저 그 손이 더 이상 나를 위해 일하지 않기를 바랄 뿐.
그저 그 손이 더 이상 남을 위해 애쓰지 않기를 바랄 뿐.
긁고 긁어 굳은살이 가득 배긴 손
마지막으로 매니큐어를 발랐던 때는 언제였을까?
엄마의 손을 잡았던 때는?
이미지와 함께 수많은 질문이 떠오른다.
손을 잡는 건 항상 엄마가 먼저다.
남자친구나 친구의 손을 잡는 건 늘 내가 먼저인데
엄마 손을 먼저 잡는 건 어색하다.
어렸을 때는 엄마 손을 놓칠까 두려워서
땀이 나도 꾹꾹 참고 잡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엄마가 잡아온 손을
언제 놓아야 자연스러울까 고민하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때문이라고 해도 되나?)
독립 후 본가에 가면 ‘내 방’이랄 게 없어서
엄마와 한 침대에서 자는 경우가 많다.
엄마가 틀어두는 염불을 들으며
주로 이미 질리도록 했던 이야기를
몇 번이고 하고 또 하는 식인데
대화 막바지 즈음이면
어김없이 손을 잡아온다.
“딸, 이제 죽니마니 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
투박한 손길이 손을 쓰다듬고 볼을 쓰다듬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두 손을 꽉 쥐고 있는 엄마의 손.
가끔은 아프고 불편하지만 아무말 않는다.
그게 엄마의 다정임을 알게 된 후부터는 더더욱.
언젠가 그 모든 게 그리워질 날이 오겠지.
몇 년이 지나도
썩어가는 김치를 버리지 못한다는 누군가처럼
내 몸 곳곳에 남아있는 엄마의 손길을
행여나 잊을까 잃을까
몇 번이고 떠올리는 날이 오고야 말겠지.
주말에 본가에 내려가면
먼저 엄마 손을 잡아볼까?
어쩌면 피하고 있었을 엄마의 상처를
조금 더 용기 내 마주해볼까?
퉁퉁 부어 예전에 사둔 반지 하나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그 손을,
된장, 고추장, 간장 등
온갖 양념이 스며든 ‘엄마’의 손을
고맙다고 말하며 잡아보면 어떨까.
당신의 손이
그저 타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음을
너무 오래 잊고 산 건 아닌지 묻고 싶다.
그래서 그렇게 아픈 게 아니냐고.
하지만 묻지 않겠지, 못하겠지.
잡을 수라도 있으면 다행일 텐데
이 막연한 감각이, 기억이 생생해진다면
울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부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