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는 인간 학습의 해방인가, 자율을 강제하는 신체 정치(Bodypolitics)인가?
지구적으로, 교육담론의 추세가 ‘학생 행위 주체성’의 기조로 옮겨간다. 『OECD Education 2030』 보고서는 회원국에게 교육시스템을 'Student Agency'에 근거해서 전면 재설계하라고 권고한다. 고교학점제라는 '뜨거운 감자'는 이 지구적 맥락 안에 놓여 있다.
출처: OECD, 2018, The Future We Want. The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 Education 2030
행위 주체성(Agency)의 근거는 ‘자기 선택과 자기 책임’이다. 원리적으로, 학생이 자신의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책임을 부담한다. 전통적으로, 평생교육계는 이러한 선택권 이양을 “학교 권력으로부터 인간 학습의 해방”으로 간주하며 환영해왔다. 따뜻한 시선이지만 허전한 건 사실이다. 다르게 볼 수는 없을까.
푸코의 시선을 빌려보면 어떨까. 할리우드의 잊힌 명작 <They Live>(1988)에서 주인공 ‘나다’는 마법의 선글라스를 장착해서 자본권력이 숨긴 이데올로기를 본다. 우리도 푸코의 렌즈를 빌려 고교학점제에서 숨은 이데올로기성을 읽어보자.
<They Live>(1988)의 장면. 주인공이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선글라스를 쓴다.
<They Live>(1988)의 장면. 선글라스를 쓰지 않았을 때의 세상.
<They Live>(1988)의 장면. 비로소 보이는 진짜 메시지.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규율 권력의 통치성(Governmentality)에 관해 의미심장한 분석을 보여준다. 진화할수록, 규율 권력은 자신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규율대상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이다. 상위 심급이 할 일은 규율대상에게 ‘너는 자율적’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고 뒤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감시자가 일일이 책임지고 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관리대상의 작동 양상이 복잡해진다면, 차라리 하위 개체에게 ‘자율성과 책무성’이라는 명목으로 '자기 감시'의 의무를 부과하는 편이 수월하다.
푸코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고교학점제는 용이한 통치를 위해 “강제된 자율성”일 수 있다. 더 이상 국가 교육과정이 노동시장에서의 성공이나 질 높은 복지를 직접 보장하지 못한다. 교육시스템과 노동시장 간의 긴밀했던 연결구조는 느슨해진 지 오래다. ‘코딩’, ‘AI’, ‘00 감수성’ 등 배울 것은 날로 쌓이지만 국가가 일일이 책임지기 어렵다. 기업과 시장은 학습의 비용 부담을 피한다. 이 숨 막히는 미로를 탈출하는 묘책이 있다. '개인'이라는 하위 심급에 책임과 비용 부담을 이양하고, 규율장치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면 된다.
사회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할 때, ‘책무성의 외주화'(Outsourcing of Accountability)가 발생한다. 국가 → 지방정부 → 단위학교 → 교사→ 학생 심급의 순서로 책임이 외주화 된다. 교사는 자기만의 평가기준과 커리큘럼을 기획해서 학교에서 벌어질 사태를 책임지고, 학생은 자기의 학습과정과 직업자격을 책임짐으로써 과거에 국가가 맡았던 책무성을 떠안는다. ‘이제 너는 자유롭게 선택하면 된다’는 메시지는 자유의 환각을 불어넣는다. 마가릿 대처의 유명한 ‘사회 포기 선언’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이제 사회란 없다. 자유로운 남녀 개인만이 있다.”
물론 푸코의 렌즈로 세상을 보면 피곤하다. <They Live>에서 주인공의 친구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고, 아예 주인공과 몸싸움까지 벌인다. 내가 정책 입안자라도 나의 좋은 '의도'를 통치성으로 읽는 사람이 퍽 원망스러울 것이다. 삐딱하게 굴지만 말고 수용적인 '태도'를 가져달라고 빌 수도 있다. 이를 예견했는지, 푸코는 통치성의 이데올로기가 개개인의 의도나 태도보다 “더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시작도 안 한 고교학점제에 초를 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잘 되길 바란다. 다만 고교학점제의 인식 바탕인 ‘행위 주체성 패러다임’을 따르지 않을 뿐이다. 정상패러다임을 조롱하고 그 배후에 놓인 다른 얼굴을 읽는 건 학생의 특권이다. 특권을 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