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채양난 레터 2호
※ 섭식장애 당사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채영과 진솔이 2주마다 '엄마의 몸'에 대해서 글을 씁니다.
※ 매우 개인적이고 지극히 사적인 생각이니 '그렇구나-'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읽어주세요.
엄마의 아랫배를 가로지르는 짙은 수술자국. 난 거기서 태어났다.
그곳이 한때 나의 집이었음을
지금까지 망각한 채 살아왔다
내가 저기 담겨 있었었구나.
나와 엄마의 역사는 저 배에서 시작됐구나
오늘 처음 그 사실을 기억한다.
엄마,
내가 거기에 있었었구나.
그때 엄만, 내가 엄마와 한 몸이라고 생각했어?
변해가는 엄마의 배를 바라보며 어떤 마음이었어?
배와 함께 달라지는 엄마의 몸을 보며 두렵진 않았어?
내가 빠져나온 후에 탄력 잃고 늘어진 엄마의 배를 볼 땐 어땠어?
두꺼운 수술자국이 싫었던 적은 없어?
엄마,
나를 그 작은 배에 품었었구나.
항상 엄마는 나보다 크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그 배가 얼마나 자그마한지 몰랐어
근데 늙어버린 엄마의 배를 보니
힘없고 작게만 느껴져
나도 한 생명을 내 배에 품을,
내 삶을 걸고 내 신체 일부를 한 존재에게 바칠
용기를 내는 날이 올까?
노동운동 했을 때,
감방에서 구호를 외칠 때,
너무 떨려서 같은 방에 수감됐던 동료 수감자들이
엄마를 뒤에서 꽉 안아줬다고
엄마 배를 꽉 안고 힘을 내게 했었다고 했지
나도 엄마에게 그 동료들처럼
뱃심을 실어주는 존재였던 적이 있을까?
울퉁불퉁하고 탄력없는 엄마의 배를 남들의 것과 비교하며 평가했던,
그리고 내 배가 엄마를 닮아질까봐 몸서리쳤던
아니, 몸서리치고 있는 내가 조금 부끄러워져
난 언제쯤 타인의 시선으로 날 평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부른 배를 창피해하고 불편해하지 않을 날이 올까?
탯줄이 사라진지 오래된 지금도
엄마는 내게 영양분을 줘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는 엄마가 주려는 영양분을 거부하고 싶어 이리저리 도망치고
오래전 애정에 굶주렸던 기억은 잃지 못하고
스스로를 굶기고 채우고 비우고 뱉어내
마치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이인 것처럼
엄마의 애정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토해내면서
외로움을 꽉 붙들고 있어
엄마,
나 이제 비로소
불안정했던 엄마의 뱃속 기억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졌어
가슴을 저미는 불안의 기억을 새긴 당신의 배를 미워하는 데에 너무 오랜 삶을 쓴 것 같아
그래서 이만, 안녕, 말하고 싶어졌어
엄마, 이 생이 끝나기 전에
우리가 탯줄을 통해 자연스레 양분을 나눴듯
자연스럽게 마음을 나누고 삶을 공유할 수 있을까?
탯줄을 싹둑 자르듯
각자 분리되어
든든한 배를 안고 삶을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다 가끔 엄마가 그리워지면
우리가 연결됐던 흔적인 배꼽을 매만지며
내가 이 세상에 홀로 떨어지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엄마의 배
너무나 낯설다.
엄마의 배, 배꼽 그리고 너무나 선명한 선 하나.
나와 하늘에 있는 쌍둥이 동생 그리고 남동생이
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 만들어진 길, 만들어졌던 길.
결혼 전 엄마의 배는 어땠을까?
사진 속 젊은 엄마는 한껏 양껏 멋을 부리고 있던데
수영복 입고 바다에 가는 게 전혀 쑥스럽지도 않았다던 그 시절,
엄마의 배는 보드랍고 흉터도 없고 쭈글쭈글하지도 않았겠지.
오로지 엄마를 위해서 존재하는 ‘배’였을 거야.
왜 엄마의 몸은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할까?
특히나 내가 찢고 나온 배를 보는 건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운 것 같아.
어떤 날은 내 미래 같고
어떤 날은 엄마의 과거를 상상하게 하고
어떤 날은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의 아우성이 보여.
인간은 날 때부터 고통과 함께 태어나는 것 같아.
그래서 고통이 기본값인 게 아닐까?
그 고통은 내가 아닌 당신의 고통.
나는 엄마의 고통과 함께 이 세상에 왔고
엄마의 배는 그 고통을 영원히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 같아.
자연분만이면 또 달랐을까?
그러게, 엄마 왜 제왕절개를 선택했어?
쓰다 보니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다는 걸 깨달았어.
한번 제왕절개를 한 사람은 계속 제왕절개만 해야 한다던데
엄마는 왜 처음부터 흉터를 택했을까?
아니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엄마는 우리 존재부터 너무 늦게 알았잖아.
불안했을 거야, 모두가 아팠으니까.
배는 우리 몸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나는 언제부턴가 ‘보여지는 것’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
크롭티를 입거나 딱 붙는 옷을 입을 때
내가 꽤 괜찮은 몸을 갖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부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배.
배인가 허리인가 등인가 구분하는 것도 어려워.
그저 살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지.
그럼 이제 엄마에게 배는 무엇일까?
돌아보면 엄마도 늘 뱃살을 빼야 한다며 온갖 운동을 했었는데
스테로이드제 복용과 함께 그 또한 무용지물이 되었네.
몇 년 전, 맹장 수술을 하고 내 배에도 흉터 3개가 생겼어.
복강경 수술이라 아주 작은 흉터들이지만, 수술하고 엄청 우울했었어.
공기가 빠질 때까지 빵빵한 배를 가리기 위해 커다란 원피스만 입고 다니고
혹시나 공기가 빠지고 나면 살이 처질까 봐 노심초사했었지.
뭐랄까, 젊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신체 부위라는 생각도 드네.
다들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배’를 드러냄으로써 증명하는 것 같아.
엄마는 어땠을까? 변해가는 배를 바라보는 게 너무 힘들진 않았어?
흉터도 말야, 나는 이 작은 것들도 너무 버겁고 괴로운데
굵은 선이 배 한가운데에 생기면
그게 아무리 생명을 위한 길이었어도 너무 싫지 않았을까?
배도 선도 그리고 어떤 날은 그 길로 나온 생명까지도 말야.
당신의 젊음과 맞바꾸어 태어났다는 죄책감을
나는 평생 내려놓지 못할 것 같아.
젊음이 조금씩 멀어져가는 30대에 들어서니 더 그런 것 같아.
이렇게 두렵고 불안한데
엄마는 어떻게 나를 선택했을까? 우리를 선택했을까?
다음에 엄마를 만나러 가면
용기 내 엄마의 배를 쓰다듬어 보고 싶다.
무서워서 피했던 그 길도 한번 만져보고
쭈글쭈글해진 피부에 로션도 발라주고 싶다.
그러다 눈물이 나면 울어도 좋을 것 같다.
미안함보다 고마움이 더 크면 좋겠는데
왜 늘 미안함만 커지는 걸까?
내가 그 배를 가르고 나온 것에 비해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 같다.
언제쯤이면 세상에 온 것을 감사할 수 있을까?
엄마의 배는 분명 지금도 앞으로도 엄마를 위해 존재할 텐데
나는 왜 고작 나의 출발로서만 그 배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유치한 관점이다.
어쩌면 나는 영영 엄마 앞에서 어른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 채영이 그렸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