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북(Green Book, 2018)
영화 <그린 북>의 포스터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두 사람의 피부 색깔이다. 운전석에 앉은 백인과 뒷자리에 앉은 흑인. '둘이 역할 바꾸기를 하는 사기극인가?' 싶다가, 영화를 보면 실제로 백인의 운전사 토니 발레롱가(배우 비고 모텐슨)와 그의 보스인 흑인 천재 뮤지션 돈 셜리(배우 마허샬라 알리)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영화 제목 '그린 북'은 1960년대, 흑인이 미국 여행을 할 때 안전하게 잘 수 있는 숙소와 식당을 가이드해 놓은 안내책자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토니는 셜리의 운전수가 되면서 이 책을 건네받고 쓰여진 대로 길을 안내하지만, 둘이 가야하는 길은 안내 책자와는 사뭇 다른 길이다.
영화는 먼저 토니를 소개한다. 나이트 클럽에서 고객 대응을 하는 막가파 직원. 무례한 사람이 있으면 클럽 바깥으로 끌어내 주먹다짐으로 해결한다. VIP 손님의 물건을 숨겨놓았다가 찾은 척하며 돈을 벌어내는 잔꾀도 부린다. 햄버거 많이 먹기 대회에서 무식하게 많이 먹은 뒤 이겨 50달러를 따내는 무모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집안에 방문한 흑인 수리공들이 먹은 음료잔을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하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사회에서 주입한 흑인에 대한 편견이 있다면 바로 토니가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일 것이다. 나이트 클럽이 당분간 쉬게 되고, 토니는 지인으로부터 셜리의 운전수 면접을 제안받는다. 그가 처음 본 셜리는 '박사'라고 칭해지면서, 카네기 홀 꼭대기에 휘황찬란한 장식과 소품으로 가득찬 집에 사는 유사 귀족이다. 셜리는 자신이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하는 데에 수행 비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토니는 운전 외의 일은 할 수 없다며, 급여를 올려주지 않을 것이라면 하지 않겠다고 단칼에 거절한다.
토니의 고객 대응에 대한 평판을 많이 들은지라, 셜리는 집에까지 전화해서 토니에게 다시금 운전수 제안을하고, 토니는 당장 월세를 내야하는 지경의 경제 형편이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둘은 험난한 미국 남부 여행을 시작한다. 셜리는 재즈 음악을 연주하는 트리오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북부에서 명성을 떨치고 돈벌이가 좋지만, 남부 공연을 통해 흑인으로서의 편견을 떨치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토니는 백인들이 비싼 돈을 내고 그의 음악을 들으러 온 것을 구경하면서 셜리가 천재 음악가임을 알게 되고, 점점 그의 음악에 빠져든다. 셜리도 막무가내인 토니가 처음에는 버겁지만,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교양 없다고 거부했을 치킨을 맨손으로 뜯어먹는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 둘은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친해지면서 남부 순회 공연을 통과하는데, 큰 장벽이 그들 앞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인종 차별 문제이다.
"백인들이 주는 돈으로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고 먹고 살지. 하지만 무대가 끝나고 내려오면 나는 그저 흑인이야."
야밤에 불심검문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셜리가 하는 대사이다. 그는 원래 클래식 음악을 배우고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를 하기 위해 백인들이 그에게 원하는 재즈 음악을 연주하며 살고 있다. 교양과 품위를 몸에 두르고 있는 것 같지만, 셜리는 토니와 다니면서 각종 차별에 직면한다. 원하는 양복을 입어볼 수도 없고, 펍에서 위스키 한 잔을 편하게 마실 수도 없으며, 흑인들에게는 다른 흑인들처럼 막노동을 하지 않는 모습에 눈총을 받기도 한다. 토니는 이런 편견에 직면하는 셜리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행했던 편견을 전혀 받지 않았을 것 같은 외형의 셜리가 더한 차별을 받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는 스타인벡 피아노를 준비해놓지 않은 백인 공연관리자에게 주먹다짐을 하고, 비오는 야밤에 흑인이라는 이유로 불심검문을 하는 경찰에게도 욕과 주먹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경찰서 철창행. 셜리는 철창 안에서 토니에게 말한다. 폭력은 야만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고. 오히려 공들여 쌓은 교양과 품위만이 야만을 대하는 최후의 방식이라고. 셜리에게 교양은 엘리트주의적인 교육의 산물, 기득권의 답습이 아니라 생존의 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편안한 삶을 살아온 토니는 어떨까. 토니는 셜리와는 다른 자신의 경제적 처지와 주거지를 근거로, '오히려 내가 더 흑인에 가깝다'면서 어깃장을 놓는다. 외관상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교양과 품위가 없는 모습은 오히려 기득권의 특혜라고 볼 수 있다. 백인은 무례해도 이해받는다. 피부가 검은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받는 차별의 지점은, 그가 이탈리아계 백인이라는 것이 검문에서 드러나자 경찰이 '흑인이 조상에 있어서 흑인을 보스로 모시냐'면서 비꼴 때 드러난다. 이 지점은 인종 차별이 무논리한 야만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겉으로 보기에 백인이어도 흑인의 피가 섞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특정 대상에게 혐오의 근거를 덮어씌우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차이를 두어 분리하는, 차별이다.
차별의 민낯을 본 그들은 여행 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다. 크리스마스 전, 한 고급 식당에서 연주가 예정되어 있는 셜리 트리오. 하지만 셜리는 그곳에서 식사조차 할 수 없도록 차별당한다. 자신을 차별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웃기만 했던 셜리는, 이곳에서 식사를 하지 못한다면 연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토니는 그런 셜리를 데리고 다른 흑인 식당으로 가서 함께 밥을 먹는다. 그리고 셜리가 좋아하는 클래식 피아노 연주를 하게끔 돕는다. 셜리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쇼팽의 곡을 친다. 흑인 차별을 위해 공들여 연주하며 스스로를 옭아맸던 재즈 공연과 달리, 완전히 풀어진 모습으로 한 이 공연은 그를 긴장에서 이완시켜준다.
토니 또한 그에게서 진정한 교양이란 무엇인지 배운다. 비겁한 방식으로 얻은 물건을 돌려주는 것, 아내에게 맞춤법을 틀리지 않고 진심을 담아 편지를 쓰는 법. 양복을 빼입고 고급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서 어떤 모습이어야하는지를 배운다. 인종 차별을 넘어선 두 사람의 우정은 크리스마스에 함께 밥을 먹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브런치 무비패스
일시 : 2018년 12월 18일 20시
장소 : CGV 용산아이파크몰
두 실존 인물이 원만한 협의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영화가 제작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영화 제작진은 영화 제작을 원치 않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줘야 할 것이며, 이 영화가 실존 인물의 의도를 곡해하고 있다면 그들과 협의 후 상영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