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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익 May 22. 2021

일기 쓰기의 부조리함

"밑 빠진 독을 강물에 던져라!"

.

"나는 여전히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빠져 헤매고 있다. 내게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어 주려는 문장들 사이에. 실은 무의미한 문장들일 뿐인데, 진정 나의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는데." (엘레나 페란테, <어른들의 거짓된 삶>)




누군가 기억을 더듬으며 어렴풋이 문장을 적는다. 이내, 사진을 옮겨 붙이고 어울릴 만한 음악도 골라 본다. 그는 타자를 두드리며 일기를 쓰는 중이다.


일기를 적는 이유와 맥락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일기의 형태도 다양하다. 짧은 호흡으로 순간을 포착한 스냅샷(또는 짧은 클립)도 있고, 비교적 긴 호흡으로 인생의 의미를 그려낸 대하드라마도 있다.


당신의 일기는 짧은 호흡으로 순간을 담는 스냅샷인가, 긴 호흡으로 의미를 담는 드라마인가.


일기를 제대로 써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의 나는, 대하드라마 같은 일기를 쓰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때만 해도 삶의 고통과 무의미함에 퍽 괴로웠고, 그것들에도 의미와 맥락이 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의미의 바다'에 '무의미한 몸'을 던지고 싶다는 상상을 했었다.


밑 빠진 독도 큰 물 안에 던지면 이내 그 안에 물이 가득 찬다. 마치 의미 없는 인생도 이야기 안에 던지면 의미로 가득 차듯이.



아무리 밑 빠진 독이라도, 강물이나 바다에 던지면 저절로 그 안에 물이 가득 찬다. 독에 물이 들어온 건지 물에 독이 들어온 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강물이 밑 빠진 항아리를 물로 채우는 것처럼, '큰 이야기'가 어딘가 깨어진 것만 같은 나를 충만한 의미로 채워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신앙인이 되기로 결단했었고, 내 신앙의 이야기를 만들겠다며 일기를 쓰게 되었다.



일기를 통해 나를 마주 보고 기록하려면 기억을 쥐어 짜내야 한다. 그래야 포착하고 싶은 자신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포착한 단어, 문장을 필력과 감수성으로 잘 엮여야 한다.


그래서인지, 진지한 일기를 쓸 때마다 나는 베틀에 온몸을 갈아 넣어 천을 짜는 사람의 고통을 체감한다. 씨줄과 날줄이 엮여 비단으로 완성될 때까지, 단어와 문장을 짜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낸 일기 중 태반은 누더기 옷감에 불과하다. 보암직하지도 못하고, 내 고민과 응어리를 잘 풀어내지도 못한다. 그래도 그 부끄러운 누더기가, 때로는, 먼 훗날에 좋은 비단을 만드는 원료가 되기도 한다. 나중에 새로 옷을 지을 것을 기대하며 일단 장롱에 옷감을 숨겨놓듯이, 나중에 더 좋은 이야기를 쓰겠다며 부족한 일기를 숨기기도 한다. 지금은 풀어낼 수 없는 응어리가, 나중에는 저절로 글과 말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주제를 비틀고 싶은데, 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이 수고로운 작업이 정말로 나를 충만하게 해주는 건지 아니면 나를 영원히 괴롭힐 뿐인지가 궁금하다. 최근 들어 신앙과 관련한 회의적인 질문이 머리를 난잡하게 한다. '신을 믿는 이유가 내 바람대로 작동하지 않는 세상을 내 마음대로 이해하기 위한 무의미한 시도가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다. 이 세상과 삶이 본디 '서사적'이지가 않은데 왜 나는 내 삶을 자꾸 '서사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걸까. 그것이 실패하리라고 짐작하면서도.


알베르 카뮈. 부조리 개념의 거두.


알베르 카뮈가 창의적으로 전유한 개념인 '부조리'는 '완성하지 못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려 하는' 인간의 모습을 고발하는 메타포다. 인간은 제 나름의 합리성으로 자기와 세계를 이해하려고 분투한다. 그러나 세계는 본디 인간에게 무의미하고 무관심하다. 그러한 세계와 인간이 맞부딪힐 때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은 그 모순으로 괴로워한다. 칼바람이 부는 공허한 세계를 견디지 못한다. 급기야 삼엄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따뜻해 보이는 이야기를 천막 삼아 자기 몸을 덮어 버린다. 그 순간부터 세상의 사이즈는 "창백한 푸른 점"에 사는 어느 동물을 위한 천막으로 줄어든다. 그러고는 통제 가능해 보이는 이 작은 천막이 곧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




창백한 푸른 점. 이곳이 지구이다. 이 작은 것 안에 살면서 우리는 우주를 논하는 체 군다.


 좁은 천막 안에서 웅크린 채 살다 보면 답답하고 불편하다. 불편한 까닭은 애초부터 천막의 존재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 천막은 내가 억지로 만든 인공 세상이다. 이 점을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스스로에게 멍에를 씌웠음을 깨닫는다. 이와 같이, 모순의 인식은 자기 발견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고 나서야 옷도 입지 않은 자기들의 처지를 발견하고 이내 부끄러움을 느꼈던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천막에 갇혀 사는 신세임을 깨닫는다 할지라도, 천막 밖에 살아갈 용기와 능력이 없어서, 우리는 여전히 그 안에 머무른다. 천막을 고치면서 말이다. 여기서 천막을 고친다는 건 이야기를 고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깨달은 불편함을 해소하려면 낡은 이야기는 솎아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보충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 여기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 해결책은 무엇인가?"(크리스토퍼 라이트, p. 29)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고치고 또 고치는데, 언젠가 부조리함이 해소되고, 마침내 이야기를 아름답게 완성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이 지점에서, 카뮈가 '부조리'라는 아이디어를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발견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시포스. 돌을 굴려 올리는 일을 끝이 없이 해야 하는 가엾은 운명에 놓여 있다.


삶의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일의 완성'을 보장할 수 없는 무모한 작업이다. 그래도 어느 순간에 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네 형편은 죽지도 못하고 돌을 굴려 올려야 할 시시포스보다는 낫다. 우리의 삶은 이야기가 완성되기 전에 그냥 덜컥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허탈해지기도 한다. 큰 강물에 밑 빠진 독을 던져도 독 자체는 여전히 깨져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독 그 자체로는 아무리 물을 부어도 결코 물을 충만하게 채울 수 없다. 페란테의 말처럼, 빈 껍데기 같은 문장들을 모은다고 해서 나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야기 쓰기를 포기할 수 없다. 리오타르는 인간이 서사에게 지배당하는 모던적 삶에서 서사로부터 해방되는 포스트모던적 삶을 노래했다마는, 나는 그의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다. 또 그의 길을 대강 둘러본 결과, 그에게서 멋진 희망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우주의 빛나는 별을 나를 감싸는 천막에 난 구멍으로 읽어내는 상상력이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아닐까


따지고 보면, 큰 강물에 풍덩 빠진 이상, 독이 깨졌는지 안 깨졌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큰 비록 강물에 몸을 맡긴 신세라 하더라도, 충만히 채워진 물을 느끼며 흘러가는 것일 테니까. 부조리를 껴안고서 끝끝내 제 삶의 이야기를 써보려는 '존재할 용기'(Courage To Be)야말로 삶을 삶답게 만든다고 나는 믿는다. 덜컥 끝나 버릴 생물적 삶이라는 '깨진 독'에 사로잡혀서, 이야기를 계속 쓰는 삶이 주는 '가득 찬 물의 풍성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강물에 던져진 독이 물을 따라 계속 흐르듯, 시시포스가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돌을 굴려 올리듯, 이야기를 계속 만들면 된다.




후기:




이 일기에 후기를 써 보고 싶다. 일기에 후기 따위가 어울리겠냐만.


'일기를 왜 쓰냐'는 이 글의 핵심 질문은 '오늘일기 챌린지' 덕분에 다뤄볼 수 있었다. 일기에는 그 사람의 삶이 부분 부분 남아 있다. 그런 흔적들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이렇게 일기로 자기를 기록하려 하는 건 무엇 때문인지'가 한참 궁금했다. 당장 나 스스로가 왜 일기를 쓰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질문들에 봉착하게 된다: '일기라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를 어떻게 편집하고 확정하고, 나아가 남들 앞에서 증언하는가.', '애초에 이야기가 우리의 일생을 잘 담아내는 도구이기나 한 걸까.', '삶의 이야기는 완성될 수 있는가.'


이 글은 이런 질문들을 초보적으로 다룬 실험이다. 일관되게 풀어내는 것이 어려워서 다양한 메타포를 빌리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치 옷감 중간중간에 실이 꼬여서 못생기게 삐져나온 부분처럼 글의 부분 부분마다 못난 점들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옷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지금 남겨둔 이 꼬인 실을 언젠가 풀어서 더 근사한 옷을 짤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글 원본: https://blog.naver.com/ehrqkd1234/22236085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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